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턱걸이 신부’… “사제직 일생은 분에 넘치는 영광”
‘청주보육원 암매장사건’현장 취재로 인연 30년만에 다시 찾으니 ‘상전벽해’감회깊어

 

◆김원택 (金元澤)원장 신부는 …
▷44년 4월 28일(음) 진천군 이월면 신계리484에서 출생 ▷서울 성신고. 광주대건대. 신학원연구과 졸 ▷72년 7월 8일 사제 서품 ▷청원군 강외면 오송천주교회 주임신부 ▷충주 목행동-청주시 내덕동 주교좌 주임신부. 미국LA교포 사목 파견. 청주 봉명·영운동 주임신부. 청주교구청 사무국장, 수곡동 주임신부·청주교구청 총대리 겸임, 청주교구 교구장(직대)-교구청 총대리겸임·용암동 주임신부 ▷2003년 2월10일 청주교구 충북재활원 원장신부.(☏ 043-262-7415)


 생각해 보니 30년이 훌쩍 넘었다. 청주시 신봉동 이름 없는 야산 밑에 다시 와 보는 것이.
79년 6월 말, 23만7000명의 시민들이 살고 있던 ‘교육도시 청주’의 외곽지대 신봉동 산 일대는 도굴범들이 횡행했다. 도굴된 고분군(古墳群)현장(현 백제유물전시관 일대)을 취재하러 갔던 나는(당시 합동통신 기자였다) 산 골짜기를 따라 올라갔다. 물 한 모금을 얻어먹으러 들어갔던 산 아래 외딴집 아주머니가 흙먼지를 피우고 달려가는 택시 뒤꽁무니를 향해 “성치도 못한 아이가 또 들어가는구먼… 들어가기만 하지, 나오는 애들은 하나도 없으니 원…쯧쯧” 혀를 차며 내 뱉은 그 한마디가 직감적으로 ‘뭔가 있겠다’는 느낌을 줬었다.

‘저 산 속에 덜 생긴 아이들(정신박약아)의 수용소가 있다’는 이어진 말을 듣고 내친김에 그 수용소를 찾는 중이었다. 무거운 취재 백을 둘러 맨채 걸어서 오르는 산길은 만만치 않았다. 한참 후 산모롱이를 돌아 골짜기에 이르니 생각지도 못한 양옥집 한 채와 이를 중심으로 몇 채의 낮은 건물들이 철조망 속에 둘러서 있었다. 양옥집 문 앞엔 독일산 세파트가 두 마리나 버티고 있었고 놈들은 인기척에 컹컹댔다.

외부인들의 접근을 철저히 막고 있었다. 못 올 곳을 온 듯싶어 황급하게 나무와 숲으로 우거진 산으로 들어섰다. 개 짖는 소리가 멈추길 기다리는데 지열로 온몸은 땀범벅이 됐다. 꼬마들 몇이 마당에 방사한 오리와 염소무리에 섞여 땡볕 아래서 무료하게 놀고 있다. 무려 한 시간 이상을 지켜봤다. 이렇게 관찰된 이곳이 며칠 후 ‘청주보육원 정박아 집단 암매장 사건‘의 현장이 될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며칠 동안 은밀하게 이곳을 드나들며, 전국에서 모여든 정박아들의 수용관리가 엉터리인데다 수용된 정박아들이 죽으면 당국(시청)에 신고치 않고(수용숫자대로 주·부식비가 나오므로)몰래 인근 산에 묻어버리는 등 암매장이 수 년 간 수 백 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소상하게 취재 송고했다.

이 기사는 전국의 주요 일간지와 방송 등이 일제히 머리기사로 다뤄 전국의 눈길이 청주로 쏠렸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즉각 정종택 충북지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기사의 사실여부와 보육원 개선 방향 등을 직접 보고토록 지시했었다. 나는 이 폭로기사로 특종상을 받았고, 일본 등 5개국을 돌아보는 첫 해외 나들이를 부상으로 받았지만, 경찰이나 안기부 등으로 연행되는 등 취재과정에서 당한 수난의 기억은 아직도 끔찍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바로 그 현장- ‘청주보육원’이 그 해 12월 31일 법인이 되고, 첫 이사장으로 의료인인 강홍조 (67·현 충북 청원군 내수읍 초정노인병원 이사장)박사가 취임한다. 그 후 1984년 2월 17일 ‘충북재활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당초 1954년 5월 15일 전쟁고아 27명을 수용하면서 설립된 ‘대성보육원’(1963년 7월 1일)에서 ‘청주보육원’으로 시설명칭이 변경된 후 21년만의 일이다. 2월 17일이 혹 개원일이 아닌가 싶어 미리 이곳을 찾았다.
 
