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은 없다… 오송역을 창조한 충북도민이 자랑스러워”
1991년 고속전철 본선역 충북유치위원회 발족 본격 활동
당시 자발모금 5800만원…도민 열성참여에 중앙정부 감동

 

 

 

해고(海高) 이상록(李相祿) 호남고속전철 기점역 오송유치위원장은 …

△1929년 3월 1일 충북 청원군 강내면 저산리 출생 △청원 부용초-청주고-청주대 상학과졸(1956)―청주대 대학원 상학석사(1961)~청주대 명예경영학박사(1993) △영동여고-청주농고-청주상고교사(1956~1966) △대성중-대성여상-청주상고-청석고교장(1970~1980) △대성학원(현 청석학원)이사(1979) △충북사립중등교장회 회장(1981) △충북학사원장(1996) △서원학원 이사장직무대행(2001) △충북산악연맹회장(1973) △청주민간단체협의회장(1976) △국제로타리 3740지구 동청주클럽회장(1979) △청주시 새마을금고연합회장(1982) △동원탄좌개발 직업훈련소장 및 사북광업소장(1985) △충북체육회 사무처장(1991) △간송문화재단 이사장(2001) △대한청소년충효단연맹 총재(2002) △경부고속철도 본선역 충북권유치추진위원장(1991~2003) △문장대 용화온천개발저지 충북도민대책위원장(1994~2004) △호남고속철도분기역 오송유치위원장(1995~2004) △민족정신회복 국민운동본부장(2004)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회장(2004) △신행정수도건설 충북연대위원장(2004) △(현)충북교육청 공직자윤리위원장 △(현)충청대학 이사 △(현)한건복지재단이사장 △(현)충북도체육회이사 △(현)충북검도회고문 △무궁화동장(1978) △체육훈장 백마장(1989) △충북도민대상 체육부문(1993) △자랑스러운 충북인상 지역사회봉사·환경(2002) △저서 ‘청풍명월 그 속에서’등 해고문집 8권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043-294-4077)

 

 

 

쓸어 넘기듯 스산한 가을바람을 가르며 웅장하면서도 날렵한 고속열차가 쏜살 같이 달려와 오송역 승강장에 안긴다.

11월 1일 오전 10시. 경부고속철도 오송역 개통을 알리는 첫 열차의 주인공인 동대구발 서울행 KTX 332호. 20세기와 21세기를 이어 156만 충북도민이 이뤄낸 대한민국 교통의 지도를 바꾼 대역사(大役事)의 모습을 지켜보던 백발의 노신사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했다.

대한민국 고속철도의 중심인 국내 유일의 분기역인 오송역 개통과 함께 ‘오송시대’ 개막을 자축하는 KTX시승행사에 참석한 이상록(82) 호남고속철도분기역 오송유치위원장은 “20여 년간 전 충북도민이 흘린 땀의 결실을 이제 보게 돼 여한이 없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이 위원장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의 이력을 들여다보며 새삼 놀랐다. 삶의 발자취를 담은 내용은 무려 A4용지 10장이 넘었다. 경부고속철도 본선역 충북권유치추진위원장 등 고속철 관련단체가 이미 목적을 달성하고 해산된 데다 교육자로서, 그리고 수많은 사회운동을 한 경력 때문에 어떤 직함을 붙여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먼저 내세우고 싶고, 가장 잘 어울리는 직함이 있을 터…. 다름 아닌 호남고속철도분기역 오송유치위원장.

호남고속철도분기역 오송유치추진위원회는 1995년 민간단체로 설립됐지만 고속철도 충북유치를 위한 충북도민의 염원은 1989년부터 시작됐다. 2010년 오송역이 개통하는 동안 21년 역사의 한복판에는 늘 이 위원장이 있었다.

