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도시와 산업은 문화를 경작해 발전

▲ 충북문화진흥의 교두보인 충북문화재단 강형기 대표이사(오른쪽)와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이 지역문화 현상에 관해 대담을 나누고 있다.

‘충북문화재단’이라는 다소 생경한 이름의 사단법인이 생긴 것은 불과 3년도 채 되지 않는다. 2012년 11월 설립된 이 재단은 도청 한 켠(옛 충북경찰청 건물), 비좁기 이를 데 없는 공간에서 도청 문화예술과 파견 직원 몇 명으로 시작 됐다.

이사회가 구성되고 충북도지사를 이사장으로, 대표이사에 강형기 충북대 교수가 선임됐다. 지역의 언론들도 대수롭지 않게 다뤘다.

대표이사 임기 2년이 지나고 강 대표가 연임됐다. 그 사이 충북문화재단은 25명의 직원(정규직은 12명)과 130억 예산을 움직이는 ‘문화 권력’의 중심이 됐다.

지난 해 ‘충북문화예술인회관’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인 청주시 청원구 우암동 5층 빌딩(청주시 청원구 향군로94번길7. 전 LH공사 충북본부)4층 사무실(120평)과 5층 120평을 회의실로 쓰고 있으나 관계자들의 방문과 회합이 잦아 그나마도 “좁아서 불편하다”고 직원들은 불만이다.

충북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들이나 관련 동아리들을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일을 하는데, 갖가지 보조금의 신청-심의-결정-지원을 주 업무로 하는 충북문화재단의 공룡화에 대한 일부 문화계 인사들의 우려도 없지는 않다.

문화재단의 엄청난 인건비가 차라리 문화예술 활동비로 쓰여 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재단 측은 “문화재단의 확대는 시대적 요구이며 충북은 전국 문화재단 중 가장 적은 인원에 가장 열악한 처우”라며 목청을 높인다. 그 목청을 높이는 중심에 있는 사람이 강형기 대표다.

강 대표를 만나면 나이는 진갑에 이르렀지만, 늘 풋풋한 청년 같다는 느낌이 든다. 강단에서 익은 높은 톤의 목청과, 좌중을 사로잡는 달변과 해박함은 그가 얼마나 많은 독서와 사색을 하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저 아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명쾌한 분석과 대안을 내놓는데도 거침이 없다. 자칫 속을 드러내지 않는 충청도 사람들에겐 오해를 살만하지만, 그쯤이야 아랑곳 하지 않음이 또한 싱그럽다.

4월, 천지에 꽃비가 내리는 축복의 계절에 그가 염원하는 진정한 향부鄕富는 무엇인지를 들어보며 이 지역의 문화와 예술에 관련한 아름다운 식견을 듣기로 했다.

 -교수를 일찍 시작하셨지요? 몇 살 때 시작하셨는지요.

“스물여섯에 시작했습니다. 제가 생일이 12월 19일인데 우리 나이로 하면 28세니까 만으로는 스물여섯에 대전에 있는 우송대에서 전임강사가 됐지요. 그 이전에 첫 대학 강의는 서울시립대에서 영어 과목 시간강사였습니다. 군대를 의가사 제대를 했기 때문에 일찍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강 대표께서는 생각이 앞서가고, 그것을 거침없이 표현하면서 사니까 모르는 이들은 편하게 사는 줄 알겠지만, 본인은 퍽 힘들고 외롭지 않습니까.

“사실 앞서갔다고 제가 말하기는 건방지지만 ‘제일 먼저 강남에서 온 제비는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민참여에 대해 석사논문을 쓴 이유가, 원래는 막스베버의 관료제 공부를 했었어요. 막스베버가 유언처럼 한 관료의 권한이라는 것은, 한 사회의 의사결정권자 중에는 정치가와 관료가 있는데 정치가는 임기가 있지만 관료들은 임기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관료는 임기가 없는 정치가들인데 앞으로 이들을 관리할 시스템이 없을 것 같더라고요. 다만 있다면 시민참여라는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스베버의 책에는 시민참여 어떻게 하는 말이 없어요. 그래서 시민참여를 한 번 연구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시민참여의 방식은 국내에 논문도 없고 책도 없으니까 그것을 제대로 공부하려고 일어를 배우러 다녔어요.”

-충북대 교수로는 언제 오셨지요?

“만으로는 30세가 안된 29세에 조교수로 왔습니다.”

-왜 교수가 되셨지요?