이제는 버젓한 청주시내 한 복판에 들어서게 된 ‘청주보육원’ 아니, ‘충북재활원’은 찾아드는 입구부터가 낯설다. 옛 비포장 산길이 넓은 포장도로가 됐고, 길 양편으로 건물들이 빼곡하여 영락없는 도심이다. 2월 17일이 ‘청주보육원’에서‘충북재활원’으로 간판이 바뀐 날이어서 마음먹고 찾아보니 눈앞에 나타난 ‘충북재활원’은 예상 밖으로 멋진(?)건물들로 탈바꿈 돼 있었다.
한낮인데도 영하 10도의 추위 속에 도착하여 어디로 가야 사무실인지를 헤아리고 있는 우리에게  김원택 프란치스코(66) 원장 신부가 초입에 있는 건물(원장실이 있는 사무동 이었다)에서 나와 반긴다. 40년 가까운 세월의 지기(知己)다.

-30여년 만에 오니 모두가 낯설지만 이 건물은 기억이 납니다. 옛날에는 원장 사택 이었지요. 수없는 정박아 주검들이 암매장 됐던 인근 산세만 그대로군요. 사건 폭로당시엔 원장이나 관계당국이 퍽이나 밉더니, 다시 생각하면 당시 수용시설에 관한 관심도나 지원 등이 열악하여 어쩔 수 없었던 사회현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충북재활원 개원일이 17일이고, 김 신부님도 뵙고 싶어 불쑥 왔습니다.

“남 다른 감회가 있으시겠지요. 그 때의 사건(정박아집단 암매장 관련 폭로기사)이후 많은 변화와 도움이 있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충북재활원’으로 시설명칭이 변경된 날인 2월 17일을 개원일로 하지 않고, 이 시설이 처음 시작된 ‘대성보육원’ 개원일인 5월 15일을 개원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사실은 10일로 원장취임 7년이 되시는 것을 계기로 김 신부님을 뵙고자 왔습니다. 한동안 뵙지 못했는데 몸은 어떠신지요. (김 신부는 12년 전부터 파킨슨(parkinson)병을 앓고 있다)

“더 좋아지지는 않는 병이어서 약 먹으며, 운동을 하며 더 나빠지지만 않도록 노력을 합니다만 나이가 들어가며 뜻만 같지는 않습니다. 이쯤에서 마무리를 해야 하는지… 여러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정년이 70세 까지 인가요?

“로마법은 75세고,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70세까지 하지요. 사정이 있으면 일찍 퇴임하고요. 싱싱한 신부님들이 많은데 건강도 좋지 않은 사람이 너무 오래하고 있으면 눈총 받을 것이고…

-부모님께서는 살아 계신지요. 가족들은…

“아버지는 94년에 74세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91세신데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공소회장도 맡고 있는 동생(김원희씨·56)이 모시고 있습니다. 형님은 서울 계시고, 제수씨(정옥순씨·51)의 오빠가 정충일 신부(65·청주 수곡동성당)지요.”

-집안에 천주교 성직자가 여러분 계시죠?

“고향인 진천군 이월면 신계리 점말이 천주교 박해 때 옹기구우며 하느님을 믿던 곳입니다. 배티성지 하고는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저도 조부모님부터 신자였지요. 삼촌은 재작년 청주 흥덕성당에서 퇴임하신 김병철(71) 신부님, 그 분 바로 밑 동생분이 충주교현동성당의 김유철(67) 신부님이지요. 친고모인 김순예(70) 루시아는 수녀로 계시다 70년에 돌아 가셨고, 외고모인 김방지거 수녀님은 80이 넘었지만 명동 바오로 수녀원에 계십니다. 고향의 공소엔 할아버지, 아버지, 작은 아버지, 동생까지 모두 대 물림으로 회장을 지냈지요.”