충북은 오송역 개통으로 전국 2시간 이내 생활권의 중심이 됐다. 경부고속철도에 이어 2014년 12월 호남고속철도와 강남 수서선이 연결되면 오송역(경부 2홈 6선·호남 2홈 4선)은 국내 유일한 융복합 플랫폼으로 국가철도망 ‘X축’을 담당하게 된다. 경부·호남선 구간과 충주~제천~태백~강릉까지 이어지는 중부 내륙권의 교통 요충지는 물론 중부권 산업의 중심지로 부상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30대의 혈기왕성한 교사가 어느 날 갑자기 교단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승만 후보를 4대 대통령으로 선출한 1960년 3월 15일, 투표 장소였던 청주농고에는 밤이 됐지만 전기가 꺼져 칠흑 같은 어둠속에 묻혀 있었다. 그날 밤 11시가 넘어서야 불을 밝힐 수 있었지만 어둠속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투표용지를 바꿔치기하는 ‘3.15 부정선거’가 자행되는 현장에 숙직교사였던 이 위원장이 있었다. 새벽 2시 교내를 돌다 율량동 쪽에서 환한 불기둥을 목격하고 아침에 달려가 보니 타다 남은 투표용지가 눈에 들어왔다.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어두운 역사적 사건을 목도한 젊은 교사는 훗날 충북지역 현안문제를 온 몸으로 부딪힌다. 오송역 유치를 비롯해 문장대 용화온천개발을 무력화시켰으며,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으로 재직땐 71회 전국체전 첫 충북 3위라는 성적을 내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이 나올 만큼 모진 풍파와 역경을 이겨내고 오송분기역 유치를 이끌어낸 이 위원장을 오송역 개통 이튿날인 2일 둘째 아들인 두희(동보건설 대표)씨 집에서 만났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중절모에 바바리코트 차림의 이 위원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날씨도 추운데 여기서 기다리셨습니까.” 취재진을 주차장에서부터 5층 대담장소까지 손수 안내하는 팔순 노신사의 친절함과 배려심에 머리가 절로 숙여졌다.

 

― 요즘 인터뷰를 많이 하셨지요?

“언론에서 찾는 일이 자주 있네요.”

― 그만큼 오송역 개통과 위원장님을 떼어놓을 수 없을 테니까요. 어제 오송 KTX 첫차를 타셨는데요.

“정말 빨라요. 40분 만에 서울 도착하더군요. 오송역에서 10시 4분에 타서 갔는데 44분에 딱 도착이 됐어요. 비행기 속도는 잘 모르잖아요. 고속전철은 차창으로 보이는 경관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걸로 봐서 속도감을 느끼게 되지요.

― 고속열차를 타보신 경험이 있나요.

“25년 전에 일본 도쿄에서 오사카를 가는데 신간선을 이용했어요. 일본은 그때도 고속철도 역 주변에 마을이 계속 됐어요. 옛날 경부선은 마을이 뜸하게 있었는데, 이번 고속전철을 타보니까 서울서 조치원까지 건물과 공장이 들어서 있는 모습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꼈어요. 한국도 국력이 이만큼 성장했다고 실감했지요. 조국의 발전된 모습에 감개무량 하더군요.”

― 유치활동이 시작되고 우여곡절 끝에 2005년 6월 30일에 오송분기역이 확정 됐습니다. 그 당시 활동을 태산중령을 수 없이 넘어온 장편의 드라마였다고 평가했습니다.

“사실은 1989년부터 유치운동이 시작됐다고요. 정부가 충북을 배제한 경부 고속철도 서울-대전-부산 기본노선을 확정했죠. 경부선을 건설할 때 청주노선을 배척한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청주에 올 것이 조치원으로 해서 대전으로 가 지금의 경부선이 된 것이죠. 대전은 그때 허허벌판이었어요. 말 그대로 한밭이었지요. 그때 대전은 청주만도 못했지요. 그런 한이 있기 때문에 충북에도 반드시 철도가 와야 된다는 생각에서 유치운동이 시작된 겁니다.”

― 위원장께서 그때 전면에 나섰습니까.