“우리 은사께서 학문을 하려고 하는 것은 여자가 수녀가 되는 것처럼 각오를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각오를 하지 않으려면 다른 길을 가는 게 좋겠다고 하셨어요. 사실은 제가 대학 3학년부터 교수님 연구실에서 집필조교를 했습니다. 책 쓰는 보조 역할이죠. 그런데 하루는 교수님이 앞으로 뭐 할 거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 당시 동아일보가 최고의 신문이어서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가 돼서 제 글을 읽고 정치인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도록 해보겠다고 말씀드리니 교수님이 기자는 아무나 되냐고 하시더라고요. 기자는 순발력이 있어야 하는데 너는 순발력보다는 생각하는 형이니 학문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대학 3학년 때 선생님의 제안으로 학문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학위를 몇 살 때 받고 어떤 논문이었는지요.

“학위는 스물아홉에 받았습니다. 제 석사와 박사 논문 모두 시민참여입니다. 그 당시 시민참여로 박사논문 쓰는 사람이 없었고, 지방자치를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방자치를 실시하지 않으니까요.

저는 사실 남들이 이미 개척해 놓은 것을 하면 2등, 3등도 하기 어려울 것이고, 지금은 비어있는 공간이지만 앞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니까 당시 세가지가 비어 있더라고요. 지방자치는 경제가 발전하고 민주화가 이뤄지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고, 또 하나는 한국사회가 노동자들의 권위신장이 되면 노동정책이 정리돼야 할 것 같고, 그 다음 환경문제가 심각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 중에 50대에 가장 빛 볼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지방자치였습니다. 왜냐하면 노동문제는 노동경제나 노동법 공부하는 사람한테 당해낼 수 없을 것 같고, 환경문제는 과학적인 접근을 못하니 본질적인 이야기를 못할 것 같더라고요.”

-가훈이나 좌우명은?

“가훈은 덕은 외롭지 않다는 뜻의 ‘덕불고德不孤’입니다. 좌우명은 저도 좋아하는 말이고, 제 제자들 중에서 시장·군수가 많으니까 많이 써서 주는 것이 ‘근자열 원자래近者說遠者來’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행복하면 그것이 부러워서 멀리서도 찾아온다는 뜻이지요. 이것을 확대하면 그 마을사람이 그 마을에서 행복하게 살면 외지 사람도 그 마을에 살고 싶어서 찾아온다 해서 시장·군수들에게 많이 써서 줍니다.”

-이것이 향부숙(강 대표가 2008년 충북영동에 건립한 지방인재 양성기관)을 통해서 추구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향부숙은 오랫동안 계획한 것입니다. 지역을 다녀보면 우리 마을은 자원이 없다,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제가 보면 없는 것은 자원이 아니고 자원을 볼 줄 아는 눈입니다. 자원을 활용할 지혜가 없는 것이지요. 저는 소규모자치단체는 시장·군수 역량이 자원의 70%를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역의 고유자원을 많이 활용하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제가 말하는 고유자원은 다른 지역에 없는 배타적인 부존자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지역이 고유한 발상으로 활용하는 자원입니다. 함평의 나비축제가 함평의 고유자원이 됐지요. 당시 이석형 함평군수가 제자입니다. 나비축제로 명성을 얻고 3선을 무사히 마치고 현재 산림조합 중앙회장으로 있지요. 그가 퇴임식 하는 날 식순 두 번째 순서가 ‘사부님의 말씀’이었어요. 그게 저였어요.”

-전국에 시장군수들 가운데 향부숙을 통해서 교육을 받고 간 사람이 몇 명쯤 되나요.

“제가 2005년에 만든 ‘청목회’라는 것이 있어요. 청년 시장 군수 구청장회의를 줄여서 청목회라고 하지요. 그것을 통해 두 달에 한 번씩 1박2일 강의를 했어요. 거기 출신 시장·군수가 50여명 되지요. 그리고 거기 출신으로 국회로 간 사람이 9명입니다.

시장·군수는 자기 마을에서는 혼자 사용자고 나머지는 모두 피사용자니까 외롭잖아요. 외로운 사람들이 어디 궁리하고 상의할 때도 없고 하니까 청목회를 만들어서 제가 기본강의를 통해 방향을 제시하고 자기들 끼리 서로 회의를 한 것이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강 대표 댁이 개인주택의 기능을 넘어선 거 같던데요. 거기서 따로 하는 일은 없나요?

“초기에는 청목회 회원인 시장·군수들이 와서 회의도 하고 토론도 하고 강의도 받았어요. 지금도 주기적으로 와서 회의도 하고 교육도 합니다. 제가 시장·군수들 교육을 하다 보니 시장 군수들과 공무원간 정보격차가 크다는 것을 알았어요. 시장·군수들은 듣고 보고 연상해서 말하면 밑에 있는 사람은 그림이 안 그려지는 겁니다.

