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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동네 오웅진 신부
꽃동네 오웅진 신부
  • 조철호
  • 승인 2015.02.01 2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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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동네의 꽃은 사철 피어있어야 하느니, 천지에 그 향기 가득해야 하느니…”
 

(동양일보 조철호 회장) 음성 ‘꽃동네’를 찾았다. 입춘(2월 4일)기운이 도는 듯 산 속인데도 영상의 기온이었다. 헤아려보니 이곳을 다시 찾아오는데 10년이 훌쩍 넘어섰다.

‘꽃동네’라는 이름을 짓고, 거지를 모아 동네를 만들고, ‘거지 없는 나라’를 만들어 명함이 없어도 전 국민이 아는 이름 오웅진(사진) 신부를 만나러 오는 길.

짧지 않은 그 동안에 행사장에서 악수만 나눈 적이 몇 차례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마다 “잘 견디고 있으신가요”라고 물었었다. 그 말 속에는, 짧지 않은 기간 검찰과 일부 언론들로부터 호되게 시달리면서 거의 대외관계-특히 언론과의 소통을 차단한 채 꽃동네에 칩거하여 수도에 정진한다는 소문대로라면 퍽이나 괴롭고 외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묶은 안부가 숨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해 말 한 ‘송년모임’ 석상에서 “이제 시간을 내서 속 얘기나 하자”면서 인터뷰 시간을 잡자고 몰아쳤다. 지난 몇 년간 만나자는 내 제의에 한결같이 ‘취재가 아닌 개인적인 만남’을 전제로 했던 터여서 성사여부는 반반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필리핀 다녀와서 보자”며 선선히 응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만의 만남이었다. 만나기로 한 ‘사랑의 영성원’(2005년 준공)은 꽃동네를 품고 있는 ‘소 속리산’(431m) 등성이에 있어 꽃동네에서는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해 있었다. 로비에 들어서자 오 신부는 생각도 못했던 중세시대 수도자들이 입었던 것 같은 밤색 망토에 모자가 달린 수사복장으로 나타났다.

 

▲ 꽃동네 오웅진 신부.

- 여독은 풀리셨는지요. 필리핀과는 인연이 깊으신지요?

“그 곳에서 아시아의 노벨상이라는 막사이사이상을 받았고, 그 곳에 필리핀 꽃동네를 만들었는데 이번엔 레이테(Leyte) 팔로시(Palo city)에 건립된 아동시설, 노인요양원, 보건진료소 등 3개 시설 운영책임을 맡았어요. 이 시설들은 지난해 필리핀을 강타한 하이옌 태풍 복구사업으로 교황청이 건립했고, 필리핀 정부의 요청으로 운영을 위탁받아 이를 수락하는 절차를 밟고 왔습니다. 지난 1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그곳을 방문하시어 축복식을 해주시려 했는데, 그날 현지에 태풍이 들이닥쳐 교황님과 인사만 하고 헤어졌습니다. 15일에 떠나 20일에 돌아 왔습니다”

 

- 오 신부께서 관장하는 복지시설이 해외에도 늘어나고 있지요?

“미국에 3곳의 꽃동네와 1개소의 피정의집이 있고, 필리핀에 아동시설과 노인시설 등 2개소, 방글라데시에 부랑인시설과 초등학교 등 3개소, 아프리카 우간다에 2개소, 인도에 요양원 등 현재 10개국에 해외꽃동네가 진출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른바 ‘글로벌 꽃동네’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 복장이 좀 낯설어 보이는데요.

“우리 꽃동네 수도복입니다. 색깔이나 모양이 옛날의 가톨릭 수도자들 복장과 비슷하지만 디자인 등이 좀 달라요. 이곳에서 일하는 사제나 수사들은 다 이 옷을 입지요. 평소에는 간편한 복장을 하고, 사제들은 미사를 집전할 때는 사제복을 입지요.”

 

▲ 동양일보 조철회 회장.