“1989년 민간사회단체에서 준비모임을 갖고 남궁 박사와 권태성 선생을 위원장으로 위촉하고 나 역시 위원으로 일했죠. 1991년 경부고속철도 본선역 충북권 유치위원회가 정식 발족하면서 본격 활동에 들어갔죠.”

― 유치위 활동을 소개해주시죠.

“경부고속철도로 충북이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충북선과 연결해 X자 축을 만들어야 된다는 당위성을 주장했죠. 그러나 철도청과 건설교통부(현 국토해양부)에서는 천안서 조치원 서쪽 4km쯤에 위치한 금남으로 돌아가는 대전 노선을 끝까지 주장한 거예요. 그때 결사적으로 싸웠지요. 천안, 영동, 서대전, 논산역장들에게 만약 충북으로 유치 안하면 경부선에 위협을 가하겠다고 했어요. 그 말은 철도를 폐쇄시키겠다는 거지요. 고인이 된 박종원(전 한국병원이사장) 부위원장과 단둘이 상의해서 기찻길에 돌을 쏟아 붓자고 했어요. 부강역에서 내판역으로 넘어가는 협곡에 돌을 쏟아 붓겠다며 관계기관에 서면으로 압박했지요. 밤에 트럭을 가지고 극비리에 도상연습까지 했다니까요. 그때 감옥 갈 생각으로 했지만 무모했지요.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래도 붙잡아 가지는 않더군요.”(웃음)

―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충북도민의 반발은 고조에 달했고, 급기야 노태우 대통령이 1991년 9월 충북을 방문하고 이동호 충북지사와 임인택 건교부장관에게 재검토를 지시한 거죠. 그렇지만 철도청에서는 천안서 오송으로 돌면 곡선이 되는데 이게 과학적으로 안 된다고 거듭 반대를 했다고요. 임 장관한테 예산이 직선보다는 조금 더 들겠지만 2.5km만 늘리면 충북승객이 증가해 설치경비를 빼고도 남는다고 설득했지요. 말 못할 우여곡절이 많았지요.”(정부는 1991년 6월 25일 청주 지선이 포함된 경부고속철노선을 발표했다.)

― 경부고속철 지선은 결정됐지만 오송역 건설문제는 해결이 안됐지요,

“그렇지요. 처음에는 서울-대전-대구-부산 노선에서 서울-천안-대전-대구-경주-부산 노선으로 늘었는데 오송역은 말을 안 해요. 오송역은 천안서 40km, 오송서 대전까지는 37km라서 300km의 속도로는 제동에 위험성이 크다며 오송정차는 힘들다는 거예요. 여러 과정이 있었지만 임인택 장관은 오송역 부근에 인구가 100만 정도가 될 때에 오송역을 건설하겠다는 조건을 달았어요. 당시 충남도는 오송을 반대했지만 연기군은 오송역을 지지했지요. 그때 청주인구 48만이었지만 청원군 15만, 연기군 10만, 괴산 10만, 진천 8만 등 배후지까지 포함하면 100만에 가깝다고 주장해 오송역을 건설 승인을 받아냈지요.”

― 다른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왜 없었겠습니까. 호남고속철도를 수서에서 출발하기로 하면서 복복선을 만들겠다는 거예요. 천안 오송 구간을 복복선으로 하면 5800억원이 더 든다는 주장을 내세워 오송을 배제시키려다 임인택 장관실에서 차관, 국장들 있는 자리에서 전 세계에 없는 고속철도의 복복선을 만드는 게 타당하냐고 따졌지요. 장관은 깜짝 놀라요. 고속철도에 누가 복복선을 만들겠다고 했냐고 소리를 질러요. 장관은 그 돈 있으면 동해선을 깔라며 부하직원들을 나무랐지요. 그러고선 복복선 얘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어요.”

― 유치과정에서 150만 충북도민의 단합된 역량을 어떻게 이끌어내셨는지요.

