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석이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 당하기 전 수인으로 있을 때 찍은 사진.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동양일보는 2014년 10월 13일부터 2015년 3월 16일까지 연재했던 조명희 시리즈 1부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에 이어, 2부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 / 포석 조명희의 삶과 문학’을 선보인다. 평전(評傳)의 형식으로 전개되는 ‘조명희의 삶과 문학’은 한국 근현대문학의 선구자로 민족 민중주의적 문학과 삶을 살다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해 연해주 한인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재소 한인문학의 뿌리를 내린 뒤, 1938년 스탈린 정권의 탄압에 의해 일제 스파이라는 누명을 쓴채 마흔 네살의 젊은 나이로 총살형을 당하기까지 포석 조명희의 일대기를 담게 된다.

 

▲ 포석이 수감돼 있던 지하감옥의 쇠창살문. 빛 한 줌 들어가기도 어려운 좁은 창살문이다.

 

1938년 5월 10일, 소련 하바로프스크 KGB본부 지하감옥.

깡마르고 날카로운 얼굴선에 형형한 눈빛의 중년 사내가 깊은 상념에 빠져 있다.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것인지, 무엇이 자신을 이 낯설고 두려운 곳까지 끌고 오게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앞날을 위해 싸워왔던 그에게 이처럼 가혹한 시련이 닥칠 줄 그는 꿈에서조차 가늠하지 못했었다. 해서 지난해 9월 그가 거주하고 있던 ‘작가의 집’으로 불시에 들이닥친 KGB요원들에게 체포되어 갈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줄 몰랐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가족들에게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사흘 후면 돌아올 것을 약속하며 떠났었다.

그렇게 떠났던 이, 사흘 후 돌아오겠다며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결국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 비극적 운명을 겪게 된 이, 바로 포석 조명희였다.

조명희의 제자이자 처남댁인 최 예까쩨리나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1937년도였다. 이때 작가는 소설 ‘만주빠르찌산들’을 거의 끝내가고 있었다. 다만 서론만이 남아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모두 원동에서 떠나가라는 지령이 내렸던 것이다. 어느날 조명희 선생은 부인에게 말하기를 “아마 떠나가게 되면 려객차의 독실에 우리는 앉아가게 될 거요!” 하였다. 어느날 밤에 3명의 군복을 입은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빨리 차비를 하고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마리야 이와노브나가 울기 시작하였을 때 조명희 선생은 “한 사흘동안 살 비용 돈과 물건을 가지라고 하였으니 사흘 후면 돌아오게 될 것이요. 쏘베트 정권 앞에 나는 아무런 죄도 지지 않았으니 마음을 푹 노시오. 잘 있소!”라고 하였다.

만약을 생각하여 돈을 가지고 가려 하였을 때 마리야 이와노브나는 호주머니들에서 돈을 다문 몇푼이라도 얻어보려 하였으나 별로 없어 그때 돈으로 겨우 10루블리를 찾아보았다. 이런 광경을 본 불청객들은 “이런 큰 작가의 집에 돈이 그렇게도 없는가?”하는 의심 끝에 몹시 놀라해 하였다.

조명희 선생은 그후 종내 돌아오지 않았다.

 

짐작가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간간이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뜻을 같이하던 동지 가운데 누군가가 변절했다는 것, 그의 배반으로 인해 연해주 지역 한인 동포 사회의 지도자적 위치를 점하고 있던 그가 소련 당국으로부터 타깃이 됐다는 것, 해서 스탈린 정권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1)과 맞물려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도해도 너무한 것이었다. 평생 민족과 민중을 위해 헌신하면서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정책에도 저명한 문인으로서 힘껏 도운 그에게 씌어진 죄명이 일제 스파이를 도운 협력자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있을 때 어느 누구보다 일제의 폭압적인 통치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고, 그 때문에 일경으로부터 요시찰 인물이 되어 그들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결국 1928년 사선을 넘어 소련으로 망명하였던 그에게 씌어진 죄명이 일제 스파이라니, 너무나 어이없는 것이었다.

‘삶이란 것이 참으로 허망한 것이구나. 요동치며 제 멋대로 흐르는 격랑의 저 아무르강처럼 내 참뜻은 외면 당한 채 흐르는구나. 흐르고 또 흐르다 보면 어디에 다다를꼬.’

포석은 혼잣말을 되뇌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들에게 사흘 후면 돌아오리라던 포석은 늘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었다. KBG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끌려오기 한달 전 막내 블라지미르가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하바로프스크 KBG 지하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늘 그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갓난아기 블라지미르였다. 그 아기를 떠올리며 그는 삶에 대한 강한 희망을 키워나갔었다.

