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 찍은 흥덕사터 밝혀낸 ‘살아있는 민속박물관’

빨간모자 쓴 별난 교수, 옥화구곡 외딴집서  충북 무형문화재 기록 여전한 학구열

 

◇김영진(金榮振)박사는…

△1937년 2월13일 괴산군 청안면 청룡리88에서 출생. △청주대 국어국문학과. 동 대학원. 충남대대학원(문학박사). △1962년~2002년까지 청주대에서 교수. 박물관장. 인문대학장. 인문과학연구소장 등 역임. △한국문화인류학회 민속종합조사단원. 중원미륵리사지 발굴조사단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구비문학조사위원. 청주 흥덕사지 발굴조사단장. 제천 단양 청원민속조사 책임조사위원. 현 충북문화재위원장 △저서 (단독편저)‘충청도 무가’등 18권,(공동편저)15권. △‘청주 흥덕사지 발굴과 확인경위’ 등 논문 85편.

 

 

 

‘빨간 모자’를 쓴 ‘별난 교수’가 정년퇴임을 하고 충북 청원군 어느 강가에 외딴집을 짓고 혼자 산다는 소문만 간간이 들려 왔었다.

나이를 따지면 70이 훌쩍 넘었을 것이지만, 아직도 소년 같은 미소와 호기심으로, 역마살을 즐기는 청년 보헤미안으로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넘나들리라 생각하며 찾아뵙고자 몇 년을 벼르던 나도 어느새 60대 중반이 넘어섰다.

충북의 ‘살아있는 민속 박물관’ 김영진(73·청원군 미원면 월룡리156·☏043-221-0331) 박사를 찾아가는 길은 조금씩 마음이 설렌다.

이 나라 문화 유산중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금속 활자본 ‘직지’(直指·정식 서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를 1377년 청주 교외 흥덕사에서 주자(鑄字)로 찍어 낸 곳이 현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866’이요, 이곳에 흥덕사지가 있었던 사실을 밝혀 낸 장본인이 아닌가. (‘직지’는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78년이 앞섰으나, 고려 고종때인 1200년대 초에 ‘상정예문’을 찍어낸 ‘상정예문자’와 관주활자라 불리는 ‘증도가자’라는 금속활자 보다는 150년이나 늦게 나왔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기록된다.)

청원군 미원면에서 보은 쪽으로 가던 국도를 버리고 경승지로 알려진 옥화대 가는 군도로 접어든다. 갈래 길이 많아 망연하던 차에 마침 시내버스에서 몇 사람이 내리기에 “청주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한 교수 한 분이 이 곳 어디에 집을 짓고 혼자 살고 계시다는데 혹시 아느냐”고 물었다.

“이 곳서는 보이지 않으나 저 아래 강 쪽에 외딴집을 짓고 혼자 사는 사람이 있으니 저 길을 따라 한참을 가시유-” 란다. ‘혼자 산다’는 말에 서로의 의사가 통한다. 농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니 또 몇 갈래, 어림으로 가다 마을 끝 한 집에 들러 다시 묻는다.

가르쳐 준 대로 산언덕을 따라 외길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1㎞쯤을 오르니 눈 아래 얼음으로 덮인 강이 보이고, 잘생긴 집 한 채가 남향으로 별장처럼 산뜻하다. 혹한의 겨울이 오래 머물었음인지 주변의 나무며 먼 산 색깔이 온통 검은 빛이어서 잘 가꿔진 노란 잔디밭이 돋보인다. 생각해 보니 아직은 동짓달, 봄을 기다리기엔 성급하다.

누런 진돗개가 수선스런 사람들의 출현에 집주인을 불러낸다. 현관문 쪽으로 ‘학고산방’(學古山房)이라 쓰인 당호(堂號)가 눈길을 잡는다. 예나 다름없이 선글라스에 화사한 문양의 점퍼차림으로 나타난 김 박사는 ‘먼 길 찾아오느라 수고 했다’며 안으로 들길 청한다.

거실 대형 유리창으로 바라다 보이는 강변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다.

 

 

-저 물이 옥화대에서 오는 물인가요?

“바로 이 위가 옥화대지요. 발원지가 속리산 문장대입니다. 이상범 청원군수 시절, 옥화구곡을 만들었는데 여기가 중간인 오곡(5曲)입니다. 우연히 잡았지만 내 집이 센터가 됐습니다. 저 물의 폭이 넓어 ‘마당소’(沼)라 해요. 풍수를 아는 사람들은 이곳에 관해 여러 말을 하지만 허하면 돋우면 되고, 물 나가는 방향이 나쁘면 앞에 나무를 심어 보이지 않게 하면 됩니다. 풍수는 완전한 게 없어요. 여자와 풍수는 그렇습니다. 모자란 것은 보충하면 되고 센 것은 누르면 됩니다. 허,허.허…”

-외딴집 하나 지으시는데 많은 돈 들이신 듯합니다.

