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주십시오. 해내겠습니다. 지역발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윤진식 (尹鎭植) 의원은…

△1946년 3월 4일 충북 충주시 성서동 202 출생 △충주 삼원초-충주중-청주고-고려대 상대 경영학과졸(1971)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 대학원 경제학과졸(1987) △건국대 경제학박사(2006) △행정고시합격 12회(1972) △재무부 행정사무관(1973) △주 뉴욕총영사관 재무관(1990) △대통령 경제비서관(1993) △재무부 국제금융국장(1994) △세무대학장(1997)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대표부 공사(1998) △관세청장(2001) △재정경제부 차관(2002) △산업자원부장관(2003) △서울산업대총장(2004~2007) △한나라당 17대 대통령선거 경제살리기 특별위원회 부위원장(2007) △18대 한나라당 충주 국회의원후보(2008)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2008)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겸 정책실장(2009) △대통령직속 G20정상회의준비위원회 부위원장(2010) △대통령 정책실장(2010) △(현) 단국대 이사 △(현)거버넌스21클럽 공동대표 △(현)18대 국회의원 △충주시 문화동 569-1(☏043-843-0728)

 

지금충주시민은 ‘선거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다.

충주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 ‘유명인사’의 반가운 손짓과 머리숙여 인사하는 몸짓에 지나는 시민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한창 고조되고 있는 선거운동을 보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충주시민들의 표정에서 벅찬 기대와 희망을 엿 볼수 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한바탕 축제마당을 벌이는 주인공은 7.28 충주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윤진식 국회의원이다.

윤 의원은 선거가 끝난 다음날인 29일 오전 7시부터 9시까지, 오후 6시부터 7시 30분까지 충주시내 주요도로에서 시민들에게 ‘당선인사’를 하고 있다.

지금도 축제는 계속되고 있다. 윤 의원은 농촌지역 곳곳을 돌며 충주발전을 염원하는 시민들에게 “지역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여느 국회의원 당선자와 다른 모습이다. 이번 선거에서 승리를 장식한 한나라당 당선자들이 지난 29일 오전 여의도 당사를 찾아 ‘당선 신고식’을 가졌지만 그는 당사가 아닌 시민품으로 먼저 달려갔다. 그의 이런 자세는 선거 기간에 나뉘었던 민심을 하나로 모으고 모든 힘을 집중해 충주의 발전과 화합, 소통하는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출이자 약속인 것이다.

충주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이변은 없었다.

윤진식 후보는 선거인수 16만1676명중 7만433명이 투표한 이번 선거에서 64%인 4만 3367표를 획득해 2만4765표를 얻는데 그친 민주당 정기영 후보를 여유있게 따돌렸다. 전국 8개 선거구 중 최다 득표율이다.

2년전 18대 총선에서 민주당 이시종(현 충북지사) 후보에게 1582표(1.95%)차로 석패한 그는 충주시가 보궐선거지역으로 확정되자 청와대 정책실장직을 사퇴하고 낙후된 고향 충주를 발전시키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그때만 해도 그의 우세를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드믈었다.

그런데 어떤 선거든 변수가 항상 도사리고 있는 법. 인물론에서 자천타천 거론되던 다른 후보들을 압도했지만 6.2지방선거의 여파는 민심의 향배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고, 선거 3일을 앞두고 성사된 야권후보 단일화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누구도 그의 당선 가능성을 자신있게 말할 수 없었다.

불안하고 초조하기도 했지만 그는 진정성을 갖고 충주시민들에게 다가갔다. “충주를 발전시킬수 있는 지역일꾼을 선택해 달라”며 충주발전을 10년 이상 앞당기겠다는 여러 공약을 제시하면서 유권자의 마음을 얻었다. 지방선거 때와 달리 충주민심은 결국 지역 발전을 선택했다.

대한민국 주요 경제정책의 중심축에는 ‘윤진식’이란 이름 석자가 새겨져 있다.

40~50대 이후 중년세대에게 낯익은 ‘재형저축’도 그의 작품이다. 1976년 그가 재무부 행정사무관으로 있으면서 서민과 중산층의 재산 형성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 정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냈다.