그러나 그것도 부질없는 짓이 되어버렸다. 한 달 전인 4월 15일 소련 당국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것이다.

하바로프스크시 안전위원회는 ‘조명희는 일본을 위한 간첩행위를 하는 자들을 협력한 죄로 헌법 58조에 따라 취조와 재판없이 최고형 사형을 받게됐다’고 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는 것. 푸시킨의 시처럼 그래, 당당하게 살자. 마지막 남은 나의 삶이 아주 적은 시간의 것일지라도 슬픔과 노여움 대신 미래에 살 나의 마음을 찾으며 살자.’

포석은 또 다시 혼잣말을 되뇌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KGB 옛 건물. 포석 조명희는 이곳으로 잡혀들어온 뒤 이 곳에서 사망했다. 포석의 수인 번호가 있는 명함판 사진도 유족들이 이곳에서 발견한 것이다.

 

포석 조명희는 1894년 8월 10일 충북 진천군 진천면 벽암리에서 아버지 조병행과 어머니 연일 정씨 사이 네 형제(칠남매)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황동민의 ‘조명희 선집’에는 “그의 아버지는 19세기 후반기 조선의 선비였으나 당시 정치무대에도 진출하지 않았고 관청 출입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명희가 네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조명희의 어머니는 보통 농민의 딸로서 교양있고 부지런하고 마음씨 어진 사람이었다. 조명희는 어머니에게서 다정다감한 정서를 물려 받았고 자애심과 정의감을 배웠다”라고 기록돼 있다.

 

포석 조명희의 생애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격랑과 궤를 같이하고 있으며, 그의 삶 또한 그 질곡의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생애에는 우리 역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명희가 태어난 1894년에는 대내외적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갑오경장이 시작됐으며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 당했다.

이를 빌미로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동학농민군이 한양으로 진격하였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궤멸되었고, 김홍집내각 성립된 해이기도 하다. 경북 안동에서는 최초의 반일 의병운동으로 기록되는 서상철 의병 봉기가 있었으며, 동학교주 최시형이 무장봉기를 선포한 해였다. 그 이듬해에는 일본이 낭인 자객을 보내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한 ‘을미사변’이 발생했다.

이처럼 격랑이 몰아치는 국내외 정세 속에 태어난 포석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어머니 연일정씨와 맏형인 조공희였다. 어머니는 포석에게 부지런하고 어진 마음씨와 다정다감한 정서를 물려 주었고, 선친의 영향을 받아 한시집까지 발표했던 맏형 조공희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을 심어주었다.

조공희는 조선이 일제의 통치하에 들어가지 수십년 동안 외부와 접촉을 끊고 산중에 칩거하며 조국의 망국적 운명을 개탄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가정사는 소년 시절의 조명희에게 큰 인상을 남기게 된다.

교양있고 마음씨 어진 어머니는 어린 조명희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을 즐겨했다. 포석이 문학적 소양을 닦게 되는 단초를 제공해 준 것이 어머니였던 셈이다.

특히 1987년, 포석이 네 살이 되던 해 부친 조병행의 사망은 ‘가장의 부재’라는 큰 짐을 얹어주었다. 거기에 조공희의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 그리고 일제에 대한 항거로 지리산에서 칩거하는 모습은 포석의 삶에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주의를 일깨우는 발화점이 되었다.

 

▲ KGB 지하 감옥으로 통하는 계단.

 

(1) 한인 강제이주정책

1937년 스탈린의 소수민족 말살정책중 하나. 20세기 초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를 반대하는 독립지사들과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연해주 지역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는데, 1937년 스탈린은 이들 한인을 전원 불모의 땅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다. 18만여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반발을 탄압하기 위해 스탈린 정권은 한인 지도급 인사들 2500여명을 잡아들여 반역죄로 처단하게 된다. 연해주 지역에서 한인들로부터 지도자적 존경을 받고 있던 조명희는 1937년 9월 18일 KBG 요원들에 의해 체포된 뒤 1938년 4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 해 5월 11일 총살형을 당하게 된다.

 

(2) 조명희의 출생

포석의 출생연도에는 여러 설이 있다. 호적에는 1894년 6월 16일로 돼있고, 조명희선집과 조선문학사에는 1894년 8월 10일로, 조선문학 간사(한국민중문학사) 조선문학개관에는 1892년으로, 동아일보 90년 5월 1일자 보도에는 1899년으로 나와있다. 1894년 8월 10일을 출생일로 잡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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