“대지만 800평에 건평 70평입니다. 퇴직금 2억 원으로 땅값에서 터돋이 부터 건축까지 전부. 이 집은 모두 옹벽입니다. 바닥과 벽, 지붕까지도 그렇지요. 외풍도 없고, 마당의 개가 문 가까이서 짖지 않으면 모를 정도입니다. 튼튼하게만 지었어요.”

-이런 곳에 집을 지은 것이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책 때문이지요? 저 많은 책 버릴 수 없으니 서고 겸, 집필실 겸, 별장 겸, 주택 겸으로 해서 ‘퇴직 기념관’을 남기셨네요.

“김부식 씨의 ‘쓸모없는 책 못 버리고 집을 지었다’는 시가 있어요. 이곳은 무엇보다 조용한 게 좋습니다.

-이곳으로 옮기신 책이 몇 권정도 됩니까?

“정확히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오기 전에 한 트럭은 세명대 지역사회 연구소에 넘겼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보내고 생각해보니 아깝더군요. 들어 올 당시는 원고를 쓰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생각과 다르게 지금도 계속 쓰게 되네요.”

-요즘은 어떤 원고를 쓰고 계신지요.

“충북도에서 무형문화재 기록화사업을 작년부터 시작했습니다. ‘청주농악’과 영동 ‘설계리 농요’에 이어 올해는 제천 ‘오티 별신제’와 진천 ‘용몽리 농요’가 있습니다. 1년에 2개씩 연차적으로 해왔습니다. 늦은 감이 있으나 충북도에서 4000만원의 예산과 각 시군별로 4000만원의 예산을 잡았습니다. 한 건당 그렇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무형문화재는 대장장이 같은 개인과 집단에 따라 예산을 조정할 필요가 있지요. 예산 때문에 안됐던 것이 이제라도 시작이 됐으니 다행입니다. 유형은 형태가 있어서 원형을 지키는 게 문화재 보존이지만, 무형문화재는 원형이 없습니다. 학자들이 원형(原形.型)이라는 말을 쓰는데 잘못된 표현입니다. 고형(古形·型)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예전부터 해오던 재래의 전속 형태이기 때문에 원형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됩니다. 한국민속예술축제의 경우 각 시도마다 팀을 보내서 대통령상이며 장관상을 받은 것만 보존이 됩니다. 사라지는 민속예술을 많이 발굴했다지만, 대회를 통해 지정받은 무형문화재의 부정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가령 ‘논매기’를 한다면 이것을 운동장에 모여서 30분 동안의 공연작품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고형이 아닙니다. ‘민속예술경연대회 용(用)’ 이라는 말을 씁니다. 어느 지역의 민속을 소재로 한 ‘30분짜리 공연작품’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상을 타려고 조작을 하게 됩니다. 변형을 시키고 창작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부분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화재 지정이 고형을 보존하거나 보전 하려는 게 아니라, 전국대회 작품을 보존 전승하는 쪽으로 돼 버렸습니다. 2대째 가서는 30분간의 노래만 외우면 됩니다.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충북도 무형문화재기록화사업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농악도 건립농악, 유희농악, 두레농악 3가지인데, 지금 전국대회는 놀이농악인 유희농악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건립농악과 두레농악을 보존시키려 합니다. 내가 있을 때 해야 합니다. 도에서는 현재 하는 것만 기록하는 것으로 돼 있는데 없어진 것도 다 기록해 보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학문적으로 수정하시거나, 정정하실 충북 민속관련 일들이 많아 노후에 조용히 지나고자 하신 계획이 무너진 것은 아닌지요. 며칠 전엔 충북문화재위원장을 맡으셨더군요.

“아무래도 맡을 수밖엔 없었어요. 나이들어 ‘조용히 쉰다’는 게 뜻과 같지는 않습니다. 공자님 말씀에 ‘의문 나는 것은 후세에 전하지만, 잘못된 것은 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요즘 젊은 학자들은 보고 듣고 생각한 이른바 기록은 잘 합니다만, 현재 전해지고 있는 양상과 형태에 대해 본질적인 연구를 외면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전해지는 것이 제대로 옳고 그른 것인가에 관한 접근과 확인을 하는 게 약합니다. 노파심이랄까. 충북문화재 관련 일은 외면할 수가 없더군요.”

