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사건’60년 - 이젠 증오·분노 앙금 털어내
영화 ‘작은 연못’ 개봉 임박… 연말께 역사공원 준공

 

 

정은용  (鄭殷溶) 회장은 …

△1923년 4월 13일 충북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144 출생 △영동공립보통학교(현 영동초)-영동중-서울 철도조사원양성소 전신과 졸(1941) △경성철도국 통신구 전신계 근무(1941) △전문학교입학자격 검정시험 합격(1942) △경찰간부시험 합격. 경위로 경찰입문(1948) △중앙대법문학부 2학년 때인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중앙대 법정대 법학과 졸(1953) △충남경찰국 공보주임·감찰주임(1954-56) △반공연맹충남도지부 총무과장(1968) △노근리미군양민학살사건대책위원회 위원장(1994) △노근리사건희생자유족회 회장(2006) △미국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상(1999)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인권상(1999) △동양일보 선정 ‘올해의 인물’(1999) △대전시 서구 가수원동797-7 ☏ 042-541-6881.

 

한 맺힌 역사의 응어리 ‘노근리 사건’의 현장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60년간을 사건의 중심에서 ‘진상의 검증’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집념의 생애를 살아온 정은용(88)옹. ‘한국전쟁’ 60년을 맞아 나는 이분을 제일 먼저 만나야 된다는 기자적 소명감으로 뵙기를 청했다. 6.25를 꼭 3개월 앞 둔 3월 25일, 봄비가 내리는 영동역에서 정 옹을 마중하여 함께 노근리 현장을 향했다.

 ‘노근리 사건’은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5일간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철로 일대(서울기점225㎞지점)에서 일어난 미군의 양민학살사건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북괴군 10만 명이 선전포고 없이 북위 38도선을 돌파, 남침을 감행하며 시작된 ‘한국전쟁’. ‘준비된’ 북괴군은 ‘무방비’의 서울을 순식간에 삼키고, 거침없이 남하를 서둘렀다.

남한의 국민들은 정부가 서울을 버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하는 등 수상쩍은 기미를 보이자 공포와 불안으로 밤을 새운다. 곳곳에 피난민의 행렬이 줄을 잇고, 후퇴하던 미육군 ‘딘’ 소장이 7월 초 금산에서 적에게 포로가 되는 등 유엔군 전선도 속수무책으로 후퇴를 거듭했다.

7월23일 정오쯤, 영동읍내 쪽에서 미군지프 한 대가 영동읍 주곡리에 들어와 함께 타고 온 미군 장교와 병사, 한국경찰 간부가 주민들에게 “이 마을이 전쟁터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 마을사람들 모두 피난을 가시오-”라고 주문했다. 군사작전에 따른 주민 소개령(疎開令)을 발동한 것이다. 가뜩이나 겁에 질려 있던 주곡리 100호 300여명의 주민들은 부랴부랴 가족들을 챙겨 24일 이웃마을인 임계리로 피난을 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25일 밤늦게 다시 나타난 미군들은 “안전지대인 남쪽으로 가라” 며 피난을 유도, 두 마을 주민 500여명이 주곡리 앞 4번 국도를 따라 김천 쪽으로 가던 중 하가리 앞에 이르렀을 때 미군병사 5, 6명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고 국도 아래 하천으로 끌어내려져 그들의 감시를 받으며 하천바닥에서 25일 밤을 노숙해야했다.

미군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도무지 영문을 몰랐다. 피난민들은 26일 아침부터 남쪽으로 가기위해 4번 국도를 따라 황간면 서송원리 쯤에 이르자 미군들은 지대가 높은 철로로 행로를 변경토록 지시, 여러 마리의 소와 함께 힘들여 철로에 오르니 정오쯤이 됐다.

노근리 개근철교(쌍굴다리) 근처에 이르자 미군들은 철로위에서 피난민들의 짐을 샅샅이 조사하는 등 시간을 끌다가 정오쯤이 되자 갑자기 나타난 프로펠러 비행기 한 대가 이들을 향해 폭격을 하고 기총소사로 상당수의 피난민들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날 오후 경부철로 위에서의 미군 비행기의 피습으로 사체들을 남긴 채 피난민들은 바로 근처에 있던 개근철교 밑 터널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26일 오후부터 29일까지 개근철교 밑에 숨어있던 주민들은 철교 터널의 양쪽을 향해 4곳에 설치된 미군 기관총 사격으로 상당수가 숨졌다.

