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밟힌 조국을 침략자 일제로부터 구원하리라”

▲ 포석 조명희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조경희 부인 이구(李求), 조명희 장녀 조중숙, 조명희 부인 민식(閔植), 조명희, 조경희(조명희 둘째 형), 조벽암(셋째형 태희의 장남), 모친 연일정씨.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네 살 때 부친을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란 포석은 진천 고향 마을에서 한문 서당을 다니다가 진천의 성공회에서 설립한 신명학교에 입학하여 신식 교육을 받게됐다. 어린 포석은 소학교 시절부터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드물었다고 한다.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보여 어릴 때 별명이 ‘신동’이었다고 한다.(3)
‘가장의 부재’라는 가족사에서 포석에게 어머니는 매우 강한 영향력을 갖는다.
포석이 열살 때 쯤(1906년)인 어느날 밤에 포석의 어머니는 그때 가정에서 흔히 읽던 소설 장백전(張白傳)을 읽고 있었는데, 포석은 그것을 밤이 늦도록 옆에서 듣고 있다가 소설의 주인공 장백이란 어린 아이가 부모없이 자라다 하나뿐인 누이와 이별하여 만날수 없게 됐다는 내용을 듣고는 펑펑 울었다고 한다. 아마도 어린 포석의 가슴엔 낭만적 감성이 풍부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고, 문학적 관심 또한 이 즈음 싹트고 있던 것이 아닌가 싶다.
1907년 13세 어린 나이에 포석은 네 살이나 연상인 여흥 민씨와 결혼을 한다. 당시 조혼(早婚)은 흔한 일이었다.

 

▲ 조성호씨가 1989년 포석의 맏딸 조중숙(가운데)씨와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왼쪽으로 사촌 고 조중협(성호·철호씨의 부친)·최완주씨 부부. 오른쪽으로 조카 조성호씨, 중숙씨 장남 김왕규씨. 사진촬영은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포석의 후손 조성호(수필가·영진약국 대표)씨는 1989년 포석과 여흥 민씨 사이 장녀인 조중숙씨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할아버지 칠순에 아버지가 태어났다고 해서 ‘칠석’이란 애명으로 불렸고, 어려선 ‘신동’으로 통했다더군.”
파란만장한 생애답게 출생부터 유별났다.
“결혼은 열 세살에 열일곱살인 여흥 민씨와 했지.”
그때는 조혼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칠석’이란 애명을 지니고 있었고 일찍 결혼한 것들을 평시에도 자주 얘기하시던 어머니는, “너무 어려서 신부 있는 방에를 안들어가니까 아버님(조경희 趙庚熙)께서 돈을 쥐어주며 구슬렀다고 하데요” 하며 한마디 거드신다.
“내가 일곱살에 전의로 갔다가 서울로 갔는데 이때는 생활이 곤궁했지. 필동 단간방에서 아버지는 사과궤짝을 책상삼아 원고를 쓰실 정도였으니. 그러나 진천 벽암리 숫말 살 때는 사대부 양반 집안답게 잘 살았다고. 할아버지가 인동부사를 하셔서 우리 집을 ‘인동 부사댁’이니 ‘조 대감댁’이니 하고 불렀으니까. 집도 크고 행랑채에 머슴도 몇 있었고 침모, 찬모를 두었지. 세째 큰아버지(조태희 趙兌熙)가 호탕한 성품으로 서울에서 내로라 하는 한량으로 사시는 바람에 가산이 탕진된 셈이지. 작은 부인도 거느리시고 무관 벼슬로 강화부사령, 중추원 참의를 하셨는데 진천 나들이 오실 때는 병졸들을 거느리고 요란했었다.”
- 포석 맏딸(趙重淑)의 회상 ‘우리 아버지 포석’, 1989년, 조성호 인터뷰.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6학년 쯤 되는 어린 포석을 떠올려 보면 참 재미있다.
그 나이에 무얼 알겠는가. 부부의 운우지정(雲雨之情)을 알턱이 없는 어린 신랑 포석에게 둘째형 조경희는 돈 몇 푼 쥐어주며 어린 동생 부부의 동침을 이끌었다.
‘조 대감댁’으로 불리며 큰 집에다 행랑채엔 머슴 몇 둘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포석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문이 몰락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이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던 포석은 얼마 후 서울로 유학길을 떠난다.
포석이 초등학교 과정을 수료하고 서울 중앙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인 신학문을 접하게 되는 시기는 1910년이다. 그해는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경술국치’가 일어난 해이기도 했다. 일제병탄, 한일합방, 한일합병, 한일병합으로도 부르는 경술년 국치는 조선이 일제침략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강제 편입된 사건이었다.
청소년기 조명희의 성장과 세계관 형성의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1910년을 전후하여 일제의 강점에 의한 망국의 비극적 운명이었다.
경술년 ‘한일합방’ 당시 조명희는 소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년이었던 그는 조국의 비극에 대하여 담임 선생님이 비통한 연설을 학생들에게 하던 연설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대로 옮겨 어머님과 누나를 울리고 자기도 울었다. 어린 소년이었지만, 포석의 가슴 속에는 이미 일제의 폭압적 강점에 대한 분노이 이미 가득 차 있었다.

