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감옥의 문… 아, 여기가 선생의 마지막이구나!

▲ 조 블라디미르가 KGB 하바로프스크 본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블라디미르의 뒤쪽 건물이 조명희 선생이 끌려갔던 옛 KGB 건물이고,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새롭게 들어선 KGB 건물이 있다. 회색빛의 이 건물은 정문을 지키는 요원들의 제지로 사진촬영을 하지 못했다.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답사단이 아무르강을 찾은 날은 우중충한 하늘에 군데군데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금세 비라도 흩뿌릴 듯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우울한 상념을 가슴에 묻고 찾았을 그때 그 포석의 강에 우울한 마음을 담고 우리가 서 있다.

조철호 시인의 슬픈 노래 ‘아무르 강에서’처럼, ‘구만리 장천 떠돌던 혼백들과 눈물 마른 새들만 / 석양을 비껴가고 / 절룩이며 절룩이며 왼 종일 족쇄를 끌어도 길은 끝나지 않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인간을 버리던 곳 / 언제나 축축한 이 도시 한 켠에 / 조선 사내들의 한숨 따라’ 우리는 지금 비극의 역사를 가슴 아프게 주시하고 있다.

슬픈 사람, 안타까운 사람, 너무도 아까운 사람.

‘유언도 없이 운명한 쓸쓸한 주검도 / 5월이면 풀꽃 하나 피우려는데 / 시베리아 설한풍만 강가를 서성일 뿐 /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을 강물은 알아 / 아무르 강 / 오늘도 일삼아 비를 맞고 있’는 아무르강가를 서성이며 우리는 80년 세월 저편에서 그 큰 뜻 온전히 펴지 못한 채 마흔 넷 한창의 나이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포석을 그리워하고 있다.

 

우울한 분위기를 바꾸어 주는 데에는 달달한 맛이 최고라지만, 답사단은 깔끔하고 담백한 음식을 먹고 싶었다. 우리네 ‘달달함’과 러시아의 달달함이 미묘한 차이가 있어, 그네들의 달달함이 우리들 식성엔 그리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평양냉면을 먹자는데 쉽게 뜻을 모았다.

‘평양 능라도 냉면집’이던가, 북쪽에서 운영하는 음식점을 찾았다. 인테리어가 때를 타지 않은 것을 보니 문을 연 지 오래되지 않은 듯했다.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었다.

“우리는 남쪽에서 조명희 선생 삶을 찾아 답사 온 사람들이에요. 혹시 북쪽에서도 포석 조명희 선생에 대해 잘 아시나요?”

음식을 서빙하는 종사원에게 물었다.

“잘 알고 있습네다. 저희가 학교 다닐 때는 교과서에도 실렸던 분입네다. 조명희 선생님의 영화도 제작돼 북조선 인민들이 잘 보고 있습네다.”

“북쪽 사람들의 조명희 선생님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요?”

“일본 압제에 저항하여 우리 민족의 기개를 떨치신 문학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네다.”

그들의 답변이 의외였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수긍이 갈만 하다. 포석은 1925년 8월에 결성돼 1935년 5월 20일에 해체된 카프(KAPF-Korea Artista Proleta Federration·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거두이자 핵심 멤베였고, 소련으로 망명해 계급의식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펼쳤던 것을 되새겨 볼 때 그런 그의 삶이 그들에겐 거부감이 들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조명희 선생이 수감돼 있던 지하감옥의 쇠창살문. 빛 한 줌 들어가기도 어려운 좁은 창살문이다.

 

점심을 먹고나니 힘이 생겼다. 우울했던 기분도 조금 가시는 듯했다.

이젠 포석의 비극적 마지막 행선지 KGB 하바로프스크 본부로 향한다.

