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로 당당하면 권위는 필요없어… 공부하는 여성의원 돼야”

 

송옥순    (宋玉順)씨는…△1938년 4월 2일 청주 출생 △청주여중·고, 이화여대 국문학과 2년 중퇴, 경기대 국문과졸업, 충북대 행정대학원 수료 △1986~90년 청주시 새마을부녀후원회장 △1990~94년 한국어린이육영회 충북지회장 △1994~98년 충청북도 새마을부녀회장 △1995~98년 민선1기 충청북도의회의원(5대) △1998~03년 충청북도 새마을회장 △1999~02년 충북여성포럼 대표 △1999~02 충청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부회장 △1996~05 청주시 평화통일자문위원 △2001~05년 대한적십자사충청북도지사 부회장 △(현)의료법인 한국병원기획이사 △(현)충청북도 지역개발회이사 △(현)충청북도발전협의회 자문위원 △(현)충청북도여성정책위원회 부위원장 △청주시 상당구 금천동 장자부영아파트 301-1005 (☏043-298-3601)

요즘 여성계가 수선스럽다. 6.2 지방선거에서 ‘지방의원 여성공천 의무화’가 시행되기 때문이다. 지난 2일 국회에서 통과된 새 ‘공직선거법’은 지역구 시·도의원 선거에 국회의원지역구를 기준으로 1명 이상의 여성후보자를 추천해야하며 이 규정을 위반할 경우 그 정당이 추천한 해당 국회의원지역구의 시·도의원 후보자 등록은 모두 무효가 된다.
수년전부터 여성계가 끈질기게 요구했던 숙제가 해결되는 시점. 그러나 정작 여성계는 혼란스럽다. 여성후보자군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당에서는 의무공천을 해야하니 인력풀이 필요하지만, 여성후보자들은 험난한 선거직보다는 안전한 무임승차인 비례직에만 매달린단다. 게다가 역차별을 주장하는 남성후보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어찌됐든 법의 개정으로 이번 6.2지방선거에서 여성 후보자의 인기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새 ‘공직선거법’ 이 개정된 후, 충청북도 첫 여성도의원을 역임한 송옥순(72)씨를 만났다.

꽃샘바람이 세차던 금요일 오후였다, 약속시간에 맞춰 그는 정확히 나타났다. 짙은 갈색의 단정한 슈트차림, 바람이 부는데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정돈된 머리스타일, 보석반지나 보석 목걸이 대신 깔끔한 브로치 로 패션을 마무리한 그는 예나 이제나 눈에 띄는 패셔니시스트다.

-여전히 멋지십니다. 이제 눈은 괜찮으시죠?
“아직 눈이 부셔서… 안경쓰는 것이 습관이 안돼 영 어색해요.” 그는 백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지난해 그는 황반변성으로 양쪽 눈을 수술했다.

-제가 뭐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까요. 워낙 맡으셨던 일이 많아서.
“이제 거의 손을 놓았습니다. 현재는 충청북도 여성정책위원회 부위원장이 제일 공적인 직함입니다. 위원장은 행정부지사이지요. 그밖에 몇 곳에서 자문위원 이사 등을 맡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점차 줄일 참입니다.”

-과거 맡으셨던 수많은 직함가운데 가장 영예스러웠던 이름은 아무래도 충청북도 첫 여성도의원이겠지요.
“모든 이름이 제게는 나름대로 다 영예스러웠습니다. 충청북도 첫 여성도의원 외에도 충북여성포럼대표, 충청북도 새마을회장, 대한적십자사 충청북도 부회장, 충청북도사회복지공동모금회 부회장, 충청북도 지역개발회 이사 등....지나고 보니 제 능력에 비해 버거운 일들을 참 많이도 맡았었습니다.”