지난 2007년 대선 기간 한나라당 중앙선대위 경제살리기특위를 이끌고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국가경쟁력강화특위 부위원장을 맡은 그는 2009년 1월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전격 발탁돼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에 몰두하면서 ‘이명박 대통령(MB)의 남자’로 발돋움했다. 어떻게 해서 이 대통령에게 신임을 받게 됐느나고 묻자 “업무 능력은 기본이고 모든 면에서 신뢰할수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청와대 경제수석 겸 정책실장 발탁도 이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규모의 국제행사가 될 5차 서울 G20(주요 20개국)정상회의 유치와 2009년 12월 세계를 놀라게 했던 아랍에미리트(UAE)가 발주한 400억달러(한화 47조원) 규모의 원자력발전소 건설공사를 한국전력공사 컨소시엄이 수주하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97년 외환위기때 경제정책을 총괄 조정하는 정책실장으로 금융위기를 청와대에서 극복한 최고의 경제전문가라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지난 97년 청와대 조세금융비서관으로 근무할 때 외환위기 가능성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보한 일은 잘 알려진 일화다.

그에게는 일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 많다.

학자 스타일의 부드러운 외모와 말투와는 달리 한번 맡은 일은 끝까지 놓지 않는다 해서 ‘진돗개’. 또 재무부 금융정책과장 시절 사무실에 야전 침대를 가져다 놓고 집에도 가지 않고 일했다고 해서 ‘일벌레’로 통한다. 토요일과 일요일도 쉬지않고 일하며, 저녁 약속이 있는 날도 식사를 하곤 다시 청와대로 들어간다고 해서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 만큼 일에 한에서는 집념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선거가 끝나고 이틀이 지난 7월 30일 윤 의원을 동양일보 충주본부(금릉동 682) 사무실에서 만났다. 땀으로 흠뻑 젖은 드레스 셔츠 모습으로 나타난 그는 “충주시민들에게 당선인사를 하다가 늦었다”고 미안해 하면서 취재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인터뷰 도중에 보좌진이 가져온 타이를 맨후 사진촬영을 하면서 “잘 나오게 해주세요”라는 부탁의 인사도 잊지 않았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잠이 부족해 고생스럽고 힘들었다는 윤 의원은 “어제 밤에는 푹 잘잤다”며 머리가 맑은 상태에서 인터뷰를 하게돼 다행스럽다며 대담을 시작했다.

 

-선거운동은 얼마나 하셨는지요?

“한 달 반, 두 달 가까이 한 셈이네요.”

-선거운동 하면서 몸 아프신데는… 몸무게는 줄지 않아나요.

“몸무게는 3kg 줄었네요. 거리인사 하느라 손 많이 흔들고 악수를 많이 해서 그런지 오른손에 엘보우(팔꿈치 질환)가 오더군요.”

-의례적인 질문이지만 소감 한 말씀해주시죠.

“말할 수 없이 기쁘지요. 충주시민들에게 감사드리고 아침 저녁으로 거리에서 손 흔들며 인사하고 있어요. 시민들이 무척 좋아하고, 반응이 좋아요. 운전하고 가면서 손 흔들어 주고 뜨겁게 호응해 주니 정치하는 맛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충주 전지역을 찾아 인사할 예정이라고 했다)

―선거운동 기간에 어려웠던 점도 많으셨죠.

“운동기간이 충분하지 못했던 같아요. 선거운동을 해보니까 한 6개월에서 1년은 준비해야 될 것 같은데, 지난번(2008년 18대 총선)에도 1개월 남짓 하고 이번에도 다른 직장이 있던 터라 2개월도 채 못했으니 너무 짧아요. 저를 안만나본 사람들은 제가 관료생활 오래해서 거리가 먼 사람으로 느끼는 경우가 있었어요. 하지만 실제 만나면 좋아하는데 많은 분을 만나지 못해 아쉬웠지요.”

-마을회관에서 잠을 자고 ‘2030 충주민생투어’란 이름으로 충주시내 25개 읍·면·동을 순회하며 ‘지역발전 일꾼론’을 내세우며 바닥 민심에 호소했지요.

“면 지역에서 밤늦게 농민들과 대화하고 애로사항 듣고, 그런 것을 공약으로 어떻게 담을지 생각하고, 하룻밤을 자고 나오고 하니까 농민들이 그렇게 좋아하대요. 지역별 공약은 직접 다녀보고 결정했지요.”