포석 유족들이 살펴 본 기록에 따르면 포석은 KGB 하바로프스크 본부 지하에 있는 감옥에서 총살형을 당했다고 한다. 1992년 조선아씨와 선인씨, 블라디미르,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김 안드레이 교수 등은 이곳을 방문해 수인(囚人) 번호가 있는 죄수복을 입고 머리를 빡빡 깎은 포석 선생의 마지막 사진을 천신만고 끝에 입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바로프스크 작가의 집에서 거주할 당시 조명희의 사진은 온화한 얼굴선에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깔끔한 정장 차림의 댄디스트 모습이었다. 그런데 KGB에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갇힌 지 불과 몇 개월도 안돼 찍은 수인(囚人) 조명희의 모습은 깡마르고 날카로운 얼굴선에 눈빛 형형한 모습이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루이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는 처형 하루 전 아름다웠던 금발이 온통 백발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컸으면 하룻밤 사이 고왔던 머리카락이 백발로 변했을까.

포석 또한 그러했으리라. 오늘이 어제의 두려움과 같고, 오늘 또한 기약할 수 없는 내일에 대한 절망감에 빠져 자신을 옥죄어 오는 죽음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무력하게 갖은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삶과 죽음은 백지 한 장보다 더 가벼운 것이었을 터였다.

그 절망적이고 비극적이고 억울하기 그지없는, 그러나 헤어날 길 없는 엄혹한 현실이 선비같이 온화하고 음전한 눈빛이었던 그의 얼굴을 깡마르고 날카로운 얼굴선에 형형한 눈빛의 ‘수인 조명희’로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 조철호 단장이 옛 지하감옥으로 들어가는 문을 가리키고 있다. 목재에 함석을 덧댄 이 문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적벽돌로 건축된 고풍스럽고 육중한 건물이 위압적인 자세로 답사단을 맞는다.

지상4층 지하 1층, 특히 지하에 설치된 쇠창살문에 눈길이 간다. 한낱 옛 건물이 우리 답사단에게 위압감을 주는 건 그곳에서 자행됐던 KGB의 잔혹한 고문에 무기력하게 노출됐던 포석의 절망스런 얼굴과 아무런 죄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포석의 억울함이 한낱 옛 건물에 지나지 않은 그 곳에 배어있기 때문은 아닐까.

1미터도 채 안될 작은 쇠창살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 한 줌을 바라보며 포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힘없는 민족이었기에 겪었던 그 아픈 역사를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1937년 9월 18일 KGB 요원들에 의해 체포되어 1938년 5월 11일 총살형을 당했으니 포석은 8개월 동안 햇살 한 줌 들어오는 것을 살아있는 동안의 가장 큰 낙으로 여겨야 했을 그 지하 감옥에서 속절없이 자신의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1층에 나 있는 육중한 철제문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뜻하지 않게 문이 열렸다. 겁도 없이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답사단이 들어간 옛 KGB 하바로프스크 본부 건물 지상층은 관공서 사무실로 쓰여지고 있는 듯했다.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다.

‘아, 여기구나!’

78년 전 포석은 이 곳으로 끌려와 8개월 동안 답사단이 내려간 그 계단을 통해 지하감옥에 갇혀 8개월 동안 자신의 죽음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지하로 내려가자 지하 감옥 입구가 나타난다. 그 입구 벽면 전체를 목재로 막아놓고 그 위에 함석을 덧씌워 놓았다. 그리고 작은 문을 만들어 놓았는데 당겨보니 열리지 않는다. 잠가놓은 것이다.

너무나 아쉬웠다. 여기까지 왔는데, 포석 조명희 선생 삶의 발자취를 찾아 선생의 죽음이 강요된 가장 역사적인 현장인 이곳까지 왔는데. 들어가 본다한들 옛 지하 감옥 그대로일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현장을 직접 지켜보고 직접 서 보고 싶었던 것은 답사단원 모두의 간절한 염원이었다.

‘아, 여기가 끝이구나!’

조명희 선생 삶의 마지막 현장에 서서 잠시 묵념을 한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