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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월드비전 박 종 삼 회장
한국월드비전 박 종 삼 회장
  • 동양일보
  • 승인 2010.07.19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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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박종삼 朴宗三 회장은...

 △1936년 10월 1일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 출생 △중학교 2년 때인 14세에 한국전쟁이 나자 월남-한영고-서울대 치과대학(1960) △장로교 신학대(1962) △광주기독교병원 레지던트과정 수료(1967) △미국 Princeton Theological Siniminary(신학석사·1968) △미국 Virginia Commonwealth University(사회사업학 석사,1970) △미국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사회사업학 박사·1975) △한국사회사업(사회복지)대학협의회장(1984) △한국사회복지학회장(1996) △숭실대사회사업학과 교수(1979-2001) △서울 덕수교회 목사(1998-현재) △사회복지법인 월드비전 회장(2003-현재) △세계사회복지협회 동북아시아지역 회장(2004-현재)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 △세계사회복지협의회 중앙운영위원. 한국사회복지협의회 부회장(2008-현재) △저서-‘신앙의 눈으로 본 학문’(1998·공저), ‘교회사회봉사 이해와 실천, 인간과 복지’(2002), ‘사회복지학 개론’(2002)△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24-2·월드비전 ☏02-2078-7011.

 박종삼 회장은 언뜻 보면 마음 착한 이웃 할아버지다. 조금 자세히 보면 168㎝의 키에 체중 89㎏의 비만형 노老신사다. 함께 이야길 나누다 보면 전 생애를 하나님과 함께한 기독교인이요, 학문적인 토대를 다진 사회사업가다. 몇 번 만나다보면 연령·성별·지역성·국적… 어떤 경계도 훌쩍 뛰어 넘는 식견과 넉넉함을 지녔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천진한 70대 소년’같다. 이력을 보면 제대로 배운 치과 의사인데 틀니를 해서 음식 맛을 반은 모른 단다. ‘웃는 얼굴’이 아닌 얼굴을 여간해 보이지 않아 평화롭거나 행복한 표정으로 일관하지만, “몸이 아플 땐 난감 하더라”라고 실토하는 ‘총각 할아버지’다. 국제회의와 구호관련 현장을 살펴야 하는 직무상 연중 3개월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야하는 ‘즐겁고도 보람 있는 고행’을 8년째 반복하면서도 ‘하나님의 쓰임’에 만족해하는 현역 목사다. ‘한국 월드비전 회장’은 전 세계 100여개 국에서 4만 여명의 직원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1억명의 가난하거나 불행한 사람들을 돕고 있는 세계 최대 기독교 국제구호개발옹호기구인 ‘월드비전’의 단순한 한 지역 책임자가 아니다. 월드비전의 태생지가 바로 한국이기 때문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의 선교사 밥 피어스(Bop Fierce)목사는 잡지사 종군기자 자격으로 한국전쟁터에 달려 왔다. 전쟁은 비참했다. 굶어 죽어가는 어린이들과 미망인들의 참담함을 목격한 그는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사무실을 열고 전쟁고아들과 미망인들을 돕기 위해 모금활동을 펼쳤고, 9월엔 한국의 한경직 목사 등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한국 선명회(현재의 월드비전)를 설립해 구호사업에 나섰다. 이것이 월드비전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한국은 월드비전이라는 세계 거대 봉사 기구의 모태母胎인 셈이다. 더구나 한국은 전 세계 월드비전 회원국 중 가장 성공적으로 수혜국受惠國에서 후원국後援國으로 전환한 나라여서 더욱 눈길을 끌고 있다. 한국의 월드비전은 국내 4만여명의 어린이와 전 세계 48개국 191개 사업장에서 22만 여명의 어린이들과 그들이 사는 마을을 돕고 있다. 국내 NGO중 WFP (UN산하에 있는 세계식량기구)와 직접 식량구호사업을 체결한 유일한 구호단체로 성장했다. 북한에 국수공장과 북한농업연구소를 설립해 굶주리는 동포 돕기도 계속하고 있다. 이 한국 월드비전의 다양하고 열정적인 봉사의 총괄 지휘탑이 박 회장이다. 치과의사이자 목사이자 교수이자 사회사업가인 그 박 회장이 15일 동양일보를 방문했다. 결식학생들과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도와 한국마을에 학교 건립 등 지원사업을 계속하고 있는 동양일보와 청주방송. 월드비전충북지부와 함께 펼쳐온 ‘사랑의 점심나누기’사은행사 (이날 오후 7시 청주예술의 전당)참석차 청주에 오는 길이었다.

