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회 지용신인문학상 배정훈씨

(동양일보 조아라 기자)그 때의 죽변은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만선을 이끌던 아버지. 10남매의 맏이로 늘 당당하고 강한 아버지의 모습은 울창한 ‘대숲 끄트머리 마을’, 죽변 그 자체였다. 아버지가 낭만적이고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이었다는 걸 안 것은 불과 얼마 전이었다. 

시 ‘죽변’으로 동양일보가 주최한 21회 지용신인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배정훈(34·사진·경북 울진군)씨. 그는 죽변을 배경으로 한 이 시를 통해 한 사람과 한 공간에서 만들어내는 하나의 추억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연이었을까. 그가 가는 곳마다 늘 바다가 있었다. 밤바람에 바라보는 바다는 자신을 향해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때마다 항상 시를 쓰곤 했다. 배씨는 “역마살이 있었는지 전학도, 이사도 많이 다니곤 했는데 이상하게 가는 곳마다 바다가 있었다”며 “흰 파도가 나를 향해서 손짓할 때 그처럼 애잔한 마음이 없었다”고 말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문예동아리에서 활동하기는 했지만 특별히 시를 공부하고자 한 적은 없다. 그러나 입시학원 강사, 회사원, 비서 등 여러 직업을 떠도는 동안에도 시는 그를 떠나지 않았다. 
2008년 뇌염 판정을 받고 투병 후 후유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배씨. 현재 그는 남편 장영명(48)씨와 10개월 된 딸 다예를 키우며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있다. 
다음은 배씨와의 일문 일답이다. 

- 작품을 구상할 때 특별히 의식하는 것이 있는지.
“저는 제목이나 인상 나는 구절을 미리 써놓고 시작합니다. 약간은 신기라고 하나요, 말이 트이기 시작하면 그 이후로는 술술 써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담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겠죠. 세상에 대한 불만, 사람에 대한 미련들, 궁상맞은 처지… 이런 것들이 시 속에서는 장황하지 않으면서 맑게 표현돼 저도 가끔 놀라곤 한답니다.” 

-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는지. 
“중학교 2학년 때부터입니다. 당시 국어선생님이 스승의날 백일장에서 수상한 제 작품을 보시더니 앞으로 일주일에 시 3편씩을 써보라고 권하셨어요. 저는 속으론 우쭐하기도 해서 청소년으로서 쓰기엔 좀 수준 높은 단어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래도 그게 계기가 되어 국어국문과를 가게 됐고, 도서관에서 2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많은 책을 읽고 시를 썼습니다.”

- 시의 소재는 어디서 얻는지.
“아름다운 것들, 스쳐 가면 다시는 잡지 못할 것들에게서 얻어요. 사랑, 꽃, 물고기, 노을. 새 등이요. 저는 편집증이 있기 때문에 한 번 시를 쓰기 시작하면 끝을 봅니다. 나름 고집도 있고요.”

- 평소 정지용 선생, 또는 그 분의 작품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모더니스트라고 알고 있는데, 저도 솔직히 기억이 가뭇합니다. 그렇지만 몇몇 작품 ‘붉은 손’, ‘슬픈인상화’, ‘카페프란스’ 등을 읽어보면 유난히 쓸쓸함이 배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상대에 대한 연민은 곧 내 모습을 투사시키려는 것이겠지요. 주제 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시절이 길러낸 멜랑콜리한 시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족한 제 시를 뽑아주시고 희망과 용기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누군가를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게 만드는, 그 시인을 존재하게 만드는, 그런 시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조아라> 
    


■ 당선작  
   ‘죽 변’’

세죽細竹이 늘어선 마을 어귀 
어린 백구가 강동거리며 뛰놀고 
주인 모를 고깃배들 
붉고 푸른 깃발이 비늘처럼 결을 타고 운다. 
수족관마다 산호珊瑚 마냥 쌓인 게들 
울긋한 소주 향내와 같이 타는 겨울 바다 
더불어 붉어지는 한 세상을 지켜보며 
술 취한 어부들 
때로는 수줍었고 번잡했던 
삶의 그물을 거둔다. 
바다야 온전하겠지만 
바람 많은 동네에 터 잡고 낚는 세월은 고래처럼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 
부네 손등에는 손금이 놓이고 
짓지 않아도 될 쓴 근심이 수의壽衣처럼 짜였더라. 
창자처럼 이어진 골목들 
일렁이는 불빛들 
애 끓는 단장斷腸도 한 시절인데 
창을 두드리는 주먹 쥔 해풍海風 
부대끼는 댓닙 그 새로 

바다의 눈시울이 붉다. 

 

 약력 

△1982년 경북 울진 출생 
△안동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전 울진신문사 프리랜서 칼럼니스트 
△12회 삶의향기 동서문학상 가작, 7회 전국장애인문화공모전 가작 수상

 

 

▲ 유종호 문학평론가

 ■ 심사평
올해에는 응모작품수도 예년보다 많고 뛰어난 작품도 많이 눈에 띄어 심사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심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과연 배정훈의 ‘죽변’, ‘별’, 이가은의 ‘이명(耳鳴)’ 등의 작품이 발견됨으로써 심사자들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죽변’은 자칫 평범한 서경시로 떨어질 소재다. 물론 이 시는 한 아름다운 바닷말을 그린 서경시로 읽어도 시를 읽는 즐거움을 충분히 맛보게 해준다. 그러나 이 시의 맛은 거기에만 있지 않다. 아름다운 바닷마을 모습을 통하여, 또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통하여 사람이 사는 기쁨과 슬픔을 보여 준다. 과장된 표현이나 작위적인 비유가 없는 것도 시의 품격을 높인다. 시가 막힘없이 읽히는 것은 그에 걸맞는 리듬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별’은 소품이지만 어느 한 구석 빈 곳이 없는 말끔한 시다. 어쩌면 시는 이처럼 아무 것도 얘기하는 것이 없으면서 많은 얘기를 할 때 더 좋은 시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시는 종종 너무 많은 것을 얘기하려다가 시의 맛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만 이 시가 당선작이 될 때는 신인으로서의 패기가 모자라는 작품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는 있다.
 ‘이명(耳鳴)’은 아주 유니크한 시다. 시형식도 시어들도 신선하다. 요즘 투고시 중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이 일정한 전제를 앞에 놓고 연역적으로 그것을 풀어가는 것 같은 형식이거나 그 변형인 것들인데 투고시편중 한 편도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은 이 투고자가 이른바 시창작강좌의 나쁜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증좌 같아 반갑기도 하다. 
내용도 진부한 도덕주의나 속보이는 시민공동체주의 같은 것은 멀리 벗어던지고 있어 신선하다.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아무한테도 구애받지 않고 할말을 다 하는 활달함과 당당함도 마음에 둔다. 당연히 당선작이 될만한 작품이다. 그러나 선자들은 ‘죽변’과 ‘이명(耳鳴)’ 두 작품을 놓고 토의 끝에, ‘이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죽변’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 유종호 문학평론가

■ 신경림 시인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