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화

얼마 남지 않은 햇빛을 베고 잠들었다 깨어보니 밤이었다 빛 하나 새어들지 않는 태고의 어둠이 고여 있는 깜깜한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먼 크로아티아 동굴 900미터 아래에 살고 있다는 동굴 달팽이 어둠 속에 살다보니 이동 능력을 상실한 것일까 달이 하늘을 지나는 속도보다도 겨울을 지낸 나뭇가지에 목련이 피는 것보다 느린 이 달팽이에게 세상은 얼마나 빠른 변화인가 먼 생을 돌다가 어둠에 익숙한 어느 길모퉁이에 두고 온 내 마음이 아닐까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너의 발자국 소리가 어둠을 만들고 누군가의 가슴으로 스며들지 못한 그저 흔한 안부 인사가 서로를 그리워 할 때 삶은 이렇게 슬쩍 다가와 있는 어둠이 위로가 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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