-지방선거가 채 3달이 남지 않았습니다. 올 지방선거에서는 여성공천 의무화 규정으로 더욱 많은 여성들이 지방의회에 진출할 것 같습니다. 지방자치가 전면적으로 시행되던 시기에 충청북도 첫 여성 도의원을 지낸 분으로서 감회가 남다르실 텐데 도의원 진출 당시의 이야기를 회상하신다면.
“저는 95년 민선1기 지방선거에서 비례대표(당시 민자당)로 도의원이 되었습니다. 지방선거가 처음 실시되던 때이므로 여성을 우대하는 정책은 없었어요. 저는 성(性)과 관계없이 비례대표가 되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타의에 의해 뛰어들게 된 셈이지요. 80년대부터 새마을 부녀회, 자수회, 어린이육영회 등 여성단체 일에 관여하긴 했지만 제가 본격적으로 사회활동을 하게 된 것은 남편(박종헌·한국병원이사장. 95년 작고)의 영향입니다. 당시 새마을중앙회이사였던 남편은 건강이 안좋았는데 저 혼자 남을 것을 예감했는지 저를 정당에 추천했던 거지요. ‘못하겠다’고 버티는 제게 남편은 ‘당신은 잘 할 것이다. 모성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된다’고 설득했습니다. 6월 8일 제가 비례대표 1순위로 확정됐다는 통보를 받은 뒤 남편은 6월 27일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의 수첩에는 아직도 남편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선거는 남편의 삼우제 날인 7월 1일이었어요. 투표를 하고 삼우제를 지내면서 이게 현실이구나 깨달았지요. 등원전날엔 잠을 자지 못했어요. 말은 어떻게 해야 하나, 옷은 어떻게 입고 가야하나, 행동은 어떻게 해야 하나, 모든 것이 두렵고 막막했어요. 40명의 의원 중 여성은 저 하나였으니까요.”

-막상 일을 시작하니까 달라지시던가요?
“이제와서 얘기지만 처음 맘고생은 말도 못했습니다. 의회가 열리는 날이면 불안해서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의회 방청도 해본 일이 없는데 무엇을 질문해야할지 혼자서 가슴앓이만 할뿐 물어볼 사람조차 없었으니까요. 지금은 월급도 있고 시민들의 의식도 높아져서 활동영역이 넓어졌지만 저는 상임위에 배치된 전문위원의 도움을 받는 것이 고작이었어요.”

-의정활동 중 보람 있는 일도 많으셨을 텐데요.
“제가 지금쯤 의원이 되었다면 아마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열심히 일했다고는 생각하지만 경험이 없다보니 부족한 점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자랑하고 싶은 일은 있습니다. 첫째는 여성발전기금을 발의해 조례를 제정한 일이고, 둘째는 대안학교 설립을 발의해 현재의 양업고등학교가 개교한 일, 그리고 대천에 임해학생수련원이 세워지도록 한 일을 꼽고 싶네요. 여성발전기금은 95년 김영삼 대통령이 조례발표를 한 후 이듬해 전국 시도에서 조례안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우리도와 몇 군데가 빠졌더라고요. 제가 조사해보니 최하 20억, 100억이 넘는데도 있었지요. 우리도의 수준에 맞춰 30억 원으로 조례발의를 했는데 말이 많았어요. 그 돈이 가능하냐, 여성발전기금이 있으면 남성기금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지요. 저는 열심히 의원들을 설득했고 결국 저를 뺀 39명 전원이 서명을 해줘서 무난히 30억 목표가 달성됐지요. 정우택 지사님 취임 후 현재는 그 기금이 50억원에 이릅니다. 이 기금의 이자 가운데 10%는 재적립하고 나머지 이자로 매년 여성단체 등에 사업보조금으로 배분하고 있습니다.”

-여성발전기금으로 매년 충북도에서 이뤄지는 행사가 대략 20여개쯤 되지요?
“올해는 28개 사업이 신청됐습니다. 사실 지방에서 예산 지원을 받는다는 게 어렵습니다. 비영리민간단체에게 주는 기금도 있지만 열악한 여성단체들이 사업계획서를 내서 기금을 받긴 어려워요. 여성발전기금 때문에 매년 20여개의 새로운 사업들이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반갑고 고무적인 일이지요.”