“첫째는 학자들의 이론전개고 둘째가 홍보활동이고, 셋째는 시민궐기대회지요. 각 시군에 오송유치 추진운동본부를 결성해 오송역 유치 플래카드를 달고 자동차에도 스티커를 2만장을 만들어 붙였지요. 부녀회나 각 동장들이 그 책임자로 임명됐으니까 전 도민이 한 마음이 된 거예요. 또 합리적인 논리발굴과 확산에 언론과 학자들이 발 벗고 나서줬죠. 충북선도 오송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서해까지 끌고 가라는 거예요. 제천서 동해로 뚫어서 장차 러시아와 중국대륙을 잇는 대륙횡단철도와 연결되는 원대한 계획을 준비해야 한다고 외쳤지요.”

― 활동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그때 전 도민이 5800만원의 성금을 냈어요. 민간이 앞장서 불우이웃돕기 성금처럼 자발 모금이 됐지요. 이런 도민의 열성적인 참여에 중앙정부도 감동을 받았지요.”

― 연관해서 문장대 용화온천개발저지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개발을 저지시켰지요.

“문장대 용화온천은 국법을 어긴 거예요. 속리산이 국립공원이지요. 온천을 개발하면 호텔, 놀이터 별게 다 들어와요. 거기 오폐수가 얼마나 많아요. 상류에는 일체 그런 시설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세계인의 상식 이예요. 겨울에 정원식 국무총리가 용화로 내려왔는데 청천, 괴산주민들이 강추위 속에서도 천막을 치고 반대운동을 하는 모습을 본 정 총리가 상주시장 등 일행에게 ‘야 상주시장 저 봐라 천막 속에서 어려운 농민들이 벌벌 떨면서 있는데 왜 공사를 하냐’고 공사 중단을 지시하더군요. 그러니까 상주시장이 ‘총리님 안 됩니다. 우리가 몇 년 전부터 경북 지사의 허락을 받아서 하는 것입니다.’ 국무총리가 소리를 쳤어요. ‘너희 말 안 듣겠다’고…. 그 후 국무총리 산하 행정심판위원회가 열렸는데 ‘불가’로 결정됐지요. 그렇지만 경북도의 집요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12년 동안 재판을 56회나 했어요.”

― 재판과정은 어떠했습니까.

“경부고속철도 건설 과정에서 일명 ‘도롱뇽 소송’으로 불렸던 천성산 원효터널을 뚫는데 지하 300m에 있는 지하수가 마르고, 도롱뇽이 없어진다고 공사 중단을 요구 했잖아요. 요새 도롱뇽이 더 많아졌고, 마른다던 지하수는 철철 넘친다고 하데요. 인근 영산대학 부구욱 총장이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용화온천관련 재판을 16번이나 했어요. 그분이 법복 벗고 총장으로 가면서 판사 생활 중 가장 인상에 남는 판결이 문장대 용화온천저지 승소판결이라고 말했대요. 속리산 문장대 일원은 한강의 최상류예요. 충주, 괴산주민의 식수원이고, 이 물이 남한강으로 팔당댐으로 가는데, 이런 위험요소를 최상류에 둘 수 있냐고 해서 막아 냈지요. 12년간 참 힘들었지요. 하여튼 그 당시에 동양일보에서도 보도했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했는데 결국 이겼다고요. 문장대 용화온천은 참 역사적이지요.”

― 충북체육회 사무처장은 어떻게 맡으셨나요.

“강원도 ‘동원탄좌개발’ 중역으로 근무할 때 였는데 노건일 충북지사가 체육회를 맡아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분의 말씀은 대성학원 기획관리실장으로 청주대 등 7개 학교를 관리한 경험과 역량을 충북체육 발전을 위해 발휘해 달라고 해요.”

― 노지사의 요청을 받아드렸나요.

