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행’ 실패한 뒤 고향에 내려와 독서에만 몰두

▲ 지난 5월 14일 개관한 포석 조명희 문학관.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로, 1층은 조명희 선생의 문하세계를 보여주는 전시실로, 2층은 지역 문인들이 집필활동과 문화 교류 등을 할 수 있는 창작문학사랑방과 문학연수실, 학예연구실로, 3층은 문학제와 학술발표회 등이 가능한 126석 규모의 세미나실로 구성돼 있다. 조명희 문학관이 세워진 장소는 포석이 어린시절 뛰놀았던 고향 진천읍 벽암리의 뒷산이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을지문덕전, 이순신 실기, 김유신전 등은 청년 포석에게 꿈을 심어주었고, 민족주의적 의식을 심어주었다. 또 유렵의 역사·영웅 소설들을 그때 조선 현실에 맞도록 번안한 많은 번역 소설들의 탐독도 포석에게 불의와 타협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이러한 류의 소설들은 당시 조선의 지식 청년, 특히 학생계에 널리 전파된 ‘영웅 숭배열’을 낳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원대한 꿈’에도 불구하고 포석은 둘째형 경희에게 잡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포석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울분을 달래며 신소설과 국내외 소설을 탐독하게 된다.

황동민 교수는 이 당시를 이렇게 적고 있다.

 

사회와 사회발전을 올바르게 관찰하는 세계관을 아직 소유하지 못한 중학생 조명희도 당시 역사적 제한성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영웅 숭배열’에 열중하였다. 그는 조국의 운명을 인민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도 몇 명 영웅들의 역할에 달려 있는듯이 간주하고 ‘영웅’의 길을 밟으려고 작정하였었다. 그리하여 1914년 봄 어느날 다니던 중학교를 중퇴하고 북경 사관학교에 들어가려고 북경을 향하여 서울을 떠났다.

‘영웅 숭배열’에 들뜬 조명희는 수중에 돈 한 푼도 없이 다만 열독하던 ‘애국소설’과 ‘영웅 전기’ 몇 권을 걸머지고 도보로 갔다. 그리고는 벌써 조국을 위하여 ‘위대한’ 공훈을 세울 시일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영웅’을 꿈꾸고 나선 조명희는 북경으로 가는 도중 평양에서 그의 중형에게 붙잡혀 집에 돌아왔다. 이 희비극은 조명희로 하여금 앞으로 ‘영웅’의 길을 문학의 길로 바꾸게 한 동기도 되었다.

- 조명희 선집, 1959년, 황동민의 서문.

 

둘째형 경희에게 평양에서 잡혀 실패하게 된 ‘북경행’으로 포석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고향에 내려와 독서에 몰두한다. 이때 그는 수 없이 많은 조선 이야기책과 ‘삼국지’ 같은 중국 소설들을 탐독했다. 그러나 소일삼아 읽어본 이 책들이 그로 하여금 문학에 뜻을 두게 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열독(熱讀)이 포석으로 하여금 문학적으로 성숙하기 위한 자양분을 흡수한 ‘문학적 발아기’였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청년 포석에게 영웅숭배열은, 영웅을 꿈꾸며 빼앗긴 조국을 구원하겠노라던 당찬 포부는 그러나 무르익은 알곡이 아닌 쭉정이에 불과했다. 동인(動因)은 봐줄만 했지만 구체적 실천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었다.

막연히 북경 사관학교에 들어가기만 하면 조국의 독립을 위한 모든 것을 갖출수 있을 것이라는 낭만적 사고의 위험성을 둘째형 경희는 간파했을 것이고, 하여 그는 포석의 북경행을 좌절시켰던 것이다. 그때 둘째형의 저지가 없었다면 오늘날 민족민중문학의 선구자로 한국문학사에 새 지평을 열고, 재소 한인문학의 시조로 불리며 추앙받는 포석은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시기를 회상하면서 조명희는 그의 자서전적 작품인 ‘생활기록의 단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요사이 내 생각에는 무엇을 쓴다면 창작 같은 것이나 쓸 일이지 수필 같은 한담 만문은 쓰지 말았으면 한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생활이 절박하여 가고 마음이 긴장하여 갈 때이므로 따라서 반드시 써야만 하고 읽어야만 하겠다는 글 이외에는 읽기도 싫고 쓰기도 싫은 까닭이다.

수필이라고 모두가 한담일 리는 없겠지마는 대개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쓰려는 것도 또한 한담 비슷한 것이기에 마음에 실쭉하여지기는 한다마는 아무렇게나 써보자.

신구 소설 탐독

내가 중학교를 다니다가 말고 고향집에 내려가 있을 때이다. 그때에 소설이란 것을 탐독하게 되었었다. 그 소설을 읽기 비롯한 동기는 이렇다. 중학시대 그때까지도 한창 학생계 풍조라고 할 만한 영웅 숭배열에 들떠서, 다니던 학교를 중지하고 북경 사관학교에 들어가려고 북경행 목적을 가지고 평양까지 갔다가 중도에서 그만 집으로 붙들려 온 터이다. 그리하여 이 연소 장부의 뜻을 이루지 못한 끝에 울분을 견디지 못하여 소일격으로 소설이란 것을 읽었다. 읽어보니 재미도 난다. 사기도 하고 얻기도 하여 될 수 있는대로 많이 읽었다.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을 적어본다면 ‘홍도화’, ‘치악산’, ‘귀의성’, ‘추월색’, ‘구운몽’, ‘옥루몽’, 중국 소설로는 ‘삼국지’ 이밖에도 수없이 많이 읽었다. 그 가운데 ‘옥루몽’, ‘삼국지’ 하는 것은 달포씩 두고 그것만 잇따라 읽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문예란 것에 뜻 두기는 커녕 문예라는 말의 의미도 글자까지도 몰랐었다.

