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게 희생된 당신의 이름이 역사에 되살아난다

▲ 답사단이 하바로프스크 시립공동묘지에 세워진 시비(詩碑·누워있는 돌)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 시비는 1930년대 후반 스탈린 정권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영혼들을 달래주는, 레퀴엠과 같은 것이다.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포석 생의 마지막 ‘비극적 종착역’이었던 KGB 하바로프스크 본부를 찾는 것으로 포석 선생의 삶을 좇아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륙성촌, 하바로프스크 등 러시아 연해주 일대를 샅샅이 뒤진 답사단의 여정이 대부분 마무리 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억울한 영혼들이 아직까지 한을 온전히 풀지 못한 채 구천에서 헤매는 곳, 하바로프스크 시립공동묘지를 찾아간다. 레퀴엠(requiem·진혼곡)이라도 들려주어야 할 그 곳은 포석의 마지막 안식처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엔 다소 민망한 구석이 있는 것이, 그 곳엔 포석의 유해가 없기 때문이다. KGB 하바로프스크 본부에서 총살형을 당한 포석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버려졌기 때문이었다. 비단 포석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곳에 버려졌었다.

 

공동묘지는 답사단이 하바로프스크 공항에서 시내로 나왔던 길을 되짚어가는 곳 오른편에 있었다.

답사단은 묘지 입구에서 꽃을 샀다.

하양, 빨강, 노랑, 분홍… 갖가지 색의 장미가 퍽 예뻤다. 은은한 향기 풍기는 국화도 좋았다. 답사단은 이 꽃 저 꽃 풍성하게 샀다.

조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저는 카네이션을 사겠습니다. 선친께서 살아계실 때 카네이션을 유난히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조철호 단장이 말을 받았다.

“포석 선생에게 카네이션은 의미가 남다른 꽃이에요. 카네이션 꽃말이 ‘당신의 사랑을 믿습니다’, ‘당신을 열렬히 사랑합니다’, ‘나의 애정은 살아있습니다’라는 뜻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과 사랑이기도 하지만, 이 곳에서는 ‘불같은 혁명’이라는 뜻으로 통하기도 한다고 해요. 선생의 삶과 문학이 그야말로 ‘혁명적’인 것임을 살펴보면 선생께 바치는 카네이션이야말로 제대로 된 선택이 아닐까 싶네요.”

꽃값을 내는 것을 두고 유족과 답사단 사이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유족들은 여기까지 찾아와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 꽃값까지 부담 씌울 수는 없다는 것이었고, 답사단은 이국 멀리 이곳까지 와서 포석 선생을 향해 드리는 우리들의 정성을 가로막지는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조 단장이 한 마디로 교통정리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각자 알아서들 사는 걸로.”

 

▲ 비잔틴 양식의 ‘기억 사원’이다. 이 사원은 억울하게 희생된 영혼들을 위한 기도소로, 답사단이 방문했을 때에는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공동묘지에 들어서자 왼편에 아담한 사원이 보인다.

‘기억 사원’이라고 한다. 우수리스크 전시관에서도 빛바랜 사진으로 보았던 비잔틴 양식의 건물로, 지붕이 돔으로 돼있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을 기억하자는 의미인지, 그 이름이 짠하게 다가온다.

1930년대 스탈린에 의하여 처형된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공동묘지 입구에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그 오른편으로 기념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그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됐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고려인 지도자들 4302명이 희생됐다는 게 통설인데, 일각에서는 몇 만명이 희생됐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기야 5.18 광주민주화항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통계 수치도 관에서 발표한 것과 민주화단체에서 추정하는 것이 크게 다르니 80년 가까운 세월 저편의 수치야 말할나위 있겠는가. 더구나 감추고 싶은 역사임에야. 스탈린 정권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1000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지도자 한 사람 잘못 만나게 된 탓에 얼마나 큰 비극을 겪어야 했는지….

 

▲ 조 블라디미르가 조명희 선생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석판 명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인부들 몇이 공사를 하고 있다. 사원을 리모델링 하고 있는데, 말끔하게 새단장한 모습이다.