일본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려면 7인의 사무라이, 즉 용사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시장·군수 밑에는 그런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2008년도에 만든 게 ‘향부숙’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선비들이 나이가 들어 낙향하면 조그마한 서당을 하나 짓잖아요. 저도 여기 와서 신세지고 살았고, 아이들도 키웠고, 부모님도 여기서 사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이사 갈 것도 아니고 서당 개념으로 집을 하나 짓자 해서 지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하다 보니 너무 좁아서 충북 영동에 향부숙을 만들어 첫 해에 사비 1억 정도를 내어서 돈도 안 받고 모두 사비로 운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기도 양주나 여수, 순천, 포항, 포천 등지에서 차를 6~7시간 몰고 와서 제 강의를 4시간 듣고 돌아가는데 가는 사람도 아쉬워하고 저도 안쓰러웠지요.

그래서 학생들이 정식으로 경비를 받고 1박2일로 해달라고 요청 하더라고요. 사실 저는 반대를 했었어요. 행안부에서도 MOU 체결해서 도와준다는 것도 거절했었거든요. 정부지원을 받다 보면 애초 향부숙 설립 목적과는 달리 정부의 입김에 따라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가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했지요. ‘승진에 필요하거나 교육점수가 필요한 사람은 여기 오지 마라. 그리고 여기에 오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도 필요 없다. 마을에 가서 뭔가를 해보고 싶은데 뭘 어찌할 줄 모르는 사람만 와라. 배워서 남 주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와라. 대신 나도 배워서 남 주겠다.’ 그렇게 시작했지요. 그래도 그 때 강사료는 100만원씩 줬었습니다. 전국에서 그거 들으려고 오면 시간적 경비 등 하루 경비가 얼마나 많이 듭니까. 그 이상의 효과가 있으려면 최고의 강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최고의 강사를 초청했지요. 물론 저와 잘 아는 사람은 50% 강의료를 깎아주기도 했습니다.”

-강 대표는 특강 많이 하시지요. 연간 몇 회쯤 하시지요?

“일주일에 스무 군데 정도 강의 요청이 오는데 평균 주에 두 번 정도 합니다. 한 번에 2시간쯤 하는데, 어떤 때는 3000명 이상을 놓고 강의할 때도 있습니다. 시장·군수 같은 경우에는 15명씩 놓고 합니다.”

-그 두 시간 강의를 위해 얼마나 준비 하십니까.

“전에는 준비를 했는데 요새는 강의 가기 전에 그 도시를 두 시간 정도 둘러봅니다. 무언의 공기 속에서 해야 할 말이 떠오릅니다. 상점가를 본다든가, 정문 수위의 모습에서 시장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수위가 친절한 곳은 시장의 스타일도 다릅니다. 그리고 민원실을 한 번 둘러봅니다.

공무원들에게 말을 건네 보면 대충 계산이 나옵니다. 그래서 강의 강도를 조절합니다. 그리고 똑같은 강의 제목이라도 청중들의 나이와 전 시간 강의 등을 고려해 강의를 하지요. 저는 청중들이 강의 시간에 조는 것은 100% 강사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100명이든 300명이든 강의 장소까지 오게 한 것은 주최자가 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강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안 그러면 강의를 하지 말아야지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강의를 다니셨는데 제일 인상에 남는 강의가 있으시지요.

“한 15년 전 쯤 일입니다. 제가 우연히 전남대에 특강을 갔는데 지금 전남대 총장인 지병문 총장이 저를 자고 가라고 초청하더라고요. 지 총장이 하는 말이 후배가 군수가 됐는데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오늘 저녁에 만나서 이야기 좀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녁때 함께 만난 사람이 바로 당시 39세의 이석형 군수였지요. 어제 당선되고 오늘 만난거지요. 저녁 먹고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없는데 6개월 후에 전화가 왔어요.

이 군수가 하는 말이 교수님 말씀 듣고 뭘 좀 해보려고 하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저를 미친놈이라고 하니까 와서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함평을 갔습니다. 가서 화장실에 있는데 옆에 있는 공무원이 군수 욕을 막 하는 거예요. 그 공무원은 내가 누군지 모르지요. 그 공무원이 “무슨 나비랑가” 이러니까 오른쪽에 있는 다른 공무원이 “군수 미친놈이여”, 뒤에 있는 사람이 “우째스까이” 그러더라고요. 근대 정말 ‘우째쓰까이’(‘어째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의 전라도 방언) 하는 사람이 저였어요. 그날 강의 제목이 ‘왜 나비인가’였거든요. 이거 참 분위기가 편하지 않겠구나 하고 강의 장소에 들어갔는데 또 놀랬습니다.

강의하는 체육관이 바닥부터 꽉 찬 거였어요. 공무원들 전원이 다 와도 560명인데 체육관에 있는 사람은 3000명이 넘었으니까요. 나중에 알고 보니 비상전화 받는 공무원 빼고 공무원들은 다 왔고, 농협과 우체국 직원, 경찰서장을 비롯한 경찰, 동네 이장은 물론 반장, 부녀회장, 새마을연합회까지 다 왔더라고요. 거기서 제가 나비를 날리자고 했어요.