-미국에서 돌아와 봉명동 성당에 계실 때, 요즘 젊은이들의 ‘번개 팅’처럼 신도들을 버스 2대로 싣고 고향에 가서 보리밥 대접을 한 것을 지금도 회상하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89년도 쯤 일 텐데, 그땐 부모님이 다 계셨었지요. ‘가는 곳 묻지 말고 보리밥 점심 생각 있는 분들은 버스에 타시라’했더니 70여명이 타셨어요. 고향집엔 미리 부탁해 놓았고, 열무김치와 보리밥과 고추장 된장으로 멍석 깔아 놓고 동네잔치를 했더니 여러분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것 같습니다.”

-고향이나 어린 시절에 관한 기억이 유독 많으실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워낙 하늘만 빠꼼한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지요.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기차 보다 비행기를 먼저 보고’살았으니, 누구보다 일찍 첨단문화를 누리고 살았다고 말 합니다.”

-이곳 식구는 많이 늘었지요?

“시설 수용인원이 270명, 이들을 위한 직원들이 130명 있습니다. 2대 1정도 비율이지요.”

-130명이 모두 상근 직원인가요?

“24시간을 3교대로 운영합니다. 낮, 밤, 휴무 이렇게 돌지요.

-인력이나 운영예산이 부족하지는 않습니까?

“표현이 어렵네요. 인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 운영자금은 나라에서 주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다행히 직원 중에 천주교 신자들이 많고, 각 본당에서 몸으로 해주는 봉사도 많습니다. 봉사자들이 하루에 60~70명씩은 오니까 각 부서마다 업무처리도 무난합니다. 주방일도,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도 방문자들의 헌신적인 봉사가 큰 힘이 되지요. 물질적으로도 성탄 때나 명절 때 십시일반으로 도와주고 있어 고맙지요. 25개 정도의 본당에서 돌아가며 도와주시는 것이 우리에겐 더 없는 후원이지요.”

-원내 수용자들은 이 곳 생활에서 장애가 극복되거나 향상은 되는지요.

“장애인을 농아, 맹인 등 15종류로 나눕니다. 우리 아이들은 지능지수(IQ)가 적은 지적 장애인입니다. 70이하의 아이큐지요. 그러니까 인력은 넉넉해도 투자한 시간과 정열에 비해 효과에 대한 보람을 못 느껴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이 한심스러운 게 많지요. 유치부서부터 고 3까지 졸업하면 13년이잖아요. 그 짧지 않은 교육과정을 거쳐도 제 이름 쓰는 아이가 10명 중 3명이 채 안돼요. 나머지는 책 같은 것도 거꾸로 들고 아는 척 합니다. 그리고 제도적인 맹점이 있어요. 여기는 18세, 고등학교 졸업 하는 때 까지가 의무연한 인데 졸업 후 갈 데가 없으니 계속 머무르는 것이고, 머무르니 밥만 먹일 수 없어서 하루 스케줄을 짜 주는 것이지요. 고등학교 특수교육을 하고 나와도 우리는 자격증도 없고 대접도 없지만 알아서 관리할 수밖엔 없습니다. 고졸 졸업생을 교육시키는데, 국가가 자격증도 요구하지 않아요. 더구나 그런 일을 하는데 대한 대접도 없지요. 그렇다고 놀릴 수는 없고, 뭔가 해야 하니 여기 있는 직원들은 ‘대학 교수’들이라며 위로할 수밖엔 없습니다. (자조(自嘲) 섞인 김 신부의 웃음이 허탈해 보인다)

 -이 곳 생활에서 제일 힘든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들도 사람이니 발육도 있고, 욕망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끼리 결혼하면 결과는 어떨지가 뻔한데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입니다. 결혼을 시켜줘야 하는 것인지. 또 나이가 들었으나 먹을 곳 잘 곳이 없어 장기간 살고 있는데 나이 어린 ‘힘쟁이’에게 얻어맞으면 달려와서 ‘쟤가 나 때렸다’고 할 때 가서 야단도 못 치겠고, 그동안도 어렵게 사는데 계속 힘으로 눌려 살고 있으니 그런 것 보면 눈물이 나요. 또 하나는 이 곳 들어오는 앞에 자동차 정비공장 때문에 3달이나 고생하고 입원 했었습니다. 여기가 도저히 정비공장이 들어올 곳이 아닌데 허가가 났다고 하니 아이들 아침에 학교 다니고 하는데 사고 나면 어쩔 것이냐고 했습니다. 사장이 자기도 먹고 살아야 한다고 봐달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우리더러 사라고 하는데, 돈이라는 게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주교님도 ‘빚지고 살 수 없잖습니까’라 하시고. 그 터에다 나이들은 아이들만 따로 놀게 하면 힘의 폭력에서는 해방되니 좋을 것 같은데…, 이 아이들 뭘 해 줄래야 해줄 게 없습니다. 무서운 놈 없고, 돈 아쉬운 것 없으니 하고 싶은 거 하다 죽는 게 최고잖아요. 노래하고 싶으면 노래하고, 공차고 싶으면 공차고… 난 그래서 동아리 활동을 강조합니다. 아침에 9시 30분 되면 보건체조하고 에어로빅도 합니다.