- 꽃동네 하면 오웅진 신부와 무의탁 장애인들의 수용시설로만 알려진 듯합니다. 정작 꽃동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요.

“꽃동네는 △복지 △행복 △사랑△교육 네 가지 부문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어요. 복지는 노숙인 요양원, 심신장애인요양원, 정신요양원, 노인전문요양원, 아동시설, 입양기관, 인곡자애병원, 지적장애인시설 등을 통해 이뤄지고 있지요.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장애인들과 아이들, 노숙인들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맞아들여 몸과 마음의 치유와 함께 요양과 재활을 돕고, 개별화된 서비스를 통해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게 되지요. 행복은 사랑의연수원을 통해 이뤄지고 있어요. 사랑의 결핍으로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분들에 대해 사랑의 결핍 원인을 치료하는 등 온 국민에게 사랑을 배워주고자 하는 정신과 실천이 사랑의연수원에서 이뤄집니다. 이곳에는 매년 10만여명의 연수생들이 와서 사랑의 정신을 배우고 갑니다. 사랑은 우리가 인터뷰하고 있는 바로 이곳, 사랑의영성원에서 실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의연수원이 일반인들의 교육장이라면, 사랑의영성원은 일반신자와 성직자, 수도자들을 위한 영적쇄신의 집으로 사랑의 영성을 키워주는 곳입니다. 교육은 꽃동네대학교와 꽃동네학교를 통해 이뤄집니다. 믿음과 소망, 사랑의 실천을 지향하여 인류복지 구현에 공헌하는 인재를 양성하고 있지요. 꽃동네학교는 지체정신 중증 중복장애아동을 위한 시설입니다. 현재 음성 꽃동네엔 2113명, 가평 꽃동네엔 1835명, 기타지역의 시설 수용인원을 합치면 4000명에 이르지요.”

 

- 그 가운데 특히 역점을 두고 실현해 나아가고 있는 사업이 있다면.

“그 가운데 꽃동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사랑’이지요. 사랑이 있어야 복지가 있고 행복이 있고 교육도 이뤄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겉돌게 됩니다. 꽃동네의 에너지는 사랑이고, 이 사랑의 연구소가 바로 꽃동네의 심장인 셈입니다. 세상의 모든 연구소는 ‘돈 버는 연구’만 하는데 꽃동네 사랑의 연구소는 모든 이들의 ‘행복을 연구’하는 곳 이지요”

 

- 사랑의영성원에 정진석 추기경과 고 김수환 추기경,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이 있던데요.

“이 꽃동네가 시작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이어서 그 고마움을 기리고 그분들의 훌륭하심을 잊지 않기 위해 마련했지요.”

 

▲ 10년 넘게 언론인터뷰를 거절해왔던 오웅진 신부가 동양일보 조철호 회장을 맞아 밝게 웃고 있다. 이날 대담은 2시간 넘게 진행됐다.

- 꽃동네가 한국 복지의 기원이라거나 설립자인 오 신부를 한국 복지의 창시자라 한다고 들었습니다. 역대 대통령들과도 친분이 있으셨지요?

“1970년에 한국에 복지법이 생겼어요. 그 이전엔 복지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죠. 그런데 시행은 없었어요. 1982년에 생활보호법이 생겼지요. 길가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챙겨야 한다고 제가 주창했지요. 1984년에 전두환 대통령과 만나 복지와 관련해 꽃동네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나를 껴안고 우시는 거예요. 그후 하나씩 법 제정에 도움을 주게 됐죠. 1988년 심신장애법이 생기면서 ‘장애인’이란 용어를 쓰게 됐고, 김영삼 대통령 때 정신보건법을 만드는데 제 나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시대마다 그 당시의 대통령들께서는 남들 모르는 ‘버려진 사람들’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하고 법제정에도 도움을 주셨지요.”