-출마 결심은 언제 했나요?

“5월 25일 청와대 회견에서 사퇴를 알렸지요. 그 전에 내심 결정하고 있었지만 더 늦추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6월 2일 선거 전에 사퇴를 하게 됐습니다.”

-출마하게된 동기는.

“저는 중앙에서 여러 분야에서 많은 일을 했어요. 앞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이 짧은데 그 기간을 무엇을 하는 게 가장 보람 있고, 또 남을 위해서도 좋은 일인지를 생각했지요. 그 동안은 고향을 위해 일할 여건이나 능력이 안됐는데 지금은 여건이 됐다고 봅니다. 나이 들어 고향을 위해 일 하는 것도 좋잖아요. 선조들은 낙향해서, 그 동안 배운 것을 다 쏟아 붓고 가셨잖아요.”

-한 나라의 중요한 일을 하시다가 그만두면서 대통령께는 어떤 말씀을 드렸을 텐데….

“물론 허락은 받았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제가 하겠다고 하니까, 반대는 못하시고 어려울 텐데 괜찮겠냐고 하시더군요. 내려가 해보겠다고 했지요.”

-당선되고 대통령과 전화통화는.

“물론 했지요. 대통령께서 축하를 해 주셨어요.”

-워낙 열심히 하시고 지명도도 높고 주민들 기대감도 커서 승리 하셨겠지만, 승인을 찾는다면.

“충주는 발전이 더디고, 정체되고 어떻게 보면 낙후된 지역이예요. 그러니 시민들이 충주 지역발전을 위해서 윤진식 후보가 해줄 것 같다는 기대, 그러니까 제 역할을 기대 하시는 것 같아요. 만나는 분마다 꼭 공약대로 일 좀 해달라고 말씀하시고 계세요.”

-지방선거 끝나고 56일 만에 치러진 선거였는데 지방선거의 표심이나 분위기와는 반대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사실 지방선거 끝나고 나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이런 분위기에서 승리를 예측할 수 없었고요, 실제 당 지지도도 안좋은 상황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저에 대한 잠재적인 기대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2년 전 총선에서 제가 3만6000표 이상을 얻었거든요. 당시 저를 지지해준 분들은 저에 대한 아쉬움이 컸을 겁니다. 그분들이야말로 절대적인 지지 기반이 돼 주셨지요.”

-야권후보단일화 때는 어땠습니까?.

“위축은 많이 됐지만 실제 다녀보니 분위기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요. 단일화와 관계없이 좋은 분위기가 지속되면서 기대를 했지요.”

-가장 힘들었던 점은.

“수면시간이 부족해서 유세하면서도 졸려서 혼났어요.”

―하루 몇 시간 주무셨나요.

“4~5시간을 잤는데 부족해요. 보통 7~8시간은 자야 되는데 일정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어디서 태어셨나요.

“충주시 성서동 202번지에요. 충주극장이 있었는데, 충주시 한복판이었지요.”

-부모님과 성장과정 좀 들려 주시지요,

“아버님은 유기그릇, 놋그릇 만드는 공장을 하셨어요. 그 당시는 꽤 큰 사업을 하시고, 충청, 경상, 경기도 쪽에 많이 공급했었지요. 공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한 100명 가까이 되는 큰일을 했다고 해요.”

-부유하게 자라셨겠네요.

“그렇지요.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민물고기를 날것으로 많이 드셔서 간디스토마로 돌아가셨는데 저도 어릴 때 많이 먹어서 간염으로 학교 때도 고생 많이 했어요. 제가 6~7살 때 돌아가셨나봐요. 그러다보니 가세가 기울어 고등학교 때는 굶는 게 다반사였어요. 청주고 다닐 때 3학년 1년을 휴학 했어요. 고등학교를 4년 다녔지요.”

-가정 형편이 어려운데 청주로 유학하셨네요.

“그 당시는 대단한 유학이었지요. 생활이 굉장히 어려웠는데 돌아가신 어머니가 청주 유학을 결정 해주셨어요. 땔 거리도 없는 집 애를 청주에 보낼수 있느냐고 주위로부터 손가락질 받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아랑곳 하지 않고 쌀이나 김치를 가져다주시고, 그러면 제가 밥 해먹고, 그때 자취하면서 굶기도 많이 해서 건강을 해쳤지요. 옛날에는 다들 어려웠지만 저는 특히 그랬어요.”(어머니를 회상하면서 순간 눈물을 보였다)

-부모님께 당선인사를 드렸나요.

