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시인 / 논설위원)

나기황(시인 / 논설위원)

노란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린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우유 빛 백목련이 곱다.
꽃샘바람에 은근히 감지되던 생명의 박동소리가 본격적으로 봄살이 채비를 서두른다.
봄은 생명의 계절이다. 겨우내 찬바람을 견뎌낸 거칠고 두꺼운 각질을 헤집고 여리고 여린 싹이 세상을 열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몸짓, ‘꽃’을 피워내고 있다.
생명의 세계는 언제나 경이(驚異)롭다.
봄이 되면 ‘시의 몸’이 된다는 어느 시인의 인터뷰 기사다.
“주로 봄에 시를 쓰게 돼요. 봄이 되면 몸이 ‘시의 몸’으로 바뀌어 가요......(시의 감수성이)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니까요.” 봄이 주는 생명력이 시인이 가꾸는 마음 밭에 촉촉한 감성의 씨를 뿌린다는 것이리라. 시인으로서 부러운 경지다.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을 키워내는 것은 ‘죽음’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삼라(森羅)의 어느 구석, 만상(萬象)의 어느 한 가지, 죽음과 맞닿아 있지 않은 것이 있으랴.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 맺고 다시 죽어 생명을 키우는 자연의 섭리를 들여다보면 한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것 같다.
흰 눈을 무겁게 이고 찬바람을 온 몸으로 견디고 있는 겨울 나목(裸木)의 인내를.
혹독한 한기를 자신의 몸으로 끌어안아 더욱 투명해지고 단단해지는 얼음의 따뜻한 배려를. 생명은 비우고 내려놓고 죽음으로서 지켜내는 ‘목숨 꽃’이다.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하는 까닭이다.
김지하 시인도 “꽃들 저리도/시리게 아름다운 건/죽으며 살아나는/ 봄살이 때문”이라고 했다. ‘살아 있음만으로’도 더없이 존귀한 것이 생명이다. 그중에 으뜸은 인간의 생명이다. 꽃 중의 ‘꽃(人花)’이요, 꽃으로도 때리지 말아야 할 귀한 ‘꽃’이 사람이다.
한 국가를 존재케 하는 역사도, 한 사회를 규정하는 문화도 끝없는 생멸(生滅)을 이어 온 ‘목숨 값’의 합(合)이다.
역사속의 오늘,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러시아 뤼순감옥에서 31세의 나이로 사형을 당했다. 1909년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 코콥체프를 만나기 위해 만주 하얼빈 역에 도착하는 순간, 구국일념의 방아쇠를 당기고 ‘목숨 값’을 지불했다. 가톨릭신자로서 안중근 토마스는 나라를 위한 자신의 신념이 하늘의 뜻임을 확신했다. 오늘 ‘안중근의사 순국 105주년’에 그 숭고한 ‘목숨 꽃’이 환하게 다시 피고 있다.
역사속의 오늘, 무리지어 피어있는 ‘목숨 꽃’이 또 있다. ‘천안함 폭침(爆枕)’도 5주년을 맞는다. 2010년 3월 26일, 서해 백령도 남쪽 해상에서 경비 활동 중이던 1200t급 초계함(哨戒艦)인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했다. 104명의 승조원 중 58명만 구조되었고 46명은 실종됐다. 6명은 끝내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다. 함수(艦首)부분을 탐색 중이던 UDT 소속의 한준호 준위가 순직했고 구조 활동을 하던 금양호가 침몰하기도 했다. 역사의 비극이요, 민족적 참상이다. 천안함 용사들에게 역사는 얼마큼의 ’목숨 값’으로 기억할 것인가. ‘금양호 선원 5주기’는 벌써 무관심속에 발길이 닿지 않는다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싱가포르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리콴유(李光耀·91)전 총리가 지난 23일 서거했다.
오늘의 싱가포르를 있게 한 역사의 꽃이다. 이제 그의 ‘목숨 값’은 꽃으로 피어 오래도록 싱가포르의 봄을 지켜낼 것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찬란한 슬픔의 봄, 어떤 ‘목숨 값’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찬란한 부활의 봄, 어떤 ‘목숨 꽃’으로 다시 피어 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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