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트라우마가 돌덩어리처럼 굳어져버려 끊임없이 통을 겪는 80세 할머니. 그 할머니의 단골 레퍼토리는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와 자신의 아들 손자 자랑이다. 할머니의 반복되는 이야기는 80세 된 할머니가 하는 소리가 아니라 너 댓 살 된 미성숙한 어린아이가 칭얼대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훗날 다른 사람에게 투사되곤 하는데, 이런 감정을 전이감정이라고 한다. 프로이트가 명명한 전이감정은 과거의 경험이 현재 관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상대를 착각하고 오해하게 만드는 현상이다.’(최광현 가족의 두얼굴’) 친정 식구들이라도 자신의 한을 들어주고 자신의 자랑을 들어주면 좋으련만 한 소리 하고 또 한다고 오히려 왕따시킨다.

이 할머니가 과거의 아픔을 자꾸 되풀이하는 것은 할머니에게 그 사건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자꾸 가족들에게 투사하고자 하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니까 가슴 속의 한은 더욱 커지고 단단해져 아픔이 클 수밖에 없다. 그 아픔은 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으로 발전하고 만다.

타인들에게 아들 자랑 손자 자랑을 되풀이 하는 것은 일종의 과시이지만, 실은 자식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심리적 방어 메커니즘이다. 현재 자신이 불행한 상태에 있음을 반증하는 태도이다. 가족 구성원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받으면서 외로운 처지가 된 할머니의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자식의 성공이나 행복이 부모의 성공이나 행복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에 상처받은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중학생 손자 밥해주어야겠다면서 전화를 끊었을 것이다.’ 이렇게 끝나는 이 작품의 마지막 구절은 이 할머니의 불행한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현재 불행하지 않으면 과거의 상처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 할머니는 아무리 아들 자랑 손자 자랑을 하지만 여전히 부엌에 갇힌 삶을 살고 있다.

이처럼 과거에서 현재까지 온통 자기 삶을 살지 못하고 누구를 위해서 살아온 할머니의 무의식의 내면에는 어마어마한 퇴적층과 같은 아픔이 쌓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크고도 단단한 돌덩어리 같은 한이 안에 쌓여 있는데 어떻게 남의 말이 귀에 들어온단 말인가. 아픔을 품고 있는 사람은 남의 말을 들을 줄 모른다. 자기 말밖에 할 줄 모른다. 사랑을 움켜쥘 줄만 알았지 나눠줄 줄 모른다.

이런 누님에게 남동생은 큰딸이면서도 나이 80이 되어가지고 왜 어머니 생각을 못하고 같은 소리만 하느냐고 타박한다. 남동생의 발언은 매우 도덕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권위적인 충고성의 말은 성숙하지 못한 내면의 아이가 내내 울고 있는 누님에게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다. 혹여 위로의 말이라고 생각하여 무심코 표현하는 교훈적인 말도 아파서 우는 아이에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트라우마로 고통 받고 있는 이에게 도덕과 이성은 하나의 편견일 뿐이다.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일 뿐이다.

그러니 그들과의 대화는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야 한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공감의 언어이다. 자신의 편견을 버리고 상대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태도로 소통하는 언어이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누군가를 원망하면 같이 원망하고 아들 손자 자랑하면 아들 손자 칭찬해주고 맞장구 쳐주면 된다. 이런 경우의 칭찬과 맞장구는 효과가 매우 좋다.

그것이 싫으면 가만히 있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다.

<권희돈 청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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