26일부터 4일간 미군의 폭격과 기관총사격으로 희생된 주민은 현재 밝혀진 숫자만 226명. 이 중 사망자는 150명이고, 행방불명자 13명, 후유장애자 63명으로 알려진다. 이것이 ‘노근리 사건’의 진상이다.

그러나 미군들이 왜 무고한 양민들을 소개시키고- 피난행렬을 이루게 한 다음-하천바닥에서 노숙케 하고-철로에 올려놓고-비행기를 불러-폭격과 기총소사로-떼죽음을 시도한 것도 모자라-개근철교 밑으로 도망해 들어간 주민들을-4개 방향에 기관총을 거치해 놓은 채-터널 밖으로 나타나기만 하면 사격을 해-사살했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이 지역 주민 중에 ‘불순분자’가 있지도 않았고, 미군의 지시에 저항하거나 이의를 제기한 사람도 없었기에 희생자 유족들은 도저히 ‘떼죽음’을 당할 까닭을 찾지 못한다.

1960년, 이들 희생자유족들은 미국정부(서울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 청구를 시작으로 클린턴 대통령에게 진정서(1994)를 내고 미국정부의 공식사과와 피해보상을 요구한다. 그러나 주한미군 배상사무소장은 “사상자 피해는 미군과 인민군과의 전투과정에서 발생하였으므로 미국은 법률상 책임을 질 수 없음”이라는 회신으로 일관한다. 노근리 미군양민학살사건대책위원회와 영동군의회 등의 진정서 제출 등 연이은 탄원도 한·미 양국의 대통령이나 관계기관은 무반응 일변도였다.

1999년 9월 30일, 미국 AP통신이 한국신문에서 거론하는  노근리 사건의 진상을 보도하기에 이르자 이튿날 클린턴대통령은 진상규명을 지시한다. 그러자 그 이튿날인 10월 2일 김대중 대통령도 진상규명을 지시해 국무조정실장 주관 노근리 진상규명 대책반이 구성된다. 이로부터 ‘노근리 사건’의 진상은 한·미 양국정부의 관심사항으로 부상, 현지답사와 피해자 면담 등으로 증언이 청취되고 비로소 미군의 양민학살의 실체가 확인됐다.

2001년 1월, 클린턴 미대통령은 “1950년 7월 말 노근리에서 생명을 잃은 한국 민간인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추모비건립 및 추모장학기금으로 175만 달러를 내겠다” 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노근리사건피해자대책위는 즉각 미 대통령의 사과 내용이 미흡한 한·미 공동발표내용을 ‘수용거부’한다며 미국법정과 국제사법재판소에  손해배상지급 청구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맞섰다.

2004년 2월, 노근리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공포(3월 3일. 법률 제7175호)됐다. 시행령이 공포(6월29일)되고, 희생자 신고가 접수됐다.

2006년, 그동안 논의돼 오던 노근리 사건 위령사업으로 역사공원(4만평)을 조성키로 하고, 그 기본계획과 기본설계가 확정됐다. 2008년엔 노근리 국제평화학술대회가 열렸고, ‘노근리 평화상’이 제정, 시상식도 가졌다.

참으로 숨 가쁘게 달려온 ‘노근리 사건’ 60년-이 사건의 벼리 역할을 맡았던 정 옹은 거센 파고가 스치고 간 해안처럼 상처는 남아 있으나 시종 조용한 분위기다. 미군의 ‘까닭 모를’ 양민학살에 대한 증오나 의혹에서 이제는 ‘인류 평화를 위한 기여’로 그 방향을 틀고 있다.

긴 세월, 가슴 시리게 한 얼음장 밑으로 봄기운이 돌듯이.

 -대전서 영동 노근리를  찾으신 발걸음이 꽤나 잦으셨죠?

“헤아려보면 아마 120여 차례 쯤 될 것입니다.”

-60년간의 통한을 씻어내기란 어려우시겠지만, 그래도 근래 들어 ‘노근리 사건’은 그 진상이 다 드러났고 이에 따른 피해보상이나 명예회복을 위한 여러 방안들이 비교적 잘 진행되고 있지요?

