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생애 5년 전 후… 잊지 않고 찾아주는 충북인 감사할 따름”

 

한국전 파병 전투병력 6037명 현재 파악된 생존자 407명뿐
대부분 가난과 질병, 힘든 노후 한국군·한국인 인정 못잊어
15년간 매년 찾아주는 충북도민 하늘의 영광있기를…

△말라세 타셈마 회장은…
△1932년 1월 8일 출생. △에티오피아 정규 육군사관학교(2기)졸업, 소위 임관 △황실 근위대 복무, 중위 승진 △1952년 2월 한국전 참전- 강원금화전선에 투입 △1953년 7월 귀국, 대위 승진 △영국 군사교육차 유학, 귀국 후 소령으로 승진 △1959~1961년 콩고파견 UN군 복무 △귀국 후 국방부군사기술관 △귀국 후 중령 승진 △공수부대~고등장교단장 등 역임 후 대령으로 퇴역 △국영 수출입회사 인력관리 매니저로 16년간 근무 △고아원 등 NGO에서 10년 간 활동 △2000년 이후 지역개발사업위원으로 활약 △2009년 9월 ‘에티오피아 한국전쟁 참전용사회’ 회장으로 선임 △부인 사달레 아소파(61) 여사와의 사이에 3남 3녀(이중 두 딸은 현재 미국거주).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 251-1-011-618-1625.

 지구의 ‘검은 진주’ 아프리카 대륙, 그 대륙의 북동부에 있는 에티오피아의 정식 명칭은 ‘에티오피아 인민민주공화국’(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이다.
지형적으로 보면 북쪽에 에리트레아, 동쪽으로 지부티, 소말리아, 남쪽으로 케냐, 서쪽으로 수단에 접해 있다.
 
 이 나라의 면적은 한반도의 5배 크기(113만3882㎢)인데 아프리카 대륙에서 9번째다. 인구는 8000만명, 수도는 아디스아바바(AddisAbaba)로 400만명이 살고 있다. 국민들의 절반 가까운 45%가 늘 흰 옷이나 천을 두르고 다니는 정교를, 35%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어 곳곳에 잘 가꿔진 교회를 쉽게 볼 수 있다.

 국토의 대부분이 고원지대인데 평균해발이 2000~3000m에 이른다. 수도인 아디스아바바도 해발 2400m에 건설된 도시여서 ‘아프리카는 열대지역’이라는 일반적인 상식을 깨고 ‘선들바람이 부는 초가을 날씨’를 사철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산소가 희박한 고산기후인데다 저지대는 열대기후로 만성적인 가뭄에 시달려 대부분의 국민들이 식수를 확보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진하고 있다. 정치·사회적인 불안까지 겹쳐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한데다 에이즈와 말라리아도 창궐하여 외국인들이 방문을 꺼리고, 주 생산품인 커피·면화·콩 등의 수출도 원활치 못한 실정이다.

 국민소득은 200달러에도 못 미치고 있어 700만명이상의 기아인구에게 연간 100만 t 이상의 식량이 원조되어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나 5000년의 역사와 아프리카 최초의 독립국가요,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문자를 갖고 있다는 국민적인 자부심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국민들답지 않게 자존심이 강한 국민성을 유지시켜주고 있다.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과 지혜겨루기에서 져 그 사이에서 얻은 아들 메넬리크 1세가 에티오피아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하여 이 나라의 제국헌법엔 메넬리크 1세로부터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까지 왕통이 이어지고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시바’는 본래 남아라비아의 나라였으나 홍해를 건너 북 에티오피아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이 ‘시바’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 해 예루살렘에 간 ‘시바의 여왕’은 에티오피아로부터 간 것 이라는 주장을 역사에 담고 있다.

 오늘날 가난과 질병의 대명사처럼 되어있는 에티오피아는 1980년대 초 까지는 비교적 경제성장을 지속했다. 커피의 원산지여서 에티오피아 산 커피는 이 나라 수출의 일등 공신이었다.

