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기 황(논설위원 / 시인)

          나기황(논설위원 / 시인)

 #1. 잔설(殘雪)마저 정겨운 야산기슭, 황토로 지은 농막에 달착지근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희끗희끗한 중년의 사내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마당에 차려놓은 화덕에서 잘 손질된 장어토막이 구워지고 있다. 부천에 사는 송 병장이 가져왔다. 황토방에선 싱싱한 회 파티가 시작됐다. 전남 고흥에서 김 병장, 아니 어촌계장이 갓 잡아 온 횟감이다. 손에 잔을 들고
나 하사가 건배사(史)를 낭송한다.
‘869,우리들의 40년’-세월이 빠르다 합니다/오늘 여기 풋풋한 푸른 제복의 사내들이/40년 세월을 넘어/넉넉한 반백의 모습으로 다시 모였습니다/
세월은 인생의 거울이라 합니다/겉모습은 비록 변했을 지라도/살아온 삶의 자리는 서로 달랐을 지라도/만나보니 금방 알겠습니다.
젊음과 열정이 부딪혔던 그 시절/가슴 아픈 기억도 있지만/869포대 진짜 사나이들/ 전우여, 친구여, 아니 869형제여......오늘을 이어주는 서로의 거울이었음을/이제 알겠습니다.
지나 온 40년, 앞으로 다시 40년/따뜻한 인연을 위해 건배합시다. “건배!”
‘869회’, 군대모임인데 입대동기모임이 아니라 같은 시기에 근무했던 부대원들의 모임이다. 40년 전 당시 부대 내 큰 총기사고가 있었다. 동료 세 명이 죽어 간 사고였는데, 가슴 아픈 기억이 오히려 따뜻한 형제애로 승화된 셈이다. 일 년에 한두 차례 누군가가 내리는 이 소집통지(?)에 전국각지에 흩어져 살던 부대원들이 생업을 잠시 접어두고 한달음에 달려온다.
계급과 직책을 떠나, 당시 포대장부터 소대장, 선임하사, 행정병, 소대원을 비롯해 최근 퇴직한 원사들까지 기꺼운 마음으로 자리를 같이 한다.
회칙도 회비도 없다. 누군가는 식사비를 내고, 누군가는 장소를 제공한다. 지역특산물과 먹 거리가 쌓이고 1박2일 동안 추억을 불러 모아 삶의 애환을 풀어낸다. 모임의 시작도 헤어짐도 따뜻하다. 궁금해서 만나고 만나서 반갑다.

#2. 지난 주말, ‘작은 출판기념회’라는 이름의 특별한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한 장소에서, 동시에 치러지는 두 시인의 시집출판기념회다. 같은 문학단체에서 동인활동을 하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오랜 시간 맺어 온 인간적 관계와 문학적 교류가 밑바탕이 됐다.
식순도 내용도 여느 출판기념회와 달랐다. 내빈소개, 작가소개, 작품낭송, 작가의 인사에 이어 끝 순서로 축사가 이어진다. 축사는 참석자 전원이 한사람씩 돌아가며 덕담德談)을 하는 형식이다. 축사의 내용도 다양했다. 자기소개 겸 작가와의 인연을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삼행시로 축하의 말을 전하기도 한다. 민망한 과거사를 들춰내 한바탕 웃기도 하고, 찔끔 눈시울을 적실만큼 짠한 내용도 있었다.
축하인사가 한 바퀴 돌 때 쯤 이면 작가와 축하객은 친밀한 공감 속에 하나가 된다.
마음과 마음이 모여 만남의 강을 이루고, 만남의 강을 따라 함께 흘러가면서 자연스런 소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문학 동인들이 마련해 주는 비록 ‘작은’ 출판기념회지만 끝나고 나면 가슴 따뜻한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다.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축하객들의 덕담이 주인공의 가슴에 차곡차곡 쌓이고, 작가의 진심어린 감사의 마음이 참석자들에게 훈훈한 정으로 전달된다.
누가 왔네, 몇 명이 모였네. 얼마가 걷혔네 하는 뒷담화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쯤 되면 ‘작은’ 출판기념회가 아니라 ‘꽉 찬’ 출판기념회다.
모임도 많고 행사도 많다. 그러나 진심으로 박수치고 즐거웠던 경우는 별로 없다.
오죽하면 “소리 지르고, 호통 치는 것”이 ‘소통’이라는 우스개가 나올까.
행사나 모임의 격(格)을 높이는 것은 참석자의 수(數) 아니고, 참석자가 얼마나 행사를 즐기느냐에 달려있다. 만나서 반가워야 ‘모임’이다. 즐겁게 치러져야 잘된 ‘행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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