 

- 꽃동네 설립자로서 법적 소송 등으로 꽃동네 회장에서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신 적이 있었는데요, 오랜 기간 언론 인터뷰도 일체 거절하고 칩거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오웅진이라는 꽃동네를 이룬 사람, 한국 복지의 새 지평을 연 한 시대의 선각자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있었습니다. ‘수난’을 겪으시고 이루고자 하는 일에 발목을 잡혀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용서가 그 해법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시작과 끝의 역사는 사랑입니다. 정신적 세계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게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모두 고루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십니다. 순천자흥 역천자망(順天者興 逆天者亡)인 법입니다. 인간은 사랑할 때만 자유로워집니다. 사랑은 고통과 죽음까지 대신하는 가장 큰 정신입니다. 구약에선 ‘원수를 갚아라’고 하고 신약에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저들이 날 죽이는데 그 죄를 그들 아닌 나에게 주소서’ 하십니다. 시기와 질투가 발목을 잡는 법입니다. 그렇게 발목을 잡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십자가를 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보며 용서를 배우고 용서를 합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 그 일로 인해 자원봉사자들의 발길이 많이 끊기고 후원금도 줄어들었을 텐데요.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회복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역사로 하는 일이니 휘둘릴 일은 없습니다.

(이 질문이 오 신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린 듯 잠시 표정이 경직되는 듯했고,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 사제가 되기 이전의 ‘오웅진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웃음)

“운명은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태어난 해는 광복 1년 전인 1944년이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나라 아들은 징용가고 여자들은 공출로 끌려갔지요. 어머니가 16세 때 아버지와 결혼했는데, 공출을 피하기 위해서였답니다. 어머니는 민족의식이 있는 분이어서, 평소의 꿈이 귀한 자식 낳아 주권을 살리는 것,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제 태몽을 꿨는데, 영웅을 누르는 아이였대요. 하도 신기해 그래서 제 이름을 웅진(雄鎭)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로부터 받은 유산은 태몽과 이름이라 할 수 있겠지요. 집에서 현도초등학교까지 8㎞ 거리를 걸어 다녔어요. 그 고단한 거리에 아침을 안 주시는 거예요. 쌀이 떨어졌다는 거죠. 공부는 안되고 쌀밥만 보인다고 하자, ‘굶더라도 학교는 가라’였어요. 하루는 10리쯤 가다가 현기증이 나서 쓰러졌어요. 한참 지나 이러다 죽지 싶어 개울물을 퍼먹었는데, 둑방 위에서 부녀가 싸우는 게 보였어요. 내용인즉 새우 한 마리를 잡았는데 아버지는 딸에게, 딸은 아버지에게 서로 먹으라며 다투는 거였어요. 그 아버지는 피란길에 다리를 잃은 사람이었고요. 나는 배고파 어머니에게 투덜거리기만 했는데 서로 주려고만 하는 그 부녀를 보면서 결심했습니다. ‘그래, 저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살자’ 그 여덟 살 때의 기억이 오늘의 꽃동네를 만드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선명해요. 새우 한 마리를 서로에게 먹이려던 그 부녀간의 일이…”

 

- 현도면 상삼리 고향마을 노인들에게서 들어보니 어린시절 싸움꽤나 했다고 하던데요.

“그땐 다른 동네 아이들이 자기 동네 앞을 지나가면 얼마나 텃세가 심했던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때려요. 학교까지 오가려면 4∼5개 마을을 지나가야 하는데 그때마다 얻어터져야 되는 겁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니 슬며시 부아가 나는 거예요.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으니 한 판 붙어보자. 그래서 싸움 붙어보니 별거 아니에요. 호되게 두들겨 주었더니 그때부터 ‘싸움대장’이 된 것이죠.(웃음)”

 