“현재 미국에서 ‘마이클 최’라는 교민 변호사를 통해 피해보상 청구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년 상반기쯤에는 끝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바마 미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고 있지요.”

-사건 현장인 쌍굴 다리가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2003년 6월. 등록문화재 제59호)되기도 하고, 관심을 모으고 있는 역사공원도 공정 70%로 순조롭게 진행된다니 반갑습니다. 올 해 안에 준공이 되겠지요. 그동안 힘든 일이 많았겠으나 감동적인 일도 있었을 텐데요.

“미 육군 감찰관 일행이 마을에 찾아와서 양해찬(70·영동읍 임계리. 포도농사)씨 등 살아있는 부상자들이나 희생자 가족들을 일일이 만나 증언을 들었는데, 그들의 태도가 어찌나 진지했는지 감동적이었어요. 그리고 5~6년 전에 알게 된  일본 게이오대학 교수였던 마쓰무라 다까오(75·松村高雄)씨가 주선하여 일본의 ‘악마의 포식’이란 합창단원 300명이 지난 해 7월 내한하여 위령제때 공연해 주었어요. 생각도 못했던 감동적인 우정출연이었습니다.”

-정 회장님이 하시는 일에 뒷바라지를 제일 열심히 한 분들 중 자제분들의 역할이 크다고 들었습니다.

“서울 사는 큰 애(구도·55·전 광운대 교수)와 대전에서 의사를 하는 둘째(구혁·52·대전둔산동 복음내과 원장), 문경에서 건축업을 하는 셋째(구열·49)가 발로 뛰고 재정적인 뒷바라지도 하고, 효자들이지요. 오늘까지의 어떤 성과가 있었다면 유족회사람들과 가족들의 신뢰와 협조 때문이죠.”

-노근리 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 ‘작은 연못’이 만들어 졌다고 들었습니다.

“지난 18일 시사회에 초대 돼 보았습니다. 전쟁 휴먼 드라마인데 제가 쓴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와 최상훈. 찰스 J 헨리. 마사 맨도자 3인이 공동 집필한 ‘노근리 다리’를 원작으로 감독을 맡은 이상우씨가  각본을 썼습니다. 2003년부터 7년간에 걸쳐 제작됐다는데 제작비는 10억원이 들었답니다.”

-영화 제목이 ‘작은 연못’이지요? 가수 김민기씨의 노래 제목을 쓴 이유는 있는지요.

“깊은 내용은 모르겠는데, 제목이 좀 마음에 와 닿지 않아요. 노근리 사건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아요. 문성근. 강신일. 이대연 등 142명의 배우가 나오고, 지난 해 부산국제영화제 갈라프리젠테이션 초청작이기도 합니다. 4월 말쯤엔 개봉될 듯합니다.”

-정 회장님의 희생된 가족은…

“그 당시 5세 된 큰 아들 구필이와 2살짜리 큰 딸이 쌍굴 근처와 입구에서 기관총에 맞아 죽었지요. 어머니(박희문·당시 53세)는 기관총알에 어깨에 뼈가 보일 정도의 상처를, 아내(박선용·84세)는 폭격 때 파편이 팔꿈치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고요. (당시를 회상하는 정 회장의 노안에 물기가 어렸다)그런데 이상한 일은 쌍굴 속에서 부상자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미군 위생병이 와서 치료를 해 주는 거예요. 굴 밖에만 나서면 기관총을 쏘아 사람을 죽이는 미군들이 어쩌자고 위생병을 보내 치료는 해 주는지 퍽 혼란스러웠어요. 내 소설에서도 썼지만, 미군의 ‘두 얼굴’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위생병이 이쪽의 정황을 살피러 왔던 것이 아니겠느냐는 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노근리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등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 1999년 9월 AP통신에서 보도한 직후 미 국민들의 여론이 거세지면서 그동안 미온적이던 한국정부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희생자유족회의 일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50년간 속 태우던 일들이 10년간에 변화무쌍하게 이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전환과 변화의 중심엔 언제나 정 회장님이 계셨지요. 그런데 아직도 의문스러운 것은 그 같은 미군들의 양민 학살극이 왜 빚어졌는가 입니다. 군사작전도 아니고, 전선이 형성된 지역도 아니었는데…

“글쎄, 그 문제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공개된 비밀문서엔 작전일지이외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아요. 지금도 그 의문이 풀리지 않습니다.”