“투표 전에 한번 갔었는데 끝나고는 아직 못 갔어요. 부모님 묘소는 외가가 있는 진천에 있는데 어머님은 친정생활을 했지요.”

-형제분은.

“형님은 돌아가시고, 충주에 형수님하고 조카가 있어요. 누님 두분과 여동생, 오남매 입니다.”

-공직에서 많은 일을 하시면서 지켜온 좌우명이 있다면.

“글쎄요. 선공후사先公後私지요. 그리고 제가 오랫동안 일 해보니 정직입니다. 정책도 정직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통하고 정책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 같구요. 잔재주를 부려봐야 나중에 보면 다 드러나게 돼 있어요. 묵묵하게 큰 길을 가면 되지요.”

-공직에 계시면서 잊을 수 없다거나, 국가에 공헌 한 주요정책을 꼽는다면.

“재무부 사무관 때인 76~77년쯤인데, 중산층을 위한 재산형성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어요. 재형저축인데 서민과 중산층 재산 형성에 도움 된 게 보람이지요. 또 IMF 위기 때 김영삼 대통령께 위기상황을 그대로 말한 사람이 없었어요. 제가 그때 직보를 했다고 해서 공직에서 ‘왕따’ 당하기도 했어요. 자기만 살려고 하느냐는 등 주위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았지요. 최근에는 2008년 세계 경제위기속에서 2009년 1월에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임명돼 세계경제 어려운 파고를 우리나라가 슬기롭게 잘 넘겼다는 평을 받았잖아요. G20회의 유치와 UAE원자력 발전소 수주같은 게 제가 직접 다루는 일이니 보람 있지요. 청와대 있으면서 보금자리주택이라든지, 취업후 상환 학자금제도도 제가 주도해 만들어졌구요. 재정이 해마다 1조원 이상 들어가는 큰 사업 이예요. 또 미소금융도 마찬가지구요. 보람을 많이 느낍니다.”

-선거 출마할때나 선거 후에도 대통령을 만나고 통화도 하셨는데, 이 대통령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졌나요.

“이 대통령은 대학 선배니까, 그 전에 여러 채널에서 뵙고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 분이 서울시장 때는 제가 서울산업대 총장을 할 때니까, 대학에서 시장께 도움도 요청하면서 자주 뵈었지요.”

-대통령 선거기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관여하고 선거운동을 했지만 특별히 그 많은 사람중에 대통령으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게 된데는….

“인간적인 신뢰관계라고 할까요? 평생 경제정책을 해 왔으니 일 능력은 검증이 된 것이고, 신뢰가 있어야 중요한 일도 맡기지요. 저 사람은 믿을 수 있겠다는 신뢰감 이겠지요.”

-소망교회하고는 관계가 없습니까?

“소망교회가 아니고 사랑의 교회를 나갑니다.”

-‘월화수목금금금’ 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지요.

“사실 청와대 들어가서도 거의 하루도 못 쉬고 일했어요. 세계적 경제위기에서 한국 경제를 구해야 하니까 쉴 수 없었지요. 앞으로 충주와 충북 발전을 위해서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 하려고 합니다.”(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충주시민들이 윤 의원께 거는 기대는 역대 어느 국회의원들 보다도 크다고 생각됩니다. 시민들께 한 말씀 해 주시지요.

“저 사람은 국회의원 되면 서울 갈 사람이라고, 떨어져도 갈 사람이라고 걱정 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일이 있을 때는 국회에서 활동을 해야 하지만 늘 충주에서 시민들과 같이 생활하고 많은 일을 보살필 생각이에요. 저 사람 공약이 과대하지 않느냐, 기간이 1년 8개월뿐인데 다 할 수 있겠느냐는 소리도 듣고 있습니다. 저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걱정을 많이 하시는데 열심히 해서 보답하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획하시는 일 꼭 이루시길 바랍니다.

▶대담·글 / 김홍균 편집국장

▶기록 / 오상우 ▶사진/임동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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