-말씀이 나온 김에 양업고 얘기도 좀 듣고 싶습니다. 양업고가 올해로 13년이 되었지요?
“의원이 된 후 강원도에서 열린 전국 광역의원 연찬회에 참석했어요. 그때 부산에서 온 의원 한분이 영광에 영산성지학교라는 대안학교가 생겼는데 부산에 만들려고 했더니 교육청 허가가 나오지 않더라는 발표를 했어요. 그 말을 듣고 돌아와 성지학교에 자료를 보내달라고 했지요. 그리고 교사위원회 소속 의원 8명과 그 학교를 방문했어요. 오전에는 일반수업, 오후에는 각자 기술을 익히는 등 일반학교와 달리 수업을 하는 것을 보고 감명이 깊었어요. 당시 대안학교는 유일하게 그곳 한군데였거든요. 돌아와서 도정질문을 했지요. 당시만 해도 1년에 30만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탈선의 경력이 있었고 1년에 6만 명의 학생들이 퇴학을 한다고 했어요. 도정질문을 통해 대안학교를 제안했더니 김영세 교육감이 연구해보겠다고 하더군요. 그 다음에 개인적으로 매괴여상에 계신 신부님을 만났어요. 지금의 양업고 교장선생님인 윤병훈 신부님이지요. 정진석 주교님이 여기 계실 때였는데 천주교가 대안학교를 만들겠다고 나섰어요. 기공식이 열리기 전 마침 청주예술의전당에서 검찰과 새마을회가 폭력방지 캠페인을 벌였는데 행자부장관이 참석을 하셨어요. 식사자리에서 그 말을 꺼냈더니 장관께서 적극 지원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 말 떨어지고 교육청에서 반응이 왔지요. 개인이 하려면 3년에서 5년쯤은 걸려야 되는 건데, 교육청에서 5억원, 충북도에서 5억원이 지원되면서 바로 개교가 됐습니다.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인데 앞에는 잔잔한 냇물이 흐르고 경치가 그만이에요. 10주년 때 감사패를 받으러 갔었는데 무척 좋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 같아요.”

-남이 간 길의 뒤를 따라 갔으면 쉬우셨을 텐데 첫 길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죠.
“바로 그거예요. 제가 다 첫째로 하다 보니 보고서 같은 것도 기초 삼을 것도 없었어요.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제 판단으로 결정하려다보니 이게 잘하는 것인가 늘 반문하며 일했지요. 예를 들어 퇴직한 노인들에 관한 문제를 생각할 때도 그랬어요. ‘창변경찰’이라는 이름의 사업이었는데, 말하자면 뒷골목에서 폭행당하는 아이들을 노인들이 선도하면 좋겠다는 취지의 좋은 일이었어요. 그런데 일부에서 그 예산을 깎아야 한다고 해서 많이 싸웠지요. 지금은 일자리 창출로 돈을 더 지급해가면서라도 노인들의 일을 만들잖아요. 그때는 그런 것으로 힘들었는데 세월이 많이 바뀌었어요.”

-도의원 임기를 마친 후 이어서 충북여성포럼의 초대 대표를 맡으셨는데요.
“충북여성포럼은 충청북도나 충북여성들 위해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만한 기구입니다. 벌써 11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네요. 1998년 민선2기 선거에서 이원종 지사님이 후보로 출마했을때 토론회에서 여성들이 여성네트워크인 포럼의 설치를 요구했지요. 그분이 지사에 당선된 후 약속을 지키셨어요. 각계의 대표로 구성된 28명 운영위원과 진보와 보수 성향을 망라한 도내 각계각층의 131명 회원으로 포럼이 결성되고 어떻게 하다 보니 제가 초대 회장을 맡게 됐지요. 그러나 그 일 역시 처음이라서 초기엔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이런 기구의 모델이 없는데다, 조례안도 없었고, 여성단체와는 조직이 다르니까 구심점도 이뤄지지 않고, 또 회원들의 이질적인 성향으로 쉽게 화합이 되지 않았습니다. 회원 중에도 일부는 관변단체냐고 묻고, 일부는 도의 위원회쯤으로 생각해 왜 출장비를 주지않느냐고 했습니다.”

-회장의 리더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출발이었지요.
“초창기에는 참석률을 높이기 위해 회의를 한번 열려면 제가 직접 회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했습니다. 131명 전원에게 전화를 한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충북여성포럼이 민관협력기구로 빠른 시간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개방직 공무원으로 부임한 우리나라 여성학박사 1호님인 정영애 여성정책관(현 서울사이버대학교 교수)의 뒷바라지가 큰 힘이 됐습니다.”

-충북여성포럼은 전국에서 최초로 구성된 여성포럼으로 전국에서 벤치마킹을 하는 기구로 자리를 잡았는데요. 하신일 중 기억에 남는 일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크게 말하면 충청북도에 여성정책을 제안했지요. 예를 들면 방과 후 아동수업과 여성일자리 문제 등의 토론회를 통해 여성인턴제 사업의 시행계기를 만들었고, 여성의 지위향상과 정치 확대를 위해 토론회를 열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정당에 의견서를 내는 등 여성의원수를 늘리기 위한 많은 일을 했습니다. 또 일본과 중국 베트남 등 국제교류회를 통해 아시아 여성의식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인권 복지, 환경 경제, 교육 문화, 정치 등 각분과별로 여성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다보면 책 한권이 넘겠네요. 11년 역사니. 저는 지금은 고문으로 뒤에서 돕고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모습이 즐거워 보이십니다. 포럼 외에도 또 처음으로 맡으셨던 일이 충청북도 새마을회장이셨지요.
“그러네요. 그것도 여성으로는 전국에서 최초로 맡게 된 것 같네요. 새마을부녀회장일때 미국 아들에게 가 있는데 연락이 왔어요. 그런데 대답을 못했지요. 새마을충북도회는 회원만도 15만 명이나 되는 단체이고 봉사단체이다보니 개인적인 출연금도 무시하기 어렵거든요. 자신이 없어 거절했는데 어찌어찌하다 결국 맡게 됐어요. 다행히 몇 년 동안 부녀회장으로 새마을회 분위기를 익혀서인지 생각보다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회장 재임동안 수곡동 법원 앞 건물을 인수해 회관을 마련한 것이 잘한 것 같고요.”