그러다가 신문에 나는 번역 소설을 처음 읽게 되었다. 그 번역 소설이란 것은 곧 그때 ‘매일신보’에 연재되던 민우보 역인 ‘오무정’이다. 나는 이때껏 소설 읽어보던 가운데 감격하여 보기는 이때가 처음이다. 주인공 ‘장팔찬’(그때에 그렇게 쓰이던 이름)이 죽는 데까지 이르러서는 가슴이 뻐근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었다.

그때에 나는 “나도 이러한 소설을 써 보았으면!”하는 충동이 몹시 생기었다. 그러나 써 볼 엄두는 물론 내보지도 못하였다. 그러다가 당시 신문들과 잡지들에 게재된 신문예 창작물들을 애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도 문예를 하여 볼까 하는 생각이 싹도 텄었다. 그리하여 단편소설 몇, 시 몇 개를 시험삼아 써보기도 하였다.

그 다음에는 일본 소설, 일본문 문예잡지, 문예잡지라 해도 지금 그저 있는 문예 구락부가 일본 문예계의 유일한 잡지인 줄 알고 사 보았었다.

그 결과가 나로 하여금 연문학(軟文學)의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정서, 그런 가운데에도 성(性)의 냄새가 비릿하게 나는 구덩이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그때야말로 여러 여러 세기를 두고 고루 협착한 봉건적인 유교 윤리사상에 압착되었던 조선 청년이 가지록 성의 해방, 감정의 해방의 첫 소리를 맞아들임에 가슴이 뻐근하게 뛸 때가 아니었던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 고독의 비애!” 하고 소위 신문학 선도자의 입에서 나오는 이 따위의 말만 들어도 우리의 신경은 선뜻선뜻하여지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백지같던 나의 머리 속에는 ‘연애만능’이라는 정신이 새까맣게 꽉 들어찼었다. 연애를 제해 놓고는 모든 것이 다 인생에게 아무 가치가 없는 줄로 알았었다. 이것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나의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성적으로 번민이 많은 청춘 시대니까 생활 문제가 성에 가서 많이 있겠지마는 그것이 생활의 전부, 인생의 전부로 알게 됨은 그 원인이 조선에 처음 불어들어 오는 계몽적 문예사조가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친 데에도 있다고 할 수 있다.

- 생활기록의 단편 ‘문예에 뜻을 두던 때부터’ 1927년 3월 1일, 조선지광 65호, 조명희.

 

포석의 문학적 정체성이 확고해진 1927년에 쓴 글이니 ‘수필 같은 한담 만문’이나, 문예라는 것에 뜻을 두고 ‘연문학(軟文學)의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정서, 그런 가운데에도 성의 냄새가 비릿하게 나는 구덩이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된 ‘연애 만능의 글’이 포석에게는 그저 허접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북경행이 불발로 끝난 1914년부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1919년까지의 시간은 포석에게 그의 글처럼 ‘한담 만문(閑談 漫文)’ 같은 시기였다.

소소한 일상은 게으르게 흘러갔고 게으른 일상에서 그는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포석이 스물 한 살이던 1915년 11월 3일 장녀 중숙(重淑)을 낳게 되는 ‘생산적인 일’ 말고 그가 고향 진천에서 할 일은 별로 없었다. 1914년 서울고보를 중퇴한 후 5년 동안 그는 줄곧 고향 진천에서 하릴없이 지내고 있던 터였고 복학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포석이 늘 품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책이었다.

‘영웅 숭배열’을 그에게 심어준 을지문덕전이나 이순신전, 김유신전 대신 고향에서 그는 ‘홍도화’, ‘치악산’, ‘귀의성’, ‘추월색’, ‘구운몽’, ‘옥루몽’을 읽었고, 중국 소설로 ‘삼국지’, ‘수호지’ 등 눈에 보이는대로 수없이 많이 읽었다. 또 ‘매일신보’에 번역소설로 연재되던 민우보 역 ‘오무정’을 읽었다. 일본 소설, 일본 문예잡지인 문예구락부 등도 탐독했다. 그 가운데 포석에게 가장 큰 감명으로 다가온 것은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레미제라블’이었다. 가난한 사람, 보통사람에 대한 위고의 깊은 인도주의적 시각이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진천 벽암리 뒷동산(현재 ‘조명희 문학관’ 자리)에 올라 책 읽는 것을 젊은날의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던 포석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 정창훈 충북보건과학대 교수가 제작한 조명희 동상. 조명희문학관 정원에 세워져 있으며 5.7m의 높이로 전국 문학관 동상 중 최대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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