지금처럼 농사지어서 출향민들에게 팔아 달라고 하는 슬픈 농사를 짓지 말고 출향민들이 거꾸로 전화해서 우리가 거기 출신인데 우리부터 농산물을 보내줘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전화를 받아야지 왜 슬픈 농사를 짓습니까 그랬습니다. 그것은 나비가 해결해 줄 거라고 강의를 했지요.

100분 강의 하고 나서 소전 뒷골목에 와서 막걸리 먹으면서 눈발 날리던 게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에 군수가 전화해서 미친놈이라는 소리가 싹없어졌고 말하는데 잘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로부터 함평나비축제가 이 나라 대표 축제가 되었군요.

“군수가 추진을 했는데 처음에는 정말 그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개천 변에 200평 비닐하우스를 쳐 놓고 나비를 키워서 날렸는데 10시에 오픈하는데 9시에 벌써 사람들이 2000명이 왔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올 줄 몰라 화장실도 만들어 놓지 않았는데 아주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렇게 그 축제가 시작됐습니다. 피아노 치면서 피아노 배우는 것처럼 축제를 하면서 축제를 개척해 나간 곳이 그곳입니다.”

-누가 강 대표 당신이 하고 싶은대로 밀어 줄 테니까 해보라고 하면 어떤 일을 해보고 싶으십니까.

“제가 2003년도에 순천시장이 초청했을 때 세번을 거절했다가 네번 만에 갔는데 순천만에 있는 장어집에서 점심을 샀습니다. 먹고 나오면서 갈대밭을 보니까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갈대밭을 자원화 하자고 제안했더니 공무원들이 다 반대했습니다. 이게 뭐가 자원이냐고, 누가 오냐고 하는 거였지요. 그래서 제가 이거야말로 한국에서 최고의 자원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갈대밭을 자원해 해서 만든 것이 순천만자연생태공원이지요. 2003년부터였어요. 그것처럼 우리 지역자체가 자원의 보고지요. 자원의 창고입니다.

이것을 개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싶거든요. 그런데 그런 지역에 있는 자원을 개화시키는 일은 못하고 그냥 물량적인 투자를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 충북도에서는 관광개발을 할 때는 1548년 1월부터 10월까지 9개월간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선생의 문화정책을 본받아야 합니다. 퇴계선생은 9개월 동안 단양에서 컨테이너 한 채를 지은 적도 없는데 ‘단양팔경’이라는 콘텐츠를 만들어 단양을 지금의 관광지역으로 만든 거예요.

우리는 문화와 문명을 착각합니다. 물량적으로 투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문화적으로 개화를 해야 합니다. 발전이라는 것은 알에서 유충이 나오고 유충이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가 나방이 되는 것처럼 내생적으로 끌어내는 것인데, 우리는 내생적 자원을 끌어내는 것에는 눈독을 들이지 못하고 시설로 뭔가 만드는, 그러니까 넘버원으로 자꾸 가지요. 넘버원이 아니라 온니원이 돼야 합니다. 차별화된 시간과 공간을 기획하는 기획자가 되어 보고 싶어요.”

-예컨대 재단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충북도내에서 어느 지역이 가장 적합하다고 보는지요.

“충북 어느 지역이든 다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다만 한 지역을 개화시킬 때는, 창조성을 발휘시킬 때는 인간이 필요해야 이뤄집니다. 그냥 필요해서도 아니고 절실히 필요해야 합니다. 이런 절실한 필요성을 주최자들에게 공유시켜야 합니다. 창조는 용광로처럼 끓어야 녹는데 창조성이 발휘될 수 있는 조건정비가 돼야 합니다.”

-르네상스가 일어난 지역이 인구 10만에서 15만 정도의 작은 소도시였어요. 그런 곳처럼 어떤 문화의 심지가 되는 그런 지역이 큰 데 보다는 작은 데가 좋은 거 아닌가요?

“장·단점이 있지요. 대도시를 전반적으로 바꾸려면 어렵겠지만 부분적으로 한다면 가능하지요. 장·단점이 있는 것이 소도시는 변화가 바로바로 나타납니다. 또 소도시도 소도시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지요. 대도시인 서울 같은 곳에는 바른말, 옳은 말을 하면 인정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들끼리 모여 일을 할 수가 있어요. 말을 하면 지적인 접근이 가능해 머리에서 머리로 말해도 소통이 되고 소통이 되는 사람들끼리 일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그런데 작은 도시, 작은 공간에서는 무슨 말을 하면 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정적으로 받아들이다 보니까 좋은 말이라고 알아도 말하는 사람과 사이가 안 좋으면 배척이 되지요. 그리고 작은 지역일수록 지적인 것보다는 인간관계적인 것으로 움직이다 보니까 마이너스적인 발상이 생깁니다. 그래서 작은 지역에서는 어떤 창조성이 발휘되려면 냉철한 머리로만 되지 않고 냉철한 머리를 따스한 가슴으로 여과해서 전달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농촌이나 시골에 가서 창조성을 발휘하기가 더 어려운 거지요.”