-새마을회장으로도 열정적으로 일하셨는데 북한도 다녀오셨지요.
“어느 핸가 청천에서 회의를 하다가 보은 수해소식을 듣고 5일 만에 855포의 쌀을 모았던 일이 생각나네요. 북한은 2번을 갔지요. 손수레 6000대와 묘목, 못자리판 병아리 3만 마리 등을 보낸 뒤 7명이 갔는데 여성이라고 특별히 끼어줘서 갔습니다. 2번째 갔을 땐 첫 번 방문 때 만났던 북한관리가 다가와 살그머니 달걀을 손에 쥐어주었어요. 우리가 보낸 닭이 낳은 첫 알이래요. 그 알을 손수건으로 싸서 가지고 와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여성리더로서 많은 일을 하셨는데 후회되시는 일은 없는지요.
“저는 매력없는 사람이에요. 부모님 성격을 닮아서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살면서 여태까지 누구와 다투거나 한 적이 없어요. 그런 제가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고 과분하게도 큰 일들을 맡게 되었었지요. 새마을도회장으로서 자조장 훈장도 받았고, 대통령상도 받았어요. 더 이상 영광이 없지요. 다만 너무 바쁜 시간들로 가까운 친구들이나 형제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늘 단정한 바지정장 차림이신데 원래 이렇게 입으셨나요?
“의원이 된 후 바뀌었습니다. 젊을 때는 스커트만 입었었는데 의원 되고는 바지뿐 아니라 옷 색깔도 바뀌었지요.”

-의상이 실용성뿐 아니라 권위의 상징이 되기도 하는 가 봅니다. 그런데 ‘배지달면 달라진다’는 말이 실제로 의원이 되니 그렇게 되던가요? 의회 진출을 꿈꾸는 여성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일로 당당하면 권위가 필요없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실력에서 나옵니다. 앞으로 의회에 진출하는 여성의원들은 공부하는 의원이 돼야합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혜택을 받았다면, 그 혜택의 2배 이상을 실력으로 돌려주어야 합니다.”

-건강은 어떠세요?
“지난해 우연히 팔을 좀 다쳤고. 눈수술을 했지만 현재는 다 괜찮아요.”

-개인적으로 관심 갖고 있는 일은요.
“아들(박세민·48·고려대 법대교수)이 하난데, 아들이 잘 돼야 된다는 생각을 하지요. 가족으로는 아들 며느리(엄지현)와 손주가 셋 있어요. 서울에 있는데 아이들과 매일 통화를 하지요. 제가 바쁠 땐 아이들이 내려왔는데 이제는 제가 자주 올라가지요.” 손자 손녀 얘기가 나오자 그의 입이 벌어졌다. “손자 손녀 얘기하려면 돈내고 하라는데… 우리 애들이 착해요. 첫째가 진아(중3·여) 둘째가 서현(초5·여) 막내가 우성(초2·남)인데 이번에 막내가 반장이 됐대요. 전화가 왔어요.  할머니 우리 집에 좋은 일 생겼어요. 할머니 아시면 놀라실거예요. 그러면서 반장이 됐다는거예요. 그것도 2학년 회장이래요. 애가 활달한 것이 우리 집 식구들의 성격같지가 않아요.....”

-다른 걱정은.
“없어요. 수명이 90세다 100세다 하는데 제 소원은 80정도까지만 사는 거예요. 옛날엔 70을 생각했는데 벌써 넘었잖아요. 건강할 때 좋은 사람들과 더 자주 만나며 지내야지요.”

-고맙습니다. 건강하시고 늘 웃으시면서 지내시길 빕니다.
    ▶대담 / 유영선(동양일보 상임이사)
    ▶기록 / 오상우·사진 / 임동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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