-미군에 대한 증오심도 아직 풀릴 수 없겠지요.

“그렇지는 않아요. 난 사건이 일어난 후 10년쯤부터 용서와 화해의 마음을 갖기로 했어요. 증오심이란 것이 생각보다 사람을 해쳐요. 마음과 몸을 형편없이 만들어요. 그리고 그 증오심은 다양한 상상력이나 꿈과 희망을 좀 먹듯 해요. 그래서 ‘이래선 아니 되겠다’며 증오. 분노. 비통함 등 모든 앙금을 떨쳐내려 마음먹었지요. 그리고 생각했어요. 인류의 평화를 위해 나와 우리 유족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가족을 잃은 슬픔이야 어찌할 수 없다 해도 살아있는 자들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많은 것을 깨달았지요.”

-그 중 우선하는 일은 어떤 것인지요.

“이 역사공원을 완공하는 일이지요. 191억원이 들어가는데 31억원이 모자라요. 그러나 어떻게 하든 될 것이라 믿어요. 올 11월쯤 준공이 되면, 올 해 유보해두고 있는 위령제와 역사공원 준공기념 행사를 대대적으로 하고 싶어요. 올 해는 6.25한국전쟁도 60주년이 되는 해고, 노근리 사건도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할 일은 많이 남아 있어요. 유족회 쪽에서는 클린턴 미 대통령의 ‘유감표명’이 미흡하다는 생각이지요. 또 보상비로 내놓은 추모비 100만달러와 장학금 75만달러가 노근리 사건 희생자 유족회에만 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 피해자 전체에게 주는 것으로 단서가 붙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거절했어요. 미국의 진정한 사과와 적절한 손해배상을 해 줘야 일단락 돼요. 앞에서 말했듯 미국에서 법적으로 소송을 벌이고 있지요. 그리고 역사공원이 완공되면 청소년들의 수련 시설도 들어서게 되는데 그 운용이 신경 써 집니다. 노근리 사건을 통해 한국전쟁의 교훈을 되새기고, 세계평화를 위한 우리의 신념을 심어주는 훌륭한 교육장이 돼야 할 것인데…”.

-전문가들의 자문과 열정이 있는 사람들의 협력을 받으시면 될 것입니다. 적어도 이 곳 수련관을 거치면 어떤 것 하나는 확실히 달라진다는 것을 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언론에서 힘을 보태 주셨으면 합니다. 일이란 것이 하나가 끝나면 다른 하나가 새로운 고민을 하게 하지요.” (쌍굴다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노근리 철로- 주곡리가 보이는 4번 국도상 차 안에서 정 회장의 현재 심경을 물었다)

-이 곳이 사건 현장이군요. 60년 전과는 풍경이 많이 달라졌지요?

“그럼요. 국도변 풍경이나 마을 풍경이 모두 달라졌지요. 그러나 아무리 풍경이 달라졌어도 이곳을 지날 때마다 옛날 동네에 들어왔던 미군 지프며 피난민 행렬부터 철로에서 폭격으로 사지가 찢겨 죽어가던 동네 사람들의 비명소리, 기관총의 연발 총성과 피난민 행렬 등 너무나 생생한 장면들이 늘 떠올라 괴롭히지요. 90이 내일인 나이인데도, 60년이 지난 일인데도 도저히 잊혀지지 않아요. 그러나 그동안 한 일들로 보람도 컸어요. 일생을 매달린 일들이어서인지 애착도 커요. 많은 분들에게 고맙고요. 참 많이들 도와 주셨지요.”

-건강하셔야 역사공원 청소년수련원에서 좋은 교육을 받는 젊은이들을 오래 만나실 수 있으시지요. 장시간 시간 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렇게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뵙겠습니다.” (이날 대담에는 사단법인 노근리사건희생자유족회 배수용(67) 사무처장이 시종 배석했다. 그는 노근리 사건 당시 세 살짜리 동생을 잃었다.)

                 

 ▶대담·글/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사진·기록/오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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