14∼15세 소학 시대인 듯싶다. 그때가 마침 한일합병 때인데 학교 선생님이 생도들에게 격렬한 연설을 하는데 감동이 되어 여러 생도들과 같이 울어본 일이 있다. 그리고 나서 집에 돌아와 선생이 하던 거와 마찬가지로 집안 식구에게 연설을 하여 어머니와 누이를 울리고 자기도 울었다. 이것이 무슨 깊은 의식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더라도 꽤 서럽던 것은 지금 기억에도 떠오를 만한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중학을 다니다 말고 집에 가서 몇 해 동안 놀고 있을 때에 무슨 책 같은 것을 읽으려 하였으나 그때는 사회 견문도 퍽 좁은 만큼 그때에 말하는 소위 신문화에 대한 서적이라고는 별로 얻어볼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였다.(그때에 이원조(李源朝)니 이인직(李人稙)이니 하는 이의 값 없는 가정소설은 웬만큼 읽었지만) 그러다가 조선에서 처음으로 쓴다는 이들의 신문 연재 번역소설 ‘오무정’(아마 민우보(閔牛步)의 번역인 듯싶다)을 탐독하다가 맨 끝에 주인공 장팔찬(그때 번역한 이름)이 사랑의 다만 하나인 고설도(이것도 번역한 이름)를 그의 애인에게 빼앗기고 혼자 번민하는 데 이르러 가슴이 뻑적지근하도록 느끼어 보았다. 그때 저녁 때가 되어서 밥 먹으라고 조르는 집안 사람들의 소리가 듣기 싫어서 보던 신문을 들고 뒷동산으로 올라가 잔디밭의 눈 녹은 자리를 골라 앉아서 추운 줄도 모르고 읽던 소설 끝을 다 읽고 내려와 본 적이 있다. 작품으로서 감격하여 보기는 이것이 처음인 듯싶다. 그리하여 이 위고의 인도적 정신이 어느 정도까지 요량(料量) 미정(未定)한 내 사상(思想)과 감정(感情)을 지배하여 오기까지 되었다.
- 느껴본 일 몇 가지, 1926년 6월 1일, 개벽 70호, 조명희

1914년 봄, 조명희는 중앙고보를 중퇴한다. 오래전부터 뜻을 두고 있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짓밟힌 조국을 침략자 일제로부터 구원하리라.’
포석은 이제 18세의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4년 전 소학교 선생님들이 격렬하게 쏟아내던 말들이 떠올랐다.
“이제 조선은 없습니다. 조선이란 나라는 오늘 저 흉악하기 그지없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나라 잃은 국민이 되었습니다. 저 승냥이같은 일제에 맞서 싸워 다시금 나라를 되찾을 때까지 우리는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술국치 때 선생님들이 토해내던 이런 말과 저런 말들이 난분분 피끓는 청년 포석의 가슴을 후벼팠다.
그때는 잘 알지 못했었다. 다만 선생님들을 격노케 한 ‘국권 상실’이라는 것이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는 짐작 뿐이었다. 해서 ‘무슨 깊은 의식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고 단지 ‘격렬한 연설에 감동’이 되어 ‘꽤 서럽던’ 것으로 경술국치는 포석에게 다가왔었다.
이제, 가슴 뜨거운 청춘, 피끓는 열 여덟의 포석에게 그날의 치욕이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지 다시금 되새겨지고 있었다.
‘짓밟힌 조국을 침략자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선 지금의 나여서는 안된다. 뜻을 이루기 위해선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힘을 길러야 한다.’

그는 중앙고보를 중퇴하고 가출을 시도했다. 북경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였다.
포석이 힘을 기르고자 북경사관학교 입학을 시도한 데에는 당시의 반일 애국운동에 따라 유포되던 애국적 영웅 전기가 큰 영향을 끼쳤다.

 

(3) 조명희의 이름에 대하여
족보에는 자(字) ‘경덕(景德)’ 호(號) ‘포석(抱石)’으로 되어 있다.
애명으로 ‘칠석’, ‘신동’으로 불림.
하동호가 지은 ‘한국근대문학 서지연구’(깊은샘신서2)에서는 ‘명희·목성(木星)·적로(笛蘆)·포석(包石)·포석抱石’으로 필명이 적혀 있다.
황동민의 선집에서는 “1924년 적로(笛蘆)라는 별호로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내놓았다”고 했으나 이기영은 같은 선집에서 “1920년부터 시작하여 동 23년 전반기까지 그는 로적(蘆笛)의 필명으로 시를 썼다. 그리고 1923년 후반기부터는 포석(抱石)의 필명으로 100여편의 시를 창작하였다”고 하여 적로(笛蘆)와 로적(蘆笛)을 혼동되게 필명으로 내세운다.
이는 시집 ‘봄 잔디밭 위에’의 서문에서 포석(抱石)을 적로형(笛蘆兄)이라고 호칭한데서 혼란이 온 것 으로 보이는데 하동호의 앞의 ‘서지연구’에서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적로(笛蘆)란 호가 있음을 서문을 인용하면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기영의 노적(蘆笛 갈대피리)이란 필명이 더 적확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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