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 김주희(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개인으로는 불행이고 작가로서는 행복이라고 한국동란을 겪은 작가가 말했던가. 불행이 관념이 아니라 실체이고, 매일 겪는 고통이 현실이기 때문일 터. 불행은 단지 불행이 아니라 매일 겪는 지옥같은 고통이 현실이므로 그 현실을 적는 일이 절절한 작품으로 나타날 수밖에는 없을 터. 박완서 선생은 전쟁이야기를 여럿 썼다. 세 살 되던 해 돌아가셨다는 아버지 이야기, 육이오 때 피난도 못하고 서울에 남아 빈집 털이를 해다 생계를 잇던 고단함, 전쟁통에 누군가에게 발각될까봐 숨어 앓다가 따순 밥 한 술 못 뜨고 죽은 오빠, 함께 부부로 살다가 먼저 간 남편, 사랑스럽던 막내 아들의 죽음까지 집 안의 남자들과 이별하면서 살아온 한 생의 이야기에는 이렇게 저렇게 모두 전쟁이 얼마쯤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사는 것도 전쟁이고 떠나보내는 것도 전쟁이기 때문일 것이다. 죽은 이들을 사랑하는 작가의 방법은 그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기억하는 것이겠다. 안타깝고 아까운 목숨들이고, 피붙이의 죽음은 객관이 될 수 없는 절절한 것이며, 그냥 없던 것으로 할 수 없는 특별한 관계이기 때문에 이야기로 불러내고, 이야기로 기억하고 이야기로 기록하는 ‘이야기라도’ 하는 것이리라. 작가는 죽음의 이야기들을 피하지 않고 들여다 보고 되풀이 했다. 아깝다고, 전쟁은 이 아까운 목숨들을 흔적도 없이 해버렸다고. 육친의 피붙이들 이야기들을 통해 아깝지 않은 목숨이 없다고 썼다. 뭔가를 이룬 이는 공적 때문에 아깝고, 그저 산 이는 그래서 아깝고, 오래 산 이는 오래여서 안쓰럽고, 일찍 떠난 이는 일찍 이어서 안타깝고.
  이 시대 우리 사회는 이런 저런 일로 죽음이 많다. 죽음이 많은 시대, 수명도 많다고 한편에서는 사는 걸 걱정하라고 부추긴다. 아주 오래 살게 된 시대라고 한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앓는 이도 많고, 병에 걸리는 이도 많건만, 아주 오래 살게 되었다고, 그러니 노후대비를 엄청나게 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어댄다. 젊은이들은 일을 얻자마자 아무 것도 하지말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고, 중년들은 지금부터라도 돈을 있는 대로 긁어모으라고, 더더더 모아 놓으라고 한다. 우리 부모세대가 ‘자식’들에게 전부를 걸었다면 우리 세대는 ‘자신’의 노후를 위해 누구를 위해서도 돈을 쓰지 말고 모으기만 해야 한다고 위협당하는 중이다. 병원에 돈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늘어나지 않을 수명이고, 평균이라는 말은 모두가 그렇게 된다는 것도 아니지만 자주 듣다보면 수명연장이 복이 아니라 재앙으로 다가온다. 특히 우리 세대가 책임져야할 부모 세대의 수명이야기는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되기도 한다. 예전에 약 한 첩 못써보고 돌아가셨다는 부모들 이야기가 현대는 ‘장기 한 번 못 갈아보고’라는 수사로 갈 것인지 어쩐지. 그 난리는 주로 은행권이나 증권계나 보험 업계에서 유포한다. 부모세대는 ‘자식’을 위해, 우리 세대는 ‘자신’을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라는 구조로 간다. 어차피 그런 거라면 어느 세대가 더 윤리적인가를 물을 새도 없다. 
 기왕 현재에 뭔가를 참고 견뎌야 한다면 어린 것들 미래를 위해 눈이라도 틔워주는데 거는 것이 그나마 보람있는 건 아닌가 싶은데 그게 아니라고 돈 장사를 하는 무리들은 자기들에게 돈을 맡기라고 난리를 친다. 희생하고 헌신하지 말란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도 쓰지 말라면 도대체 사회의 어두운 곳을 위해서 쓰는 일은 언감생심, 꿈이라도 꾸어볼 수 있으려나. 인문학 열풍이라는데 삶을 협소하게 만드는 담론들을 또 보게 된다. 철학을 한다는 어떤 이는 종교는 미래를 이야기하고 철학은 현재를 이야기한다면서 현재 잘 살면 된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모두가 미래만 보고 있다면 그 말이 맞겠지만, 지금 이 시대는 지나치게 현재를 보고 있어서 문제는 아닌지. 긴 수명도 전염병도 경제를 두려움으로 몰아가는 이 분위기는 덮어둬도 되는지를 말해봐야 하는 건 아닐는지. 우리 목숨의 근본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피하는 것인지도, 소문으로 .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