“하는 일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다고 했더니 애향심을 발휘해 달라는 거예요. 그 말에는 꼼짝 못하겠더라고요. 그날로 회장한테 사표를 내고 충북으로 내려가야 겠다고 했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정치인을 꿈꾸고 있었는데 활동도 활발하게 했습니다. 사북광업소가 가장 큰 탄광으로 남녀 직원만 1500명이 근무했는데 1980년 4월에 일어난 동원탄좌(주) 사북광업소 광부들의 총파업사건 때문에 근로자들의 정신교육에 심혈을 기울일 때라 강원도 일대 광산은 사북광업소 소장인 나를 초청해서 강의를 들었어요. 한번은 설악산 신흥사에서 1만 명의 광산 주민들을 모아 놓고 특강을 하기도 했죠. 이듬해(1988년) 봄이 국회의원 선거였는데 정치권과 지역에서 나를 정선지역에서 입후보 시키려했죠. 그래도 충북지사와 약속을 했으니 어쩌겠어요.”

― 충북체육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요.

“체육회 직원들로 하여금 선수관리를 철저하게 했어요. 충북에서 열린 1991년 70회 전국체전에서 처음으로 종합 3위를 하고 발전상까지 탔어요. 그리고 4년 임기를 마치고 사표를 냈습니다.”

― ‘청풍명월 그 속에서’를 시작으로 해고문집 8권을 잇따라 내셨는데요.

“평생 교육자 노릇 한 사람이니까 오래 살면 올해를 마감하는 책을 내곤 했지요. 또 내겠지요. 후세에 교본이 될 만한, 내 인생 철학을 쓰는 것이지요. ‘베풀 걸, 볼 걸, 즐길 걸’이란 제목으로 해고문집을 2007년에 냈는데 남한테 더 베풀고, 있으면 베풀어야 된다는 거지요. 베푸는 덕이 제일 큰 덕이지요. 또 남하고 즐겨야 해요. 여인동락, 사람과 더불어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지요. 남을 즐겁게 할 수도 있고, 또 내가 끌어줄 수도 있는 그런 것이 나를 반성하게 되지요.”

― 요즘도 바쁘게 보내시는데 하루 일과는요.

“문집은 주로 저녁에 쓰고 있고, 오전 6시 30분에 여름에는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나 신문 2~3개를 보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경주이씨 중앙종친회장을 역임한 관계로 종친 일을 보고 있고, 또 비문을 써 주고 있지요. 지금까지 80개가 넘을 거예요.”

― 그래도 건강을 유지하셨기에 어제같이 오송역에서 KTX를 타시는 감격을 맛 보셨잖아요. 건강 유지 비결은요.

“옛날 같으면 벌써 죽었어야지. 과식하지 않고, 술 끊은 지 15년 됐고, 담배는 원래 안 태웠어요. 매일 자전거나 도보로 2~2.5km를 달려요.”

― 좌우명은.

“지난행이(知難行易), 정안수상(正眼秀想) 아는 것은 쉽고 행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나는 거꾸로예요. 알면 행하는게 쉬워요. 눈은 옳게 봐야지. 거꾸로 보면 안 되는 거예요. 수상이란 말은 좋은 생각, 정확하게 보고 바른 생각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 가족은 어떻게 되시나요.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4년이 흘렀네요. 아들 석희(개인사업), 두희(동보건설 대표), 도희(부산 신항만건설 기획단장), 용희(해양대 교수) 4형제에서 손자 다섯에 손녀 셋을 두고 있어요. 그중 한 손녀가 공학박사학위 받았어요.”

― 충북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기셨는데 앞으로 계획이나 소망은요.

“오송역사의 준공과 함께 고속철도 개통을 보게 된 것만 해도 여한이 없어요. 일개 촌부로 아쉬움을 느끼고 살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내일 죽어도 슬프거나 아까운거 없어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친지가 죽으면 손수 염해서 묻어 주는 일은 빼 놓을 수 없지요. 최후의 봉사가 아닐는지….”

― 한정된 지면 때문에 많은 말씀 담지 못한 점 아쉽게 생각합니다. 늘 건강하시길 빌겠습니다.

▶대담·글 / 김홍균 편집국장

▶기록 / 오상우 ▶사진/임동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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