-어느 지역에서 문화가 됐든 예술이 됐든 어떤 것을 끌어올리거나 구심점이 되려면 인물이 있어야 하는데, 그 사람을 키워내는 그 일이 인위적으로 가능한가요.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인간적 교류지요. 아까 르네상스 말씀하셨는데 르네상스가 이탈리아 중에서도 중도시인 피렌체에서 꽃피게 된 것은 메디치라는 가문이 끊임없이 예술가들을 지원한 덕분이지요. 메디치라는 가문에 의해서 많은 예술가들이 창조성을 발휘한 걸 보면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키워지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과학에 있어서의 창조성은 한 명의 천재에 의해 이뤄지지만 지역사회에 있어서의 창조성은 인간의 네트워크로 이뤄지기 때문에 중심인물을 통한 그 사람의 복제작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분위기와 지원이 따라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충북문화재단 대표로서 많은 느낌이 있겠습니다. “길을 걸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해지는 도시에서 살고 싶다. 거리를 걸을수록 아름다운 상념이 떠오르고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그런 도시에서 살고 싶다. 나는 도시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살고 싶다. 나의 테마에 새로운 모티브를 충전할 수 있고 내가 생각한 것을 생활 속에서 조화시킬 수 있는, 극장과도 같은 도시에서 살고 싶다. 내가 살고 싶은 도시를 그려 본다… 도로 표지판의 디자인이 아름다워 눈길이 가고, 다리의 난간과 기둥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인 양 고풍이 넘친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은 청류 그 자체이고, 거리의 양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가의 간판들은 작아서 오히려 눈길을 끈다. 전선은 모두 지하로 숨었고… 도시를 디자인한 사람들의 감각이 향기로 느껴지고,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품이 엿보이는 듯 거리의 모습도 아름답다. 광장은 비어있으므로 더욱 가치 있어 보이고…” 이 내용은 강 대표가 2000년에 펴낸 ‘향부론鄕富論’서문의 첫 머리입니다. ‘문화로 일구는 행복한 도시의 향부론’이란 서문 제목처럼 상상만 해도 행복한 소시민의 문화적 감동일 것입니다. 이미 그 어렵던 시절, 김구선생께서는 백범일지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길 원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 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설파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국민들이 문화를 외치고, 정부의 국정지표를 문화융성에 두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 국민들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953년에 67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6205달러(2014년 12월 현재)나 되어 무려 394배가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행복도가 올라가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풍요한 나라’에서 ‘행복한 나라’로 가야한다는 자각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국민총생산에서 국민총행복(GNH)을 최고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성장과 아울러 인간의 행복에 공헌하는 다른 요소들도 중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사회가 너무 각박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박절하게 해 놓고는 그것이 경우 바른 행위였다고 생각하고, 무례한 행동을 용감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한 현상은 지금 우리의 문화가 잉태시킨 결과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일정한 양식樣式이 필요하고, 그러한 양식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릅니다.

삶의 양식은 우리의 마음에 연지곤지를 찍어주는 것입니다. 마음에 드는 옷을 깨끗하게 차려 입고, 극장표를 사서 지정석에 앉아서 보는 영화와 집에서 소파에 누워 잠옷 바람으로 보는 영화의 감동은 전연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간 출세와 돈 그리고 생산성을 추구하며 불길처럼 맹렬하게 살아오면서 ‘양식’을 잃어버렸습니다. 효율성을 가장 중요한 잣대로 삼으면서 양식이 생략된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마음에 연지곤지를 찍으며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둘째, 지금 우리가 문화에 주목하고, 특히 예술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사회가 급격한 패러다임의 전환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임금과 땅값이 앙등하게 되었고, 기업들이 싼 노동력과 공장 터를 찾아 해외로 이전하는 바람에 국내산업의 공동화가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 우리가 추진해야할 산업정책은 중국과 베트남 등지로 이전한 공장을 다시 불러오고, 한국에서 가동 중인 공장이 해외로 못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싸울 적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추진해야 할 과업은 산업구조를 전환시키는 것이지요.”