하바로스크 시립공동묘지에는 조명희 선생 등 스탈린에 희생된 한인들의 위패가 걸려 있다.

이 기념석은 2003년 10월에 하바로프스크 시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다.

벽판에는 스탈린에 의하여 희생된 사람들의 명패가 부착되어 있다.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둥근 석판명패들에 박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허득만, 이시주, 강고간 등 한인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명패들이 있다. 조명희의 이름은 상단부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원래 벽판 옆에 있어야 할 조명희 선생의 묘비석이 보이지 않는다.

그 묘비석에는 ‘뛰여는 조선작가 조명희’라고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뛰어난 조선작가 조명희’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공사를 하고 있는 인부들에게 물어보니 자기들은 잘 알지 못한다고 한다. 관리인 연락처라도 알려달라 하니 그마저도 모른단다.

혹여 인근 풀섶에 버려져 있는 것은 아닌지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유족과 답사단은 포석 선생이 생전에 좋아했던 카네이션과, 아름다운 장미, 은은한 향의 국화 등을 헌화했다. 그리고 초콜릿과 보드카로 제례를 올렸다.

보드카를 따르며 포석보다 일곱살 터울 아래 아우이자 막역한 친구인 한설야(1901년∼사망 미상)가 생각났다.

한설야가 조명희를 그리워하며 쓴 ‘포석과 나’를 보면 애주가였던 포석의 모습과 선비같던 그의 내면이 잘 묘사돼 있다.

 

강렬한 내재력을 시인적인 고요한 사색 가운데서 발산하는 그 호수와 같은 깊이를 가진 눈 그리고 양안(兩顔)까지 내려드린 차붓한 머리까지 그의 시인적 면모를 돕는 것으로 지금도 무한한 추억과 함께 눈에 선이 보이고 있다. 결코 격하는 일이 없으면서도 그 옹글고 선율적인 언성에 실려나오는 정열은 그의 굳센 의지를 말하고 그의 박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양은 적으나 애주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우리들 세 사람은 한 잔 술을 살 여유도 없어 늘 석천(石天)군의 주머니를 털어서 청흥(淸興)을 주석에 찾었다. 마침 석천군의 주인집이 됫술 파는 집이어서 우리들은 오아시쓰나 찾듯이 자주 그 집에 모였는데 한 번은 술 많이 먹을 내기까지 하여 네 사람 곤죽이 된 일이 있다.

“위스키 먹을 내기하면 내가 약하지” 하던 포석의 말을 나는 지금도 무한한 우정과 함께 회상하고 있다. 언제 그가 돌아와서 참말 한 번 위스키 많이 마실 내기를 하게 될지.

- 한설야, ‘포석과 나’, 조선인민보 1946년 5월 24일.

 

그러나 그때 한설야는 알지 못했다. 무한한 우정과 함께 회상하며 위스키와 보드카를 마실 내기를 하고자 했던 포석이 이미 8년 전 비극의 총살형을 당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석판 명패 뒤쪽에 큼지막한 비석이 하나 누워있다. 거기엔 러시아어로 무엇인가 빼곡이 쓰여져 있다.

김 안드레이 교수가 답사단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자못 비장한 어투로 그 비석에 새겨진 글귀를 통역해 주었다.

 

멈춰라.

불법적인 스탈린 시대에

아무런 죄없이(탓없이) 조사받다

돌아가신 주검에 인사를 하라

수 천명의 죽은 마음이

여기에 있다

하느님을 믿는 자

기도를 하라

아무 이유없이 죽은 자의 마음을

고요하게 해달라

죄들은 당신을 욕한다

당신의 이름들이 역사에

다시

되살아난다

 

1930년대 후반 스탈린 시대에 죄없이 희생 당한, 그러고도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되지 못해 구천을 떠돌, 수 천의 영혼들을 위로하는 슬픈 헌시(獻詩)였다.

▲ 포석 조명희 선생의 외손자 김왕규·김흥남씨 부부가 시비 앞에서 헌주(獻酒)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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