-청주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루하시진 않으시던가요?

“청주까지 오는 도로 양 편의 풍경들이 아주 좋아서 기분 좋게 왔어요.”

-고향이 황해도 신천이시던데, 풍골이 좋으신 것을 보면 부잣집에서 태어나셨나요?

“그저 먹고 살만은 했어요. 고향에서 초등학교 나오고 중학교 2학년 때 전쟁이 나자 시골을 벗어날 수 있으리란 생각으로 뛰쳐나왔지요. 그런데 막상 나와 보니 배는 고프고 몸 둘 곳은 없고… 고생 많이 했지요. 50년도에 와서 51년도에 국군 따라서 고향 간다 했다가 한강서 막힌 거예요. 그러니 영등포 빈집에 살면서 인천부두에서 일했어요. 말을 들으니 미군부대에 잡혀가면 살 수 있다는 거예요. 영등포서 미군부대 트럭이 와서 잡혀가야 돼요. 잡아가라고 거리에 나서는 거예요. 15~16살 때지요. 잡혀가서 미군부대로 가는 거예요. 미군부대서 노무자로 3년 정도 돌아다녔지요. 의정부에 있는 미군부대 공병대였어요. 그랬는데 미군이 철수했잖아요. 그러니 올 데 갈 데가 없어져요. 다시 서울로 돌아와야 됐어요. 미군에서 번 돈을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 다 줬어요. 나는 고향으로 간다고 확신하고 다 준건데 그 다음에 종전되고, 그러고 서울로 다시 왔지요. 빈 손이었지요.”

-서울대 치과대를 들어가셨는데, 고향 떠나신 후 밥걱정으로 일관 하셨을 텐데 공부는 어떻게 하셨는지 궁굼 하더군요.

“여기(남한)와서 어떻게 하든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지요. 공부하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고. ‘빽’이 없으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시험 봐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우리 집안에서는 어려서부터 공부가 제일 중요하다고 가르쳐줬었어요. 또 기독교를 믿고 있었지요. 흔들릴 때도 하나님 계신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나오자마자 학교를 찾아다닌 거예요. 내 나이는 벌써 고 1, 2학년이 돼야 하거든요. 그런데 중 2때 북한서 나온 학력이어서 좋은 데는 실력 없어서 안 되고, 한영고에 갔어요. 거기 선생님이 나를 딱하게 생각하며 공부하고 싶냐고 해서 당연히 하겠다고 하고 2학년에 편입했어요. 집도 없으니 친구의 도움으로 서대문 독립문 옆 땅굴에서 살았어요. 매일 서대문서 왕십리까지 걸어 다녔어요. 거리상으로는 한 시간 넘게 다녔어요. 한 6km 될 거예요. 그 때 2학년 중간에 들어왔는데 졸업은 수석으로 했어요.”

-공부를 열심히 하신 것인가요? 머리가 좋으신 것인가요.

“머리도 나쁘지 않았고, 노력도 열심히 한 것 같습니다. 그때 학교 선생님들이 땅굴에 산다는 것을 알게 돼서 가정교사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했어요. 학교 선생님이 서울대 치과대를 시험 치라고 해서 2등인가 3등으로 들어갔어요. 두서너 달 준비해서 갔지요. 그때는 4년제였어요.”

- 학교 시절 애틋한 사연의 러브 스토리는 없으셨는지요. 혹 젊은 시절의 어떤 사연 때문에 아직껏 ‘70대 총각’을 고집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연애 할 시간이 없었어요. 따르는 여자애들은 있었는데 교회 다녀서 죄 짓는 것 같아 안 되고, 치과대는 의대와 똑같아 공부하느라 한눈을 팔 시간이 없었어요. 미국에서의 생활도 워낙 바쁘게 살다보니 로맨스 만들고 뭐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세월이 가고… 그런데 무슨 불편함이랄까 절실함이랄까 그런 것이 없었어요. 오히려 살아오면서 나 혼자여서 외롭다거나 하는 것 보다는 어떤 일을 생각한대로 할 수 있어서, 방해 받거나 신경써야하는 번거로움이 없어서 결단이 편했고, 생각한 것을 즉시 행동에 옮길 수 있어서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국에서 공부를 많이 하셨지요?