- 싸움 대장이 사제가 되었군요. 꽃동네를 일구면서 보여준 강단이 그때 생긴 것은 아닌지요.(웃음)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초등학교 졸업도 못할 형편이 됐어요. 학교를 그만두고 나무장사를 했습니다. 몸이 부서져라 해 놓은 나무를 새벽닭 울면 일어나 장작 패고 부강 장으로 20리길을 걸어 팔러 갑니다. 새벽 4시쯤, 달빛으로 길을 찾는데, 밤마다 달이 있는 게 아니예요. 그믐밤에는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깜깜한 밤길, 그 20리길을 걸으면서 깨달은 게 있었죠. 아무리 그믐이라도 한 발 딛고 한참을 기다리면 또 한 발만큼은 앞이 보입니다. 한 발 딛고 또 기다리면 다음 발을 디뎌야할 곳이 보입니다. 삶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절망에 빠져있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한 뼘만큼의 길이 보이는 법입니다. 욕심내지 않고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삶의 지혜 아닐까 싶습니다. 그 지혜를 달빛 삼아 꽃동네 역사를 써왔습니다.”

 

- 꽃동네를 설립하고 많은 일들을 하셨는데, 70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면 누구신지요?

“예전에 한 방송에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쪽 제작진이 저에게 출연요청을 하면서 찾는 대상이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합디다. ‘신부에게 무슨 여자가 있어요? 난 없어요’ 했더니 그러면 다른 사람으로 하자고 해요. 그때 잊을 수 없고 잊어서는 안 될 김동숙 선생님을 이야기 했습니다. 김 선생님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제 담임선생님이에요. 1959년, 초등학교도 졸업 못하고 나무 팔아 생계를 겨우 잇던 그 가난했던 시절에 선생님이 어느 날 편지 한 통과 연필 한 다스를 전해 주셨어요. ‘친애하는 오웅진 군, 젊어 고생은 금 주고도 못 삽니다. 배워야 삽니다’ 그리고 ‘중앙강의록’이라는 책을 보내셨더군요. 그것으로 공부했어요. 학업의 꿈을 버리지 않게 했던 분이 그 선생님이셨지요. 방송사 정보력이 얼마나 귀신같은지, 대구에 살고 계시던 선생님을 찾아내 모시고 와서 감격의 해후를 할 수 있었지요.”

 

- 많은 일을 하시다보면 많은 은인들을 만나셨을 것입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들을 더 들려주시지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을 찾아다녔습니다. 그 어른들은 정치, 사회, 문화, 종교 각계에 다 계시지요. 네 분 정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을 찾아가 하룻밤 자고 나왔는데, 그 분은 늘 무릎을 꿇고 계시고 하루 두 끼만 드시더군요. 그분이 감시 당하던 시절이었는데, 그것은 몰랐죠. 진짜 종교인이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동숙 선생님으로 부터 알게된 ‘중앙강의록’으로 독하게 공부하던 시절 펜팔친구를 사귀게 됐어요. 그 책 마지막 장에 펜팔 난이 있었거든요. 그때 알게 된 친구가 김주열군이었어요. 그 친구는 정치가가 되어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고 늘 자기의 꿈을 이야기 했고, 저는 정치가가 되어 거지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제 꿈을 이야기하곤 했었죠. 그런데 1960년 3월 15일 그 친구는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나섰다가 27일 만에 마산중앙부두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죠. 언론들이 대서특필 했던 바로 그 김주열입니다. 친구를 잃은 상실감이 너무나 컸었습니다. 그때부터 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정치가의 꿈은 접게 됐죠. 대전 대신고 2학년 때 행사에 참여했다가 오기선 신부님이 문화훈장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고아원을 세워 3000여명의 고아들을 돌보고 지게꾼과 구두닦이 소년들을 도우셨던 분이지요. 그 분의 정신을 따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사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해주신 정신적 지주셨지요. 마지막으로 김수환 추기경님입니다. 군대 시절 도움을 받았고 꽃동네 설립을 승낙해 주셨고,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에이즈 고아들을 위한 장학재단 설립에 당신의 이름까지 쓰도록 허락해주신 분입니다. 사제의 길을 걸으며 늘 그 분의 모습을 닮으려 노력했습니다.”

