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각 교수, '…명성황후를 찌르다'로 통설 뒤집어

▲ 명성황후가 시해된 건천궁 옥호루 앞마당. 가운데 흑백사진은 1900년대 초 옥호루 모습이다.

(동양일보) "명성황후 시해범은 '일본 낭인'이라는 게 통설이다. 그러나 시해범은 단순한 낭인이 아닌 일본군 경성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였다.“

을미사변 때 경복궁 안의 담장을 넘어들어가 명성황후를 칼로 참혹하게 찌른 시해범은 통상적으로 알려진 익명의 '일본 낭인'이 아니라 당시 일본군 경성수비대 장교였던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였다는 사실을 밝혀낸 역사서가 출간됐다.

이종각 동양대 교양학부(한일관계사) 교수는 저서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를 통해 을미사변의 주범이 일본군 현역 장교였음을 밝혀냈다. 이 교수는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당시 주한영사관이 본국 외무차관에게 보낸 '우치다 사신'과 '우치다 보고서' 등을 제시했다.

광복 70주년인 올해는 을미사변 120주년이기도 해 한일 관계 과거사를 재정립하는 데도 이 책이 일정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30분께, 소총으로 무장한 한 무리의 군대와 일본도 등 흉기를 든 일본인 폭도들이 경복궁의 광화문 앞으로 몰려들면서 본격 시작됐다. 조선 주둔 일본군 부대인 경성수비대와 일본군 장교로부터 교육받는 조선훈련대, 일본 공사관원과 영사관원, 경찰과 낭인 등으로 구성된 한일 혼성부대였다.

이들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탄 가마를 앞세워 호위하면서 일제히 광화문을 통과한 뒤 건청궁으로 난입한다. 조선 왕비인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이른바 '여우사냥' 작전이었다.

일본 측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을 물리치고자 했던 명성황후를 제거할 목적으로 왕비의 아버지이자 정치적으로 견원지간이었던 대원군을 '괴뢰'로 내세워 쿠데타를 위장한 살해작전에 나섰다.

왕비 침전에 난입한 일본인 폭도들은 왕비와 궁녀들을 무참히 살육한 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왕비 사체를 부근 녹산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끼얹어 불태웠다. 그리고 타다 남은 유해를 근처 연못에 버렸다가 증거 인멸을 위해 다시 건져 녹산에 묻었다.

일국의 왕비가 자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그것도 시위대가 지키는 왕궁 안에서 외국 군대와 폭도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고 불태워지는 전대미문의 참사가 발생한 것. 하지만 시해 1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범인의 정확한 정체는 밝혀지지 않은 채 단순히 낭인들에 의한 시해 정도로 얼렁뚱땅 치부해왔다.

이 교수는 청일전쟁 후 동아시아 패권을 다투던 일본 정부가 왕비 살해라는 막중한 임무를 깡패나 다름없는 낭인패들에게 맡겼을 리가 없다는 의문에서 출발해 자료 탐색에 나섰다. 을미사변을 바라보는 시각틀 자체를 바꾼 가운데 사건과 범인의 정체를 제대로 밝혀야 당시의 진상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저자가 명성황후의 직접적 시해범으로 미야모토 소위를 지목하는 결정적 단서는 을미사변 당일에 우치다 사다쓰치 주한영사가 본국의 하라 다카시 외무차관에게 보낸 '우치다 사신'. 이는 현존하는 을미사변 관련 기록 중 그 전말을 가장 충실하게 적은 문서로 평가받는다.

사건 발생 후 뒷수습에 깊숙이 관여했던 우치다 영사는 이 비밀 서한에서 "살해당한 부녀 중 한 명은 왕비라고 하는 바, 이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소위"라고 언급한다. 당시 경성수비대에는 모두 4명의 소위가 있었는데 그중 살해 현장에 난입한 유일한 인물이 바로 미야모토 소위였다고 이 교수는 밝힌다. 우치다 영사는 사건 한 달 뒤 히로시마 지방재판소 검사장에게 보낸 공전(公電)에서 "왕비는 먼저 우리 육군사관의 칼에 맞고"라고 증언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육군사관' 역시 미야모토 소위다.

이와 함께 미우라 고로 공사는 사건 발생 6일 만에 이토 히로부미 총리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이번 사건은 그 방법이 다소 졸렬하여 남루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는 비방은 면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본시부터 만부득이한 출발로써 능히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 사실이라, 이렇게 얻은 과실은 끝까지 상실치 않도록 힘써주시라"고 언급한다. 물론 이웃나라 왕비를 무참히 살해한 데 대한 죄책감이나 반성, 사죄의 기미는 전혀 없다.

당시 사건현장에 있던 미야모토 소위와 마키 특무조장은 사건 한 달여 뒤 본국으로 소환된 뒤 참고인 조사를 대충 받았고, 다시 1년 9개월 후에 타이완 헌병대로 발령난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마야모토를 (타이완으로) 보낸 배경에는 그가 일본에서 계속 생활할 경우 을미사변에서 자신이 한 역할을 발설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어서였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야모토는 타이완 항일투쟁자들과 교전중 사망하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는 못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웃나라 왕비를 살해한 자를 야스쿠니 신사에 다른 전사자와 합사해 '천황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으로 모시는 사실이 훗날 밝혀질 경우 국내외로 큰 물의를 빚을 가능성을 우려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을미사변의 총책임자로 지목된 미우라 공사를 비롯해 일본인 56명(군인 8명, 민간인 48명)은 사건 3개월여 만에 모두 무죄 판결을 받는다.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참사이자 민족 자존심을 짓밟은 을미사변은 커다란 상처만 남긴 채 이처럼 허무한 결말을 짓고 말았다고 저자는 안타까워한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