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 남녀가 하나로 합쳐진 한 몸이었는데, 이를 질투한 제우스신이 부하를 시켜 둘로 갈라놓게 했답니다. 제우스신의 부하가 사람을 둘로 가르다가 배꼽 아래에서 그만 삐끗하여, 남자는 배꼽 아래가 툭 튀어 나오고 여자는 배꼽 아래가 쑥 들어갔다고 하네요.

모든 사람을 다 반으로 갈라놓았으니 나의 반쪽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닐 것입니다. 운명적인 만남이라 여겨 결혼을 했는데도, 막상 결혼하고 나면 서로 다른 점만 보이는 것은 상대가 나로부터 떨어져 나간 진정한 나의 반쪽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끼리 만나서 살아가야 하는 게 결혼의 운명인 듯싶습니다.

길가의 돌멩이도 사람의 손길이 닿으면 예술이 됩니다. 서로 터치를 많이 하세요. 스킨십을 자주 하면 둘 사이가 친밀해집니다. 사랑이 담긴 눈빛은 그윽하고, 사랑이 담긴 입술은 달콤합니다. 키스도 자주하고 포옹도 자주하세요. 포옹을 할 때는, 남편은 아내의 뛰는 심장을, 아내는 남편의 뛰는 심장을 마음껏 느껴 보세요. 손끝에 분노가 실리면 폭력이 되지만, 손끝에 사랑이 실리면 악기를 켜는 활이 됩니다. 사랑의 손길로 터치할 때, 그 때 비로소 몸은 악기가 됩니다. 악기가 된 몸에서 나오는 세심한 소리를 듣는 것 그것이 바로 몸의 소통입니다. 부부 사이의 허그 키스 육체적인 사랑은 엄밀한 의미에서 치유의 스킨십입니다.

(권희돈, ‘백한번째의 주례사’)

 

부부 사이에 수많은 상처는 너무 가까워서 생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잘 모르는 사람을 칭찬하고 뜨내기 손님을 즐겁게 해 주지만 정작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생각 없이 무수한 많은 상처를 입힌다.’(엘라 휠라 윌콕스) 상처가 커지면 미움도 커진다. 미움이 커질수록 말하는 것 먹는 것 숨 쉬는 것까지 미워진다. 하찮은 일에도 감정이 폭발하고 과거의 나쁜 기억과 캄캄한 미래에 얽매이게 된다. 그러면 부부 관계는 물론 가정생활이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절망적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식을 나는 절망의 연금술이라 부르고자 한다. 연금술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연금술의 방식이 독특하면서도 보편적이면 좋을 듯하여 내가 아는 친구의 한 사례를 소개한다.

아내는 드라마를 좋아했다네. 허구한 날 화면 속의 이야기에만 빠져 있었지. 나한테는 말을 걸지도 않고, 내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어. 밖에서 들어와 그 모습을 볼 때면 텔레비전을 부수고 싶더라고. 정년 후 5년은 그렇게 서로 마음속에 분노를 키우면서 산 것 같아.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아내는 거실에 누워서 드라마를 보고 있고, 나는 소파에 앉아서 드라마와 아내를 번갈아 바라보았어. 주말드라마라 그런지 전개과정이 꽤 길더라고. 한참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운명처럼 어떤 속삭임이 들리는 거야. 그 속삭임의 주인공은 익명으로 떠돌다가 우연이란 이름으로 다가온 신이었는지도 몰라. (계속)

<권희돈 청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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