-문화를 앞세운 산업구조의 전환인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제조업과 싸울 것이 아니라 산업구조를 개혁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술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창조적인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공업제품의 수출국에서 서비스산업, 정보산업, 기술의 수출국으로 발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디어와 감성으로 승부를 겨루는 콘텐츠산업은 중화학공업을 위해 필요했던 원재료의 조달에서도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서비스산업의 기초를 놓기 위해서는 예술문화를 꽃피워야 합니다. 공업화사회는 생산자와 공급자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팔 것인가 그리고 무엇이 팔릴 것인가를 기점으로 발상하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성숙사회의 주력산업인 서비스업, 정보산업, 기술력은 소비자를 중심으로 발상될 때 그 경쟁력이 생기지요. 따라서 무엇을 팔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살 것인가’의 관점에서 발상을 해야 합니다.

소비사회에 있어서는 소비자체가 사회의 주역이므로 모든 발상은 소비의 관점에서 검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비스 산업이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예술문화가 기초연구와 기초학력의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우주개발처럼 현시점에서는 채산이 맞지 않더라도 과학기술의 기초연구에 지원을 하듯이, 정부는 예술문화에 지원을 해야 합니다. 성숙사회에서는 국민 개개인의 감성과 발상력이 국력을 좌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수한 계층만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높은 센스 그리고 높은 감성을 공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서로 다른 모든 사람의 감성이 모이고, 그 총합이 문화의 수준을 결정하는 시대입니다. 문화는 구호와 선전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상징탑이라는 가장행렬로 피어오르는 것도 아니지요. 21세기의 문화는 특수한 사람들의 앞마당에서 피는 꽃으로 가꾸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미학적 감각과 가치관 그리고 생활양식의 총체로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루이비통과 샤넬이 팔리고 있는 것은 프랑스가 문화국가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루이비통과 샤넬의 이미지는 개별적인 브랜드들만이 구축한 것이 아니지요. 프랑스가 최첨단의 예술작품을 끊임없이 생산하면서 세계로 발신하고 있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입니다. 최첨단의 예술을 육성하고 그것을 해외로 발신하는 것은 그 나라를 위한 최선의 산업정책이 된 것입니다. 강 대표께서는 일찍이 ‘문화로 일구는 지방경영’이라는 부제가 붙은 ‘향부론’이라는 저서를 발간하여, 지금까지 ‘국부론’만 존재하던 세상에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국부國富의 원천은 향부鄕富에 있다는 주장도 인상적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은 있어도 조선냉면은 없는 것이고, 전주비빔밥은 있어도 한국비빔밥은 없다는 것입니다. 문화란 그 토지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기 때문에 지방과 도시의 문화를 꽃피울 때 그것의 총화로서 국가의 문화가 융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화와 문명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 그리고 문화와 예술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요.

“오늘날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밀농사를 짓고 있지만, 그 밀로 국수를 만들고, 스파게티를 만들며, 우동을 만들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전 세계에 보편적인 현상인 밀농사의 재배기술이 인류의 문명이라면 나라마다 빵을 굽고 우동을 만드는 모습을 우리는 문화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도 유산문화와 생활문화 그리고 예술문화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유산문화는 지방의 문화적 역사를 상징하며, 미래의 문화향상과 발전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우리에게 지난 일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앞길을 비춰주는 등불이기도 합니다.

생활문화란 생활의 지평地平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시민생활의 전 분야를 ‘문화의 개념’으로 재조명한 것입니다. 예술문화란 우리가 그냥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문화전체를 견인牽引하는 ‘표현예술’을 의미합니다.

표현예술의 수준은 한 나라(지방) 문화의 질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고, 그 지방과 그곳 시민의 품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요소들을 한마디로 문화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서는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의 개발을 위해 세련된 예술적 감성이 요구되면서 경제·사회에 있어서 표현예술이 가지는 의미는 날로 커져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술가와 예술단체에 대한 지원은 이제 ‘지원’을 넘어 ‘투자’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들어 예술의 공공성이란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사회에 있어서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사실 현대사회에서 거의 모든 문제는 그것이 공공성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식사는 식량문제라는 공공성과 관련되고, 설거지와 교통도 환경문화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공공성이라는 사슬에 얽매어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공공성의 문제는 ‘있고’, ‘없고’의 문맥이 아니라 ‘강하냐, 약하냐’, ‘높으냐, 낮으냐’의 문맥으로 파악해야 할 사안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재, ‘예술의 공공성’의 문제가 예술의 세계 속에서 ‘있다거나, 없다는’ 문맥으로 논의되어지고 있는 것은 예술에 대한 우리사회의 이해를 단적으로 적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극단이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고나서, 그 주체들이 “우리 극단은 정부로부터 공적인 지원금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더욱더 공공성 있는 활동을 해야 한다. 우리 극단 단원들은 근처의 도로 청소를 하는 것으로서 공적인 단체임을 자각하자.”라고 했다면, 그 극단은 스스로 공공성이 없다고 판단한 셈이지요. 공공성의 문제는 시대와 더불어 변화합니다.