 올 해는 ‘한국전쟁’(1950년 6월 25일) 60년이 되는 해다. 해방과 더불어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가 혼란하고 취약하기 이를 데 없었던 대한민국이 ‘준비된’ 김일성의 남침을 막을 힘은 어디에도 없었다. 38선이 뚫리자 수도방위선이 무너지면서 서울이 함락되고, 정부는 부산으로 피란했다. 남한의 관청마다 ‘인공기’가 펄럭였고, 국군의 방어진지는 낙동강까지 후퇴했다. 유엔이 파병을 결의했다. 한국을 지켜 주겠다고 달려온 나라는 16개국. 그 중 한 나라가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라는 낯선 나라였다. 당시 이런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아는 국민은 극히 드물었다. 우리보다 잘 살고, 유엔 가입국으로 극동아시아 작은 나라 ‘코리아’가 위기에 처했으니 전투부대를 파견해 가서 싸워주어야 한다며 자신을 보위하는 근위대 장교들을 중심으로 파병을 결정한 이는 셀라시에 황제였다. 근위대는 에티오피아 정규 육사 출신 1기와 2기 출신의 최정예 장교들이었고, 1진 1300명으로 편성된 한국참전부대는 황제의 명을 받아 한국전선으로 향하는 배에 승선 했다. 에티오피아가 한국에 보낸 6037명의 전투병력 중 제1진이었다. 갈색 피부를 가진 이들은 27일간의 항해 끝에 1951년 5월 12일 한국에 도착해 유엔군의 일원으로 강원도 철원·금화 전선에 투입됐다. 그리고 이들 중 122명이 전사했고, 536명이 부상했다. 국방부 군사연구소가 펴낸 ‘한국전쟁’엔 “에티오피아군은 250회의 전투에서 단 1명의 포로도 없는 용맹한 전투부대”라고 기록하고 있다.

 1953년, 휴전이 되자 낯선 나라의 전선을 지키던 에티오피아군은 전사자들의 관과 함께 귀국한다. 셀라시에 황제는 이들의 귀국을 대대적으로 환영했고, 아디스아바바 한 지역에 ‘코리아 빌리지’(한국마을)를 지정해 주었다.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국가의 명예를 높였으므로 그 공을 기리기 위한 보상이었다. 그러나 이들 참전용사들의 명예와 우대는 1974년 멩기스투 소령의 쿠데타로 반전됐다. 왕권이 무너지고 소련식 공산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전 참전군들의 모든 사회적인 지위가 박탈되고 핍박이 가해졌다. 참전 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산 속으로 숨어들거나 저지대로 도망을 쳐서 목숨을 건졌다. 그렇게 17년이 흘렀다. 반정부 운동이 극렬해지고, 소련의 경제원조가 중단되는 등 위기에 처한 멩기스투는 국외로 탈출했고, 1991년 사회주의 정권은 붕괴됐다. 뿔뿔이 흩어졌던 한국전쟁 참전자들이 다시 아디스아바바로 모여들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거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한국전쟁 때 한국 보다 훨씬 더 잘 살던 에티오피아는 한국전쟁 당시 인 50년대 한국처럼 피폐한 나라가 됐다. 다시 모인 노병들이 1993년 ‘에티오피아 한국전쟁 참전용사회’를 조직했다.

 이들을 돕자고 나선 한국의 첫 손길이 바로 충북인들 이었다. 1996년 5월, 동양일보는 6.25 에티오피아 참전 45주년을 앞두고 에티오피아에 기자를 파견하여 참전용사들의 실상을 취재 보도했다.

 ‘코리아는 우리를 잊어도 우리는 코리아를 잊을 수 없습니다’라는 특집기사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월드비전’과 함께 모은 성금은 9000만원. 이 해 11월, 처음으로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충북방문단’이 아디스아바바를 찾았었다. 그로부터 15년간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사랑의 점심나누기’ 캠페인을 펼쳐 한국을 대표한 충북인의 우정과 보은(報恩)의 성금을 전해 왔다. 그 성금은 참전용사 가족돕기 소득사업장 조성과 ‘코리아 빌리지’ 학교 교실지어주기 등에 쓰여 지고 있다.

 지난 2월 24일, 굴레레 지역에 청소년직업기술학교 교사신축기공식을 갖기 위해 아디스아바바를 찾은 ‘충북방문단’ 10명은 행사에 앞서 ‘참전용사회’를 방문해 준비해 간 선물(손목시계 등)을 전달하고 말라세 타셈마(Melesse Tesema·80)회장 등 새 임원진들과 함께 한국전 60년을 회고하는 자리를 가졌다.