-민속의 각개 본질은 접어두고 일반적이고, 이미 기록된 것에 관한 접근태도가 아쉽다는 말씀이군요.

“대부분의 요즘 학자들은 ‘조사’만 할뿐 ‘연구’가 없습니다. ‘기록’은 해도 ‘기술’(記述)을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탄금대방아타령’도 전국의 많은 학자들이 대통령상을 탔고, 그대로 전승돼 온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충북의 문화재위원들 중에도 외지사람이 많은데, 그래서 충돌이 생깁니다. 현재 전해진 것만 보면 그렇게 됩니다. 나는 진짜인지 가짠지 아니까 설명해도 그들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참, 딱한 일입니다.”

“충북에 전해져 내려오는 민속 중에 거의가 말씀처럼 원형이든 고형이든 대부분이 변색, 변성(變成)됐다고 보시는지요.

“두 가지인데, 전통문화재는 계승과 발전이 다릅니다. 고형만 지키는 게 옳은 것만은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서 바뀔 수도 있는 것 입니다. 그것을 수용하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입니다. 발전 범위는 기본적으로 뿌리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가지는 바뀌더라도 줄기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은 엉뚱하게 바꾸는 게 문제입니다. 지금 시대 특징은 민속예술을 ‘문화산업’으로 봅니다. 그리고 ‘축제’를 만듭니다. 돈을 생각하는 산업으로 보고 실제와 다르게 ‘새롭게’ 합니다. ‘이벤트’란 말을 쓰면서 그 말 자체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문화 ‘콘텐츠’란 것도 일본에서 쓴 말입니다. 우리 것을 발굴, 보전하는데도 ‘이벤트’식으로, 또는 ‘콘텐츠’란 말을 빼 놓으면 말이 안 되는 줄 압니다.”

-흥덕사지 발굴 때 나온 금고(金鼓)에 ‘청주목흥덕사’가 새겨져 있어 ‘직지’ 인쇄터로 확인하는 등 직지발굴에 남다른 공헌과 감회가 있으시죠? 그 것이 언제였지요?

“1985년이죠. 그때까지만 해도 ‘직지심체요절’ 영인본을 갖고 있던 사람은 아마도 충북에서 나 밖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알아낼 수 있었지요. 그러나 이젠 직지에 관해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청주가 온통 ‘직지’로 도배를 했지만, 과연 이런 현상이 국가적으로나 충북도의 입장에서 바람직한 것인가는 생각할 일입니다.”

-충북의 민속이 2014년 행정구역 개편이나, 청주. 청원 통합 등 작위적인 일로 민속학의 쪽에서 보면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런 것은 아니지요. 학계에서나 문화예술을 하거나 행정구역만 청주. 청원으로 나눠질 뿐, ‘청주 지역’으로 쓰입니다. 문화는 전부 청주와 청원군 쪽을 합칩니다. 서로 포함을 하지요.”

-청주. 청원은 좋은데, 예를 들면 괴산. 증평이나 그런 지역은 어떤지요.

“장단이 있습니다. 충북이 크게 보면 금강유역권과 한강유역권입니다. 소백산을 기준으로 하지요. 괴산은 모래재 쪽은 금강이고 넘어는 한강입니다. 청주도 이티봉을 보면 금강과 한강으로 나뉘지요. 예를 들면 용화온천이 충북도였으면 말이 없었습니다. 경북이라 말썽이었습니다. 그처럼 행정구역이 강으로 나눠지면 괜찮습니다. 괴산. 증평은 갈라진 비평도 있지만 문화재 발달로 본다면 증평의 도안과 사리는 금강구역, 그 외는 한강구역이지요. 행정구역은 산계와 강계를 구분하는 게 좋습니다. 광역화 될 경우 청안은 괴산군, 도안은 증평군, 초평 같은 것이 다 생활권이 같아야 하지요. 예를 들면 증평, 청안, 도안 하면 청주권이 될 것입니다. 청천을 괴산으로 묶어준다거나 해서 수계를 하면 좋다는 것입니다.”

-‘충북의 민속’을 벗어나서, ‘충북의 문화’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내륙에다 유서도 깊고 무엇인가 특별한 게 있지 않을까요.