예컨대, 현대사회에서의 극장이란 학교나 병원과 마찬가지로 공공성이 높은 장소입니다. 따라서 그 곳에서 활동하는 배우와 연출가는 교사나 의사와 동일한 수준의 공공성이 높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교육도 의료도 그것이 수 백 년 전부터 당연히 공공성이 높은 것으로 인정되어온 것이 아닙니다. 과거 철도는 아주 공공성이 높은 교통기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이 스스로 교통수단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시장원리의 경쟁에 맡겨지면서 상대적으로 공공성이 낮아지고, 철도는 민영화되어도 괜찮은 기관이 되었습니다. 절대적 공공재처럼 보이는 서비스마저도 시대에 따라서 그 공공성의 고저가 변하는 것입니다. 공공재란 소비의 비배제성(모두가 혜택)과 소비의 비경합성(함께 관람하더라도 효과가 줄지 않는다)이라는 성격을 갖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술은 그 시스템 자체가 비배제성이라는 성격을 가진 무형의 공공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 중요한 것은 예술의 공공성이 높으냐 낮으냐의 문제가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겠네요. 충북문화재단은 충청북도가 설립한 문화재단이라는 점에서, 재단이 지원하는 기준으로 지역사회에 공공성이 있는 예술활동을 하느냐도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고요.

“예,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사실 21세기의 지방자치단체가 중시하는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닙니다. 예산을 투입하여 보존기능을 수행하는 닫힌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추상적인 현대 예술일지라도, 시민에게 개방되고 생활문화 속에 파고들어 산업과 비즈니스에 응용할 수 있는 예술과 문화를 중시하는 것입니다.

특정한 ‘무엇을 위한 예술’은 진정한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발상은 19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생각일 뿐입니다. 그 이전에는 가톨릭을 위한 예술, 불교를 위한 예술 등 무엇을 위한 예술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언가의 목적을 지향한 예술이야말로 생명력 넘치는 예술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저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도 있겠지만 지역 문화재단의 대표로서 기대하는 예술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술가들이 지역사회에 파고 들어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강 대표께서는 저술하신 ‘지역창생학’에서 최근 선진국의 도시경영자들이 도시경영에 예술가들의 창의성을 도입하여 성공한 많은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진국의 사례에서 지역사회개발에 예술가들을 투입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0세기의 도시들은 법률과 행정 그리고 토목기술자에 의해 관리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터는 아티스트와 디자이너의 힘을 더해야 합니다. 좌뇌로 움직이던 행정에 문화와 예술로 상징되는 우뇌형 사고방식을 더할 때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창의적인 사고와 아름다운 도시는 좌뇌형 인재와 우뇌형 인재들이 결합할 때 그 창생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도시경영자들은 예술에의 투자가 창조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지름길이며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투자라는 것을 알고 실천했던 것입니다.

문화는 경제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지만, 경제 또한 문화에 의하여 향도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인간의 마음을 경작하는 산업을 중시한 것입니다. 21세기의 도시와 산업은 마음의 밭心場이라는 문화를 경작함으로써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들은 남과 다르게 바라보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도록 학습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술에는 행동과 사상을 규정하는 낡은 틀에 대한 불만과 불안의 에너지를 표현하는 동시에, 그 에너지를 육성하여 사회의 소리로 만들려는 꿈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술의 창조적 파괴라는 요소가 도시의 창조성을 북돋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적 문제(Social Agenda)에 예술이 관여하게 되면 종래의 해법과는 다른 발상으로 접근하므로 전연 다른 해결책이 나오기도 합니다. 예술만이 가진 힘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문화예술인, 특히 충북의 문화예술인에 대한 평가를 한다면…

