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사람들은 저마다 내면에 고통 받는 아이를 품고 있다. 상처다. 꼭꼭 싸맨 상처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눈을 감고 조용히 유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유년의 어느 날에 그 끈이 닿아 있다. 우리는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때를 아프게 보냈다고 여기니까. 그것이 트라우마로 나타나 괴롭히기도 한다. 쓰라린 감정과 기억, 불현듯 이 고통이 고개를 들면 우린 무시하거나 꾹꾹 눌러 내 안의 깊은 무의식 속으로 처박아버린다. 왜냐하면 앞으로 겪을 고통이 보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잊고 싶으니까. 우리는 몇 십 년 동안 그 어린 아이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아니 두려워서 들여다보지 못했다. (틱낫한 ‘화해’)
                                   
외출하고 돌아오니 누님한테서 전화를 받았다고 남편이 알린다. 남편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시누님이 어린 시절 어머니한테 매 맞은 이야기를 들어보라며 꺼내려는데 화가 치밀어 쏘아붙였다고 한다.
그래 누님은 어머니한테 무엇을 잘 해드렸다고 평생 매 맞은 것만 분해하니 매 맞은 것도 매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지 잘 했는데도 맞았단 말이에요? 여러 자식 건사하느라 고생만 하고 일찍이 가신 어머님이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나는 지금도 어머니 생각하면 눈물만 나오는데, 누님은 80이 되도록 분한 마음만 간직하고 있으니 큰 딸로서 할 도리예요? 전화 할 때 마다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그러니 어느 누군들 좋아 하겠어요. 하소연을 늘어놓으려다 동생의 갑작스런 반응에 놀라, “그래, 너 잘났어!”하고는 시누님이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은 나는 남편한테 “누님 말씀 잘 들어주지 뭘 그렇게까지 했느냐”며 나무랐다. 남편은 그렇게 해놔야 다시는 그런 전화 안 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하였다. 평생 풀지 못한 한 때문에 마음에 상처가 병이 되어버린 시누님. 동생한테 마음속에 끓고 있는 한을 풀어 볼까 싶어 전화를 했건만, 어머니한테 매 맞은 얘기가 서두에 나오자 동생이 발끈 화부터 내니까 말도 못하고 전화를 끊고 말았던 모양이다. 믿었던 동생이었기에 애끓는 심정을 다 털어놓고 싶었을 텐데.
그 시절엔 3대가 함께 살고 있는데다 시집간 고모네 식구까지 한데 모아 살게 됐다고 한다. 식구가 많다보니 불편한 것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시어머니는 불평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만 앓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환경이다 보니 속상한 일이 있기만 하면 애꿎은 당신 큰딸한테 화풀이로 매를 들었다. 자그마한 일이라도 잘 못하거나 말대꾸를 할라치면 여지없이 매를 맞았다. 시도 때도 없이 매를 맞으면서 어린 딸의 가슴속에 어머니는 무서운 존재로 각인되었다.
어리고 철없을 때는 철이 없어 맞았다지만 성인이 되어 혼인을 정해 놓고도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시집갈 준비하느라 하얀 천에 십자수를 놓고 있을 때, 어머니는 와락 달려들어 내 동댕이질 쳤다. 비가 주룩주룩 퍼붓는 안마당 한가운데서 눈이 부시게 하얀 천을 부여안고 한없이 울었다. 이날 이후로 모녀 사이의 감정은 악화일로로 치달아 어머니가 생사를 넘나들면서 화해의 손을 내밀었을 때에도 딸은 받아주지 않았다. 
시누님의 어린 시절 매 맞은 이야기와 혹독한 시집살이는 내가 시집에 갔을 때부터 지금까지 몇십 년 동안 듣는 단골 레퍼토리이다. 만나면 이야기하고 틈만 나면 전화로도 들려주었다. 맺힌 마음이 얼마나 컸으면 그러실까? 이해는 가지만 같은 소리 되풀이해서 듣는 사람은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한참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치 너댓살 난 아이가 칭얼대며 우는 소리처럼 들린다. (계속) <권희돈 청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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