“공부 더 해야겠다고 해서 미국 간 거예요. 갈 때는 미국사람을 알아서 교회 등으로 통해 갔지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는 고생하지 않았어요. 치과의사로, 목사로 자격을 다 갖춰서 갔으니까 장학금도 제대로 나오고 했지요.”

-지금 한국에 오셔서 하시는 일들, 지금 월드비전 회장 맡으신지 8년째신데 어떠신가요. 내가 젊은 시절부터 꿈꿔왔거나 일생에 설계 하셨던 것과 맞는 것인가요? 아니면 노후에 하다 보니 할만 한건가요.

“나는 하나님이 왜 나를 고생시켰나 생각해 봤어요. 일제시대-공산당-피난-노동자-유학 등 죽 살아온 것을 내 신앙적으로는 외부에서 어떤 뜻이 있어서 나를 훈련시켰다고 해요. 나는 치과의사로 무의촌진료 등 봉사활동도 참 많이 했어요. 사회복지, 신학 다 했지요. 교수로서 교육의 현장과 그 성과에 관해 다 체험하고 교회 돌아다니고 했잖아요. 그래서 월드비전에서 오라고 했어요. 당신이 치과 의사로서 목사로서 사회복지사로서 대학에서 25년 가르쳤는데 그 경험을 주고 가면 어떠냐고 하데요. 월드비전에는 목사가, 교회, 사회복지사 박사가 다 필요하다고 해요. 또 외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거예요. 국제적인 기구니까요. 다음에 국내에서 정부하고 대립되지 않고 사회 복지계나 의학계에 관련한 사람이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당신이라는 거예요. 오재식 회장과 박종식 이사가 발견한 거예요. 처음 못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소위원회에서 못한다 했는데 사실 위협을 가했어요. 지금과 같은 지식과 경험, 가치관을 갖고 낼 모래 죽게 되면 다 화장 할 것이냐? 어차피 어려운데 그거 다 주고 가면 좋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당신은 다 준비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회장직 맡았어요.”

-말씀 듣다보니, 맞춤 월드비전 회장이시군요.(웃음) 그래서 연임을 하실 수밖에 없으셨겠군요.

“이사회에서는 당신이 후계자를 못 키웠으니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거예요. 정관도 바꿔서 내년까지 해요.”

-아무래도 궁금합니다. 아까 말씀을 하셨지만, 지금까지 독신으로 살아오신 확실한 이유를 알고 싶은데요.

“특별한 까닭은, 이웃-남을 도와야 한다, 고향사람들은 아직도 가난과 굴종의 굴레를 못 벗고 있는데 나는 피난 와서 행복을 누리고 있지 않나. 공부를 자꾸 하니까 치과의학하고, 신학은 하고 싶어 한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 돕다보니 해야겠다 한 것이지요. 구름 잡는 말로 하나님이 도와준다 하면서 사회복지 공부해야 되지요. 이와 같이 연결 되면서 공부하고 일할 것은 자꾸 많아졌어요. 사실 그러니 30대, 40대에 혼기가 어느새 지나갔어요. 일하는 사이 어느 사이에….”

-그 사이 흠모하던 여성은 없으셨나요?

“어느 때는 저 여성이 참 잘 생겼다 생각은 했으나, 내가 그런 말을 겉으로 하지 않았고, 옆에서 치과 열어주겠다 하면서 자기들이 다 알아서 결혼 시키려고 했던 적이 수십 번 있었어요. 따르던 여자도 많았고, 그런데 일을 벌이니까. 가난한 사람 위해 일 해야 하니까. 35세 지나서는 부랑아-깡패들 돕는 일 하면서 내가 결혼하면 이 애들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생각했어요. 결혼 한다면 와이프에게도, 아이에게도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혼자 사시면서 느끼시는 행복과 불행은 어떤 것인가요. 행복은 자유를 누리는 것 때문인가요?

“혼자 살면서 행복은 내 신앙대로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가톨릭 수녀님이나 신부님하고 같아요. 언제든 하고 싶은 일은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나로서는 상당히 의미를 가져요.”

-그런 것은 좋은 점이고, 반면에 좀 안타깝다. 내가 결혼 했더라면 하는 때는요.