“예술이란 ‘삶’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며, 삶에 있어서 무엇이 인간을 지탱시키는가 하는 문제와의 접점接點에서 생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의 ‘삶을 확대’시키고,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에게는 ‘삶을 지탱’시키는 힘을 발휘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표현예술에는 ‘삶’이라고 하는 근원이 내재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술을 포괄하여 문화란 삶의 양식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양식의 본질은 양심입니다. 따라서 어려운 시대를 살아갈수록 예술가는 문화라는 삶의 양식을 세상에 제시해주고 또 양심의 근원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사회가 너무 각박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박절하게 해 놓고는 그것이 경우 바른 행위였다고 생각하고, 무례한 행동을 용감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현상은 지금 우리 문화의 한 양상인 것입니다. 초두에 말했던 것처럼 인간의 삶에는 마음에 연지곤지를 찍어주는 양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감동이 거세된 지식으로서의 예술만 접하면서 마음에 연지곤지를 찍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칠게 그리고 투쟁하며 살아가는 것이 몸에 배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러할수록 예술가들은 마음에 연지와 곤지를 찍어주는 양식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가들이 타락을 하면 그 폐해는 더 크게 나타납니다. 그것은 마치 더러운 걸레로 청소를 하면 마을이 더욱 더러워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활동이 주위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양식을 제공해주고 있는 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 앞으로 충청북도와 청주시를 비롯한 지방자치단체들이 펼치는 문화행정이 제자리를 가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문화행정이란 행정의 한 부서가 예산집행을 통해 문화사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문화도시의 건설은 창조적인 삶의 역사적 흔적인 유산의 전승과 미래의 창조를 선도하는 예술의 진흥 그리고 시민생활의 존재양식 전체를 아우르는 차원에서도 실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문화과나 문화국이라는 ‘기둥으로서의 문화행정’이 아니라 전 행정을 포괄하는 ‘지붕으로서의 문화행정’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문화관광과 등과 같이 문화담당의 전문 부서를 설치하고 예산을 세워서 그 예산을 소화시키면 그것으로 문화도시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문화도시를 건설하려면 먼저 행정의 전 분야에 문화의 개념을 도입해야 합니다. 행정 전체가 문화의 모자를 쓰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모든 행정을 문화행정으로 일원화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들릴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행정전체가 문화적 관점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도로나 공원을 정비할 때에도, 복지시스템을 설계하고 소비생활을 지원할 때에도 그리고 산업체와 상점가에서도 모두가 문화의 모자를 쓰고 문화의 옷을 입혀야 합니다. 모든 사업, 제도, 시책이 ‘문화’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행정의 문화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행정의 문화화를 도모하려면 우리의 행정스타일을 본질적으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모든 사업과 제도 그리고 시설의 집행과 운영을 문화행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변혁시켜야 합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행정문화를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행정이 문화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문화를 창조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시민이며, 행정의 역할은 그 조건을 정비하는 것일 뿐이니까요. 다만 오늘날 문화를 창조하는 조건정비는 ‘문화화된 행정’이 존재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행정이 문화화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문화행정은 ‘기둥’이 아니라 ‘지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정책은 타 정책의 상위에 위치하는, 개념상 모든 정책을 포괄하는 기본이념의 성격을 가져야 합니다. 문화정책을 정점으로 하여 다른 정책이 문화정책 하에 종합화되는, 즉 정책 전체가 문화정책에 수렴收斂되는 구조를 취해야 합니다. 문화정책이 이념상 다른 정책의 상위에 위치한다고 하는 것은 정책 전체에 문화의 옷을 입게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충북문화재단은 우리 도의 행정에 문화의 모자를 씌우는 일을 잘 할 수 있는 상태입니까?

“제가 충북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일한 지가 3년 남짓 되었습니다만, 그 사이에 도의 문화국장과 문화과장이 각각 세번 교체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 우리나라의 공통적인 현상일 것입니다. 따라서 도의 문화재단이 보다 중심에 서서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문화재단을 만드는 이유는 관청문화의 경직성과 민간의 불확실성을 넘어, 관의 신뢰성과 민간의 활력을 결합하여 보다 전문적으로 문화진흥을 도모할 목적으로 설립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화재단의 현실은 자주적인 기획사업을 통해 창의적 지원을 하는 조직으로서는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로 예술위원회와 도가 결정한 사업을 집행하는 일에 급급해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또 직원규모도 우리와 인구규모가 비슷한 강원문화재단이 60명, 광주문화재단이 87명인데 비해 우리는 25명입니다. 그 중에서도 정규직은 강원문화재단이 33명, 광주는 55명인데 비하여 우리는 12명이고 그 중에서도 4명은 파견된 공무원으로 충당 되고 있습니다. 다만 다른 재단에 비하여 설립초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제부터 도약을 위한 몸부림을 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충북문화재단의 백년대계를 잘 설계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담·글/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기록/김재옥 기자 ▶사진/김수연 기자

 

▲ 강형기 충북문화재단 대표

 

강형기姜瑩基 대표는…

△1954년 12월19일 경북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316 출생 △안동 북후초-경덕중-중앙고-건국대행정학과 졸(1978) △행정학 박사(1984) △현 충북대 행정학과 교수. 충북문화재단 대표이사.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전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자문단장. 전국 시·군·구의회 의장협의회 고문. 전국 청년 시장·군수·구청장회 고문(지도교수). 한국지방자치경영연구소 소장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향부숙(지방인재양성기관) 대표 △일본 국립 이바라키대학 조교수(1993∼1995) △저서: 지역창생학·문화로 일구는 창조적 재생. 지방자치학. 논어의 자치학. 지방자치학. 향부론·문화로 일구는 지역경영. 지방자치 가슴으로 해야 한다. 한국지방자치론. 지역경제 새싹이 돋는다. 등 다수 △현주소: 청주시 서원구 비하동603 △가족: 부인 이은영(56)씨와 2남. △홍조근정훈장(지방자치발전공로(2013) △전화 043-222-5311(충북문화재단 대표 이사실)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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