김 주 희(침례신학대학 교수)

       김 주 희(침례신학대학 교수)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티뎐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청산별곡의 한 절은 누구 맞추는 것도 어디 던지는 것도 아니고 미워하는 이도 사랑하는 이도 없이 울고 있다고 한다. 그도 저도 아닌 것에 맞아 운다니 어쩌면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이 사소할 만치 엄청난 전쟁같은 운명의 돌에 맞아 우는 것일 오랫적 고려의 노래.  
우리 문학에서 노년문학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작가들이 젊기도 했고,  늙어 죽는 인간 보편 운명보다 급박하게 죽는 죽음이 많았던 시대의 흔적일 것이다. 굶어죽고, 징용 끌려가 죽고, 전쟁 통에 죽고, 데모하다 죽고 사고로 죽는 자연사 아닌 죽음들이 넘치는 굴곡 많은 시대를 우리 현대사는 거쳐왔다. 침략과 전쟁의 야만에 휘둘리는 죽음이 난무하는 시대였다. 권력, 지배, 경제 문제같은 시대의 문제들을 문학이 해명해 내더라도 개인은 자기 시대의 해석 틀로는 해명되지 않는 목숨의 운명이라는 차원 앞에 서고야 말게 된다. 노년이 등장하는 것은 그 목숨의 운명이라는 차원을 탐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우선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태어남과 삶 만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과정을 포괄해서 인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노년문학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탐구, 인생에 대한 탐구를 진지하게 해내는 것이다. 
소설가 이상운의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간다 - 길고 느린 죽음의 여정에서』 는 아버지 죽음 과정에 동행한 아들이 체험한 관찰을 관찰기록한다. 일인칭 소설로 보아도 좋은 이야기들에서 아들은 이승의 삶을 마감하는 목숨의 괴롭고 슬픈 과정을 직면해낸다.
 “죽음 차체는 순간의 일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평균 수명을 살 경우, 우리는 울적하고 고통스러운 일련의 긴 노화과정과 질병의 결과로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노화는 한순간의 일이 아니다. 노화는 죽음과 더불어 종료되는 기나긴 과정이다.  (......) 그게 대부분의 사람이 겪게 되는 ‘죽음의 과정’이다.”라고.
죽어가는 인간을 관리하고 길들여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의료환경에서 아버지는 죽음에 대한 것보다 혼자 격리되는 불안이 더 크고, 아들은 요양병원이 ‘입원후 일주일간 면회금지’ 시키는 것을 보고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온다. 아버지도 자신도 괴로운 연명치료 대신 인간적이고 안정적인 마지막 여정을 위해서 이다. 집 안에서 간병할 것을 결정하는 것은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구급차, 자주 갈아줘야 하는 대소변 기저귀, 늘어지고 물러지는 피부, 점점 사라지는 현실감각 .....”들을 일상 공간에서 겪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배설물이 배출하는 악취를 일상공간에서 견뎌야 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과정의 지루한 시간들을 일상 시간에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정신이 허물어져 헛것이 보이는 섬망증세로 고통겪고, 점점 자신의 통제력을 읽고 무너져 가가고 있다.
어떻게 존엄을 지키며 죽어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그래서 추상적인 명제가 아니다.  낯선 병원침대 말고 자기 집에서 덮고 자던 이부자리를 덮으면서 익숙한 삶의 터전과 감정적 유대 속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방안, 죽어가는 이의 곁을 지키는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을 줄일 사회적 제도적 도움들이 얼마나 절실한지는 당해보는 이들이 절로 깨닫게 되는 문제들이다. 점점 자신이 알고 있던 모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지키면서 인간의 운명을 읽어내고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으로 그 운명을 함께 감당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수록 아들 노력에 위안을 받게도 된다. 가공하지 않은 관찰과 체험 이야기의 힘은 사실을 담보한다는 점이므로. 하여 이 런 이야기는 죽는 존재라는 냉엄한 인간 운명, 그 죽음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뿐 아니라 죽어가는 이를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를 따뜻하게 고심하도록 이끈다. 제도의 필요와 제도를 만들 시각이 먼저 고려할 것, 개인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맞추어 나가려는 노력, 죽음을 맞닥뜨릴 일과 죽음 앞에 가장 무력한 약자로서 서는 이를 잘 대접해야 하는 애씀을 함께 떠올리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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