-지적장애를 돌보시는 신부님은 지체장애시잖아요. 지적장애와 육체적 장애의 공동생활에서의 느낌은.

“장애는 어떤 장애든 불편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되지요. 남에게 폐를 끼친다는 게 자꾸 마음에 걸려요.”

-좌우명이 있으시면…. 후회하시는 일은 없습니까?

“살아오면서 ‘현실에 만족하라’며 늘 자신에게 뇌입니다. 시골서 태어나 주변의 도움으로 운동(육상)선수도 해 보았고, 하느님의 은혜로 사제의 길에서 일생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분에 넘치는 영광이었습니다. 저는 스스로 ‘턱걸이 신부’라고 말합니다. 학교 다닐 때도 그렇고, 모든 일에서도 좀 부족하여 턱걸이하듯 겨우겨우 맡은 일을 해 왔습니다. 여기 와서도 미안해요. 장애자들에 관해 좀 더 해박한 지식이 있었으면 더 많은 기여를 했을 것인데 자꾸 무식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존경하는 분은…

“정진석 추기경님입니다. 직접 모셔보기도 했고, 신세도 졌습니다. 그분이 워낙 머리 좋고 유명했습니다. 그분은 영어책 번역해 베스트셀러 만들 정도로 천재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은사셨던 그분이 제자들한테 ‘현명한 바보가 돼라’는 말을 해주셨지요. 그 분이 우리 주교님이 되셨지요. 그래서 그때 현명한 바보가 뭐냐고 여쭈었더니 ‘예수님처럼 사는 게 현명한 바보가 아니냐’ 고 하시더군요. 실제로 모시고 살면서도 삶에서 봤지요. 대단한 양반입니다. 나는 욱하는 성격에 일을 저지르면 그분이 수습도 많이 해주셨지요.”

-원장으로가 아니라, 신부님 개인적인 입장에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아까도 말했듯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알맞게 살다 떠났으면 합니다. 70이 가까워지니 말을 함부로 하지 말자는 생각도 했습니다. 죽음을 깔끔하게 맞이하고 싶습니다.”

-원장으로 하시고 싶은 일이 있다면…

“25인승 버스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3000만 원쯤 있어야 한다기에 몇 본당에 강론(성금을 모으기 위한)을 하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성신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봉고차로 나눠다니는 것이 위험해서 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자주 쓰는 표현이 있어요. 남의 덕에 태어나서 남의 덕에 배우고…내가 남한테 준 것 보다 받은 게 많다는 사실을 알고 살면 잔소리가 필요 없다지요. 흔히 우리는 ‘내가 많이 갖고 있고, 주는 줄 알고 폼 잡는데 웃기지 말라’는 말 실감나요. 우리는 받은 것의 100분의 1도 못 준다는 것을 알면 겸손해집니다. 인생은 적자가 아니라 흑자다. 그러니 나는 행복한 사람이고, 그러니 갚아야 되지요. 제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지요.”

-은퇴 하신다면 그 후에는

“글쎄요.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만 신부니 기도하고 미사는 해야지요. 요전에 은퇴하신 분이 그러데요. 법적으로 제재 받을 것은 없다. 그런데 자기가 알아서 자기 몫을 해야 하는 게 은퇴 신부의 의무라고요. 내가 신앙인으로서 기도생활, 아니면 도움이 되는 것, 도와주는 삶은 해야지요. 외진 곳에 신부님 없이 모여 있는 수녀님들에게 가서 미사해주고 하는 것도 좋겠지요. 그때 가면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 운동도 잘하시고 역동적이던 모습과, 이렇게 소외된 이들의 보호자로 열심인 모습을 오래 기억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추위를 무릅쓰고 찾아주신 뜻을 새기겠습니다.”

▶대담·글/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기록/오상우    ▶사진/임동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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