 

- 꽃동네 설립의 모티브가 최귀동 할아버지와의 만남이었지요?

“1976년 무극본당 신부로 부임했는데, 어느날 거지 한 분이 찌그러진 깡통을 들고 성당 앞을 지나가더군요. 그 깡통엔 유리조각, 날카로운 쇠붙이 등속이 들어 있었습니다. 호기심에 그 거지를 따라가 보았는데 무극천 다리 밑 움막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거기엔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동냥조차 할 수 없는 거지 가족이 살고 있었어요. 움막 안에 들어간 거지는 자기가 동냥해 온 밥을 그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깡통 안에 든 유리조각과 쇠붙이는 아이들이 혹여 다칠까 길에 널려 있는 것들을 주워 모은 것이었고요. 거지가 거지를 돕는 일, 그 일을 40년 동안 해온 그 사람이 최귀동 할아버지였습니다. 그 분을 보면서 저는 느꼈습니다.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 그 깨달음은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꽃동네 모토가 되었지요. 최귀동 할아버지는 1986년 ‘한국 가톨릭 대상’으로 받은 상금 120만원을 꽃동네 요양원을 만드는데 쓰라고 모두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 1월 3일 돌아가셨습니다.”

 

- 모든 이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다면.

“젊은이, 똑똑한 이들이 정의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정의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정의는 진리가 아닙니다. 사랑을 거창하고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을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자선과 봉사, 희생, 보속 이 네 가지를 실천하려 늘 노력하십시오. 제 꿈은 늘 한결 같습니다. 꽃동네가 꿈꾸는 세상을 더불어 꾸는 것이죠. 꽃동네가 꿈꾸는 세상은 한 사람도 버려지는 사람이 없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같이 우러름을 받는 세상,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세상입니다.”

 

▲ 2013년 8월3일 오웅진 신부가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란 꽃동네 모토가 새겨진 도자기를 선물하고 찍은 기념사진. 이 자리에서 오 신부는 교황의 한국방문을 요청하였고, 지난해 교황은 꽃동네를 방문했다.

대담을 나눴던 ‘사랑의 영성원’에서 나오면서 혼자 뇌까렸다. ‘꽃동네의 꽃은 사철 피어있어야 한다’라고. 그리고 현관 서가에 꽂혀 있는 꽃동네회 회보(2014년 12월호)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첫 페이지를 열었더니 다음과 같은 글이 첫머리에 굵은 글씨로 눈길을 잡았다.

 

꽃동네가 꿈꾸는 세상은

한 사람도 버려지는 사람이 없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같이 우러름을 받는 세상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세상입니다.

 

그렇다. 꽃동네의 꽃은 사철 피어 있어야하느니. 그리하여 천지에 그 향기 가득차야 하느니…

 

▶대담·글/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기록/김명기 ▶사진/김수연

 

오 웅 진 吳雄鎭 신부는…

 △수도명(修道名, 영세명):사도 요한 △꽃동네 회장 △1944년 8월20일, 충북 청원군(현 청주시) 현도면 상삼리 331에서 출생 △광주가톨릭신학대학교 졸업(1976) △1976년에 사제서품(청주교구)을 받고 음성 무극천주교회 주임신부 부임 후 꽃동네 설립 △수도회(예수의 꽃동네 형제회·자매회) 설립(1979) △경기도 가평꽃동네 설립(1992) △꽃동네대학교 초대 총장(1999) △학교법인 꽃동네현도학원 이사장(2002) △재단법인 예수의꽃동네유지재단 이사장(2006) △한국에이즈예방재단 이사장(2010) △인촌상(동아일보,1987) 국민훈장동백장(대한민국,1991) 막사이사이상(필리핀막사이사이재단,1996) 올해의인물(동양일보,1996) 유일한상(유한재단,2003) 전국사회복지전진대회본상(한국사회복지협의회,2009) △현주소:충북 음성군 맹동면 꽃동네길47-93 ☏(043) 87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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