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만세 소리는 방방곡곡 함성되어 퍼져나가고

▲ 3월 1일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을 그린 그림. 길선주와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는 지방에 있어서 불참해 33인 가운데 29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세간에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됐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게다가 데라우치 마사타케에서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으로 계승된 일제의 무단통치는 조선 백성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안했다. 일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선 이전 해인 1918년부터 이미 ‘모종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만주 지린에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1918년 말 무오 독립선언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였고, 조선 재일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2.8독립선언이 있었다.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은 당시 와세대대학 철학과 학생이었던 이광수가 원문을 쓰고 영문으로 번역했다.

이 선언은 만주 지린의 무오 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규식의 지시에 따라 조소안이 동경에 파견돼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이뤄진 것이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알기기 위해서는 누군가 소요사태를 일으켜야 한다는 김규식의 발언과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서거가 독살때문이었다는 이야기는 민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고종의 죽음 역시 국민적 감정을 자극해서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종황제가 이 왕세자와 나시모토 공주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예전에 이미 굴욕을 감수한 고종황제가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나? 더구나 어린 왕세자와 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런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서 두 왕실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도 더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에 고종황제가 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가면서 고종황제를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 윤치호 일기, 1919년 1월 26일.

 

윤치호는 3.1운동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변절자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경성일보 1919년 3월 7일치 기자회견을 통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마는,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에 대해서 그저 덮어 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심한 비판을 받게 됐다.

 

분통함과 절망과 실낱같은 희망이 공존하는 시기, 1919년 3.1운동을 준비하는 시간표는 그렇게 준비되고 있었다.

거사 발발 이틀 전인 1919년 2월 27일 보성사(普成社).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이 인쇄소를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申哲·일명 신승희)이 급습했다. 철컹철컹 바쁘게 돌아가는 인쇄기에선 독립선언서가 찍혀나오고 있었다. 독립선언서의 작성을 천도교 측에서 담당하기로 했었다. 원고 지침에 따라 최남선이 기초하고, 오세창이 인쇄의 총책임을 맡아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 사장인 이종일에게 총실무를 담당하게 했었다.

신철은 이종일이 보는 앞에서 윤전기를 멈추고 인쇄물을 빼보았다. 긴장된 순간, 모든 일이 허사로 그칠 위험스런 상황이었다.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훑어보던 신철은 그러나 그냥 돌아갔다. 이종일이 최린에게 보고하자 최린이 신철을 불러 식사에 초대하여 돈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 권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일본측 기록에는 그가 돈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고 한국측 기록에는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신철은 만주로 갔다가 두달여 만에 돌아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됐다. 독립운동을 알고도 눈감아 준 죄였다. 그는 결국 감옥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애국지사의 움직임을 감시하며 잡아가두기로 악명 높았던 그가 자신의 마지막 삶의 행로에 민족적 거사를 암묵적으로 도왔다는 것은 그 또한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거사가 발각돼 차질을 빚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고종 인산일인 3월 3일로 예정됐던 거사를 3월 1일로 앞당기게 되었다. 그렇게 인쇄된 2만1000장의 독립선언서는 오세창의 총책임 아래 천도교, 그리스도교, 불교, 학생단 등으로 분담하여 전국적으로 배포되었다.

 

▲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

3.1운동은 천도교의 대표인 손병희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당시 보성학교 교장 최린이 “독립선언서는 우리 민족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으로, 이렇게 중요한 글을 쓸 사람은 최남선밖에는 없다”고 추천하여 최남선이 기초하였으나, 만해 한용운은 이 선언서를 보고 “너무 어려운 한문투인 데다가 내용이 온건하다”며 다시 쓰기를 자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천도교와 기독교 인사들의 연합으로 만세 시위 계획과 장소가 결정되었고, 불교계의 대표로는 한용운 등이 참여하였다. 최남선의 초안에 춘원 이광수가 교정을 보고 만해 한용운이 공약 3장을 덧붙이게 된다.

그리고 민족대표들은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 모여 ‘유혈 충돌을 막기 위해’ 약속 장소인 탑골공원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그들이 모일 장소를 태화관(泰和館)으로 바꾸었다.