“가족이 없다보니 아플 때. 허리를 다쳤는데 일어나질 못해요. 난감 하더라고요. 내가 혼자 살려고 결심했을 때 가톨릭 신부들과 상담 많이 했어요. 가톨릭은 공동체가 있지만 개신교는 돌봐 주는 데가 없으니 혼자 살지 말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타인에게 아버지가 되고, 학생들 가르치면서 제자에게 더 사랑을 주지요. 이웃이 다 가족이 되지요. 결혼 한 것 보다 더 많은 가족을 느끼며 살아요. 혼자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결심할 때는 다 감안했지요. 크게 후회는 안하는데, 아플 때 누가 약 갖다 주지 않는 건 어렵네요.”

-군중 속에서도 느끼는 것이겠지만, 혼자 사는 데 따른 고독은 참을 만하신지요.

“혼자 살아서 가슴이 아픈 고독은 한 번도 없어요. 내 속에 직계 가족은 없지만 미국과 한국에 다 가정이 되어 주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아요. 지금 미국 가도 엉클 샘 이예요. 오늘 아침에도 메일이 왔는데 ‘왜 안 오냐’고 찾기도 해요. 혼자 살아도 머릿속에 다 있거든요. 그리운 사람들 사진, 비디오 다 있어요. 외로우면 전화 하면 되잖아요. 요새는 인터넷도 있고요. 외롭다는 아픔은 없는데 몸이 아플 때는 외로움을 느껴요. 자고 일어나면 조용하잖아요. 저녁에는 라디오를 켰었는데 요샌 안틀어요, 4개의 벽이 귀신과 같이 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어요. 나 혼자가 됐구나, 어렵구나 하는 때도 있지만 옆에 친구들이 있잖아요. 60대 넘어서는 다른 사람보다 화려하게 사는 것 같아요. 일이, 마음에 맞는 일이 많아서 그런가 봐요.”

-애장품은?

“책이지요. 책들하고, 살아오면서 나에게 형님이 되고 아저씨, 아버지가 되어준 사람들이 준 책 이라든가 작은 선물 같은 것 이지요. 또 월드비전 회장 되고서 3분의1은 외국 다니면서 마그네틱 붙여놓는 것, 이것이 내가 도와야 될 세계라는 거예요.”

-좌우명은?.

“너무 흔한 것.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나님 믿고 예수 사랑하자. 하나님보다 사실 인간 중심 이예요. 내 이웃 도우라. 그게 성경의 진리거든요. 역시 내게는 옆에 있는 사람들. 옆에서 ‘회장님 어떠셔요’ 라고 물어주는 이들을 보면 내 아들 동생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내 삶의 현재는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것 다 가진 것 이예요. 외로움, 자식 없는 거 극복했고, 가난도 극복했고, 지식 등도 어디 나와도 말 할 수 있어요. 또 월드비전 직원들 자랑스러워요.”

-지금이라도 시간, 능력 있으면 더 하고 싶은 일은 있는지요.

“지금도 사실 공부를 조금 더 하고 싶어요. 인류학 같은 것 하고 싶고, 예술적인 재능을 개발을 못했어요. 그러니까 그림이라든가 글 쓰는 것들을 하고 싶은 생각은 있는데 시간이 없어요. 은퇴하면 미국이든지 객원교수로 가서 공부하고 싶은 분야 가고 글 써서 후배들에게 나눔의 생활 하는 것 좀 했으면 싶어요.”

-실례가 되는 말씀이지만,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에 빠진 것 보다는 노후를 잘 뒷바라지 해주겠다는 어떤 여성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결혼 하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그런 것은 없어요. 옆에 누가 있으면 오히려 불편해요. 일생이 혼자라 누가 옆에 있으면 그래요. 지금까지 혼자 살면서 젤 힘든 게 왜 장가 안 갔냐는 질문, 소개해주겠다는 것 등이었어요”

- 75년 사시는 동안 잊혀 지지 않는 한 사람을 꼽는다면?

“잊혀 지지 않는 사람이라기엔 좀 그렇지만, 광주에 강기봉이라고 치과대 같이 다닌 친구가 있지요. 그 집에서 형제처럼 했어요. 한 식구나 다름없어요.”

-모든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 이 세상에 소중한 게 많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람 생명입니다. 생명이 죽지 않게 같이 나눕시다. 모금募金 등을 해서요. 이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21세기 문명 속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 가치는 평화롭고 균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 이예요. 생명나눔운동은 종족, 종교 등을 초월한 인간이 하나 되는 세상의 출발점이지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대담·글/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정리 /오상우 ·사진/ 임동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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