“특징 없는 게 특징이라고도 하는데, 찾으면 있지요. 원래 충북이라는 지역이 옛날 문화는 고구려는 평양, 백제는 부여, 신라는 경주 등이지만, 충북은 어떤 문화권에서도 변두리지요. ‘뒤늦은 수용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진문화가 없습니다. 변방이라는 게 수용문화가 특징입니다. 예를 들면 청주에서 문화라는 개념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지리적, 역사적만 강조하는데, 내부적으로는 특징이 있습니다. 민속은 생활문화지요. ‘한정식’이 향토음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지역과 차이가 있을 때 향도음식입니다. 원래 ‘한정식’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습니다. ‘청주의 향토음식으로 한정식을 정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면 ‘백반집’과 한정식 집이 어떻게 구분 되나요? ‘한식’이라 할 때는 기본이 밥과 국, 국이 없으면 냉수, 그 다음 간장, 찌개가 기본입니다. 기본으로 밥과 국, 간장, 찌개만 있을 때는 백반(白飯)으로 찌개백반, 구이백반 할 때의 기본식이지요. 거기에 잡채 등의 찬거리가 첨가될 때를 ‘한정식’이라 합니다. 안동의 ‘헛제사밥’이나 강원도의 ‘막국수’ 등은 향토 음식이지요. 어쨌든 음식문화가 다른 곳의 문화와 차이 나려면 역사와 전통이 있어야 해요. ‘청주한정식’ 같은 경우는 조례가 잘못됐습니다. 청주시 조례안을 보면 1조에 ‘청주시에서 생산된 식재’로 만든 것이라 돼 있는데, 그게 말이 되나요? 또 하나는 여기에 음식이라는 것은 식품을 사다가 조리해서 판매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청주에서 올갱이가 유명하다 하면 청주에서 올갱이가 잡힐까요? 전부 중국산이지요. 예를 들어서 ‘전주비빔밥’도 원은 ‘진주비빔밥’입니다. 원래 숙주나물에 선지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숙주는 금방 상하기에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콩나물을 사용하지요. 동해에서 고등어, 서해 조기가 있습니다. 동해에서 고등어 가지고 와서 상하지 말라고 소금뿌린 게 ‘간고등어’지요. 안동 풍기 등의 간고등어가 그런 것입니다. 조기도 아산 천안까지 생조기가 오다가 청주 오면 상해서 소금을 뿌리고 ‘자반’이 되지요. 기본적으로 조사하고 검토해서 객관화 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운영해야 하는데 전혀 안 돼 있습니다.”

-음식 말고도 충북의 것들이 남 다른 것들이 있나요?

“내가 ‘개다리소반’ 논문을 발표 한 후에 딴사람들이 자주 울궈 먹는데, 다른 지방 개다리소반의 다리가 바깥쪽으로 둥글게 휘어 있는데 반해, 충주 것은 안쪽으로 휘었습니다. 그걸 ‘충주소반’, ‘호적발’이라 합니다. 다른 것은 외향이라면 충북은 안으로 휜 상다리로 내향적인 지역기질이 엿보이지요. 이런 소소한 것들에서도 실증적인 충북문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기우일지 모릅니다만, 앞으로 불과 10년만 지나도 이제 이제까지의 생활문화에 관한 증언을 할 사람이나 기억할 사람이 없어질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그것을 찾아서 문화로 지정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도 내 일이지요. 잘못된 것을 정리해 주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 충북민속학회 결성은 가능한가요?

“할 수가 없습니다. 전국민속학회는 있는데, 전에는 충남북 합치려 했는데, 인원이 없습니다. 전부 활동하는 사람이 외지 사람이라 낄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냥 이렇게 가야 하나요? 선생님 같은 몇 분들 없으면 그나마 이제는…

“그래도 희망을 갖는 것은 사람들 생각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조사 자료로 발표된 것은 있거든요. 단편적 옛날 기록으로 추정하든, 후대에 가서 제대로 된 학자가 나와서 옛날 것부터 전부 찾아서 한다면 달라질 수 있겠지요.”

-지방자치를 하면서 단체장을 선거로 뽑는데 이들 중 문화에 관심 있는 이는 점점 없어집니다. 이걸 기록으로 남겨야 될 시기는 얼마 남지 않았고요.

“직선제 병폐가 그런데 있습니다. 모든 문화행사를 표(票)하고 결부시키려 합니다. 예를 들어 문화제나 예술행사 등은 즐기는 게 축제인데, 지금은 보여주는 것으로 바뀌어서 안타깝습니다.”

-더 듣고, 전해야할 선생님 말씀이 많은데, 지면 때문에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올 부터는 칩거(蟄居)접고 예전처럼 발굴 현장이나 여행 때 쓰시던 ‘빨간 모자’를 자주 보았으면 합니다.

▶대담/ 조철호(동양일보 회장)

▶기록/ 오상우 ▶사진/ 임동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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