-반갑습니다. 신임회장으로 추대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모이신분들을 보니 모두 새로운 얼굴들인데, 임원진 전원이 교체 됐습니까. 
“그렇습니다. 회장과 부회장은 물론 총무담당. 재무담당 등 30명 정도의 모든 임원진이 쇄신됐습니다. 지난 해 9월의 총회에서지요.”

-93년 이래 회장 한 분이 17년이나 맡아 오시다보니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조직의 활성화를 위한 회원들의 요구였는지요.
“내부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만, 이제 우리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살아있는 동안 해야 될 일들이 많이 있어서…….” (말끝을 흐렸지만, 그동안 조직의 재정적인 운영에 다소 문제가 있었다는 소문이 있다는 현지 한 소식통의 귀띔이 있었음)

-한국전엔 언제 참가 하셨는지요.
“1952년 2월부터 이듬 해 7월까지 15개월간이었습니다. 육사 2기 출신인데 황실 근위대 장교(중위)로 있다가 한국파병 명령을 받았습니다. 서른 살 때지요”

-한국전 참전에 어려움이 많았지요?
“아프리카 사람에게 한국의 겨울은 너무나 추웠습니다. 손가락이 굳어서 총의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몸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지요. 또 여름은 풀숲에 어찌나 모기가 많은지 견디기가 힘들었지요. 적과 대치하고 있는데 모기와 싸우는 일이 더 신경 쓰여 고생이 심했지요. 여름 전쟁이나 겨울전쟁이나 모두 힘들었어요.”

-한국인들이나 한국군에 관한 인상은?
“우리는 유엔군이어서 보급물품이 풍족한데 반해 한국군들은 많이 부족 했어요. 특히 담배는 우리들은 거의 피우지 않는데 한국군은 거의가 피웠지요. 우리가 남는 담배를 갖다 주면 아주 고마워했지요.”

-말이 통하지 않았을 텐데요.
“그렇지 않아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극한상황에서의 말이란 ‘대화’가 아니라 ‘느낌’으로 충분해요. 상대가 목이 마른지, 고마워하는지, 어떤 것이 필요한지…,약간의 시늉만 보아도 다 알아보지요. 서로의 피부 빛깔이 다르거나 문화가 다르다 해도 ‘전우(戰友)’가 되면 오랜 친구처럼 서로에게 익숙해집니다.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을 돕기 위해 이역만리에서 찾아 온 우리들을 대하는 태도가 처음에는 조금 겁을 먹는 듯하다가  곧 다정해지지요. 심지어 우리 부대 내에서 한국의 처녀와 사랑을 나누다 아기를 낳은 로맨스가 요즘 에티오피아 텔레비전에서 나와 화제가 됐습니다.”

-어떤 내용인가요?
“전우 중 아토 아새파 데미시(74·당시 무전병)씨가 금화주둔지 인근의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때 낳은 아들이 잘돼서 얼마 전 에티오피아를 찾아와 한국전쟁 때 금화지구전투에 참가했던 아버지를 찾는다고 방송 했어요. 마침 우리와 함께 일하는(참전용사회 임원으로)친구여서 쉽게 만났지요. 60년이 흘러간 한국전쟁의 추억과 감동을 우리가 함께 느꼈지요.”

-한국전선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면…
“많아서 다 열거하기가 힘들어요. 가장 잊히지 않는 것은, 북한군과 백병전을 치렀을 때였어요. 한국군과 우리 에티오피아군 부상병들이 5명 정도가 비틀대며 진지 쪽으로 오고 있는데 에티오피아군 1명이 쫓아가 한국군부상병을 부축해 오다가 적탄에 맞아 함께 쓰러졌습니다. 양편이 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흙먼지로 앞을 분간할 수 없다가 잠시 후 살펴보니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죽었는데 서로 흘린 피가 서로의 몸에 엉겨 있더군요. 그때 바로 눈앞에서 보여준 양국 간의 전우애와 피가 엉겨 있는 것을 본 순간 ‘혈맹(血盟)’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지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끔직한 기억이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같이 ‘아름다운 전선의 한 장면’이란 얼마나 값진 것입니까. 지금도 가끔씩 그 장면만 떠올리면 한국과 우리의 관계란 떼어 놓을 수 없는 소중한 인연의 역사지요.”