 

아이러니 한 것은 태화관이 본래 이완용의 별장이었다는 것이다. 을사오적인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태화관에서 정사를 논하기도 했다. 이완용이 이사하며 요리집이 개점했는데, 모체인 명월관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조선이 멸망하면서 실직한 궁중요리사 안순환이 궁궐 요리를 일반인들에게 소개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안순환은 한말에 궁내부 주임관(奏任官)과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있으면서 어선(御膳)과 향연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1890년 관기제도가 없어지자 지방과 궁중의 기녀들이 명월관에 모여들었고, 명월관은 사교장으로 유명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명월관은 친일파들이 매국한 돈으로 방탕하게 노는 곳이 되었다. 이완용, 송병준, 이지용 등의 상징적인 친일파들이 단골손님이었다. 1918년 화재로 명월관이 없어지자 안순환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에 명월관의 별관인 태화관(처음에 太華館이었던 이름을 泰和館으로 개칭)을 열어 기생들과 양악대가 춤과 노래를 제공하는 영업으로 손님들을 불러모았다.

 

1919년 오후 2시 태화관.

민족대표 33인(4) 가운데 29명이 모였다. 길선주와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는 지방에 있어서 불참했다. 태화관에 모인 29명의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다. 그들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을 불러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게 해 일본 경찰에게 자진 연행되어 갔다. 당시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올 때에 인력거를 가지고 오자, 자동차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리고 택시 일곱 대에 나눠타고 경무 총감부에 갔다.

처음 거사를 계획했던 파고다 공원에도 5000여명이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정재용(鄭在鎔)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다.

 

▲ 3.1운동 당시 만세를 부르던 백성들.

 

己未 獨立 宣言書(기미독립선언서)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매주 월요일 연재>

 

(4)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손병희(천도교·당시 나이 59·생몰년 1861∼1922년) 3년형받은 뒤 병보석 출감후 사망. △길선주(기독교·51·1869∼1935년) 33인 중 유일하게 무죄로 석방. △이필주(기독교·51·1869∼1942년) 2년 복역. △백용성(불교·56·1865∼1940년) 1년 6개월 복역. △김완규(천도교·44·1876∼1949년) 2년간 복역. △김병조(기독교·44·1877∼1948년) 3.1운동을 선천에서 지휘. △김창준(기독교·31·1889∼1956년) 민족대표 최연소. △권동진(천도교·59·1861∼1947년) 3년간 복역. △권병덕(천도교·53·1867∼1944년) 2년간 복역. △나용환(천도교·56·1864∼1936년) 2년간 복역. △나인협(천도교·49·1872∼1951년) 2년간 복역. △양전백(기독교·51·1869∼1933년) 3년간 복역. △양한묵(천도교·58·1862∼1919년)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 △유여대(기독교·42·1878∼1937년) 2년간 복역. △이갑성(기독교·31·1889∼1981년) 2년 6개월 복역. △이명룡(기독교·47·1872∼1956년) 2년간 복역. △이승훈(기독교·56·1864∼1930 년) 3년형 선고받고 복역중 가출옥. △이종훈(천도교·65·1858∼1931년) 2년 복역. △이종일(천도교·62·1858∼1925년) 3년형을 받고 고문후유증 사망. △임예환(천도교·55·1865∼1949년) 2년간 복역. △박준승(천도교·54·1866∼1921년) 2년간 복역 중 사망. △박희도(기독교·31·1869∼1951년) 변절. 2년 복역. △박동완(기독교·35·1885∼1941년) 2년 복역. △신홍식(기독교·48·1872∼1937년) 2년 복역. △신석구(기독교·45·1875∼1950년) 2년 복역. △오세창(천도교·56)1864∼1953년) 3년 복역. △오화영(기독교·40·1880∼1962년) 2년 6개월 복역. △정춘수(기독교·45·1875∼1951년) 변절. 1년 6개월 복역. △최성모(기독교·47·1874∼1937년) 2년 복역. △최린(천도교·42·1878∼1958년) 변절. 3년 선고 받고 가출옥. △한용운(불교·41·1879∼1944년) 3년 복역. △홍병기(천도교·51·1869∼1949년) 2년 복역. △홍기조(천도교·60·1865∼1938년) 2년 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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