-잊혀지지 않는 기억 중 한 가지만 더 말씀하신다면….
“우리 부대에서 오고 갈 데가 없는 한국 전쟁고아 꼬마 한 명을 데려다 키웠어요. 4~5세쯤 된 사내아이인데 ‘선타이 유’라는 이름(에티오피아 말로 ‘많은 것을 본다’는 뜻)을 붙여줬지요. 부대원들의 마스코트였지요. 부대원들은 바뀌어도 부대는 남아있었으니 그 아이는 계속 부대와 함께 있었지요. 후에 들어보니 그가 잘 자라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됐는데 경제적으로 부자가 됐답니다. 전우 한 사람이 한국에 갔을 때 만났는데 몹시 반가워하고 경제적인 도움도 주더래요. 지금도 그 꼬마의 귀여운 모습이 눈에 선해요.”

-한국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참전할 생각이 있습니까?
“한국의 현재 상황은 전쟁이 일어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지난 60년 동안 상상을 뛰어넘는 변화를 가져왔으므로 전쟁의 가능성은 없을 것 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상을 뒤엎고 남북이 다시 전쟁을 치르게 된다면 나는 기꺼이 다시 한국의 전선에 달려 갈 것입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한국전선에서 밤을 밝히고 피를 흘리며 전선에서 죽어간 전우들의 넋을 생각하는 참전용사라면 모두 같을 것입니다. 그래요. 한 숨에 달려가지요.”

-한국에 간다면 어디를 보고 싶은지요.
“내가 젊은 목숨을 걸고 전투를 치열하게 했던 강원도 금화지구를 가보고 싶습니다. 가서 카멜 힐(낙타봉) 358고지와 407고지를 둘러보며 한국전의 추억을 되살리고 싶어요. 추위와 더위와 모기에 시달렸던 한국전선의 추억이 그리워지는 것은 이제 나도 많이 늙어서일 것입니다.”

-28년간의 군 생활을 대령으로 마감하셨는데 그동안 받은 훈장은 얼마나 되는지요.
“24개입니다. 기장이나 기념메달은 빼 놓고도.”

-한국전에 참전 했던 6000여명의 전투원들이 이제는 얼마나 생존해 있는지요.
“지난해 말경에 내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할 수 있는데 까진 수소문하여 조사해 보았더니 407명이 생존해 있어요. 그 중 상당수는 하루하루를 먹고 살기도 힘든 ‘극빈자’들이예요. 몸은 늙고, 가족들의 일자리는 없고, 정부는 가난하여 챙겨주지 못하고…, 남의 나라를 돕겠다고 피 흘려 싸우고 와서는 한국을 도왔다고 쫓겨 다니며 피해 살아야하고…, 그러다 돈을 벌어야하는 청·장년 시절을 다 보낸 셈이지요. 나는 어떻게 하든 이들을 돕는 일로 남은 여생을 바치려고 해요. 이것이 참전용사회장의 역할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들에게, 특히 충북인들에게 전하실 말씀이 있다면…
“코리아의 한쪽은 자랑스럽고, 한쪽은 마음이 아파요. 이념이나 사상이 무엇이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존엄한 인간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지 생각할수록 정치 권력자들이 증오스러워요. 그러나 우리와 인연이 깊은 ‘사우스 코리아’의 발전과 영광에 큰 위안을 갖습니다. 부디 우리를 잊지 말아줘요. 지금 우리가 좀 불행하고 살기가 힘들어 한다 해도 우리는 60년이나 된 혈맹이잖아요? 참전용사들이 살날들은 많아야 5년 전 후일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우리를 잊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끊임없이 참전용사회를 위해 애를 써 주시는 충청북도 도민들에게 하늘의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염치없는 부탁을 드린다면, 현재 한 교회 지하창고에 참전 전사자의 관(棺) 122개가 반세기가 넘도록 방치돼 있습니다.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묘지를 조성하는데 우리의 힘이 부족합니다. 힘닿는 데 까지 도와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더욱 건강하시고, 많은 일 하십시오. 말씀 꼭 전하겠습니다. 다시 뵙겠습니다.
                
 ▶대담·글/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사진/곽한수<사진작가· CF스튜디오 대표>
 ▶통역/이명신 월드비전한국 해외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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