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희(청주 대성중 교사)

▲ 최영희(청주 대성중 교사)

해마다 유월이면 국민들의 가슴은 파랗게 멍이 들고 속은 까맣게 타기 마련이다. 어느 누구인들 이 유월의 아픔에서 빗겨 설 수 있을까? 민족은 두 동강이 난 채로 벌써 70년의 세월이 흘렀음을….
잊고 싶었던 2014년.
일 년 전이지만 어릴 적 입가에 묻은 오디의 까만 물처럼 좀체 지워지지 않고 가물거린다. 피붙이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소중했던 분,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던 그분이 바람처럼 갑자기 내 곁을 아니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러다 그 이별의 아픔을 채 추스르지도 못하여 바로 서지도 못할 만큼 휘청거리고 있을 때, 올해 또 한 번 살점을 한 움큼 도려내는 듯한 이별을 맞이했다. 뜻밖의 이별은 사람을 소심하게 만들고 두렵게 만들고 죄책감이라는 누에고치 안에 갇혀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고 그 굴레 안에서만 머무는 번데기처럼 우리를 쪼그라들게 만든다.
아마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아내와 함께 즐겨보던 치매에 걸린 엄마를 지키고자 하는 가족 드라마 보면서 한 동안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저녁 한 때를 보낸 터라 그 여운이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드라마 중에 어쩌다 정신이 돌아온 아내가 언제 다시 정신을 놓을지 몰라서 급한 마음에 하나씩 정리하려고 하면, 남편은 아내에게 “나중에 하고 지금은 좀 편히 쉬어”라고 말을 건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나중’을 기약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 그 나중을 결코 다시 맞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데에 생각에 미친 까닭이다. 아무도 모르는 어느 날 갑자기 삶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들이 생각난 탓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장공 6년조(莊公六年條)>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 문왕(文王)이 신(申)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등(鄧)나라를 지나야 했는데, 등나라 왕 기후(祁侯)가 문왕의 삼촌이었다. 문왕이 병사들을 이끌고 등나라에 도착하자 기후가 문왕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이때 기후의 신하 추생, 담생(聃甥), 양생(養甥)이 “문왕은 머지않아 우리 등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지금 없애지 않으면 배꼽을 물려고 하여도 입이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늦기 전에 계획을 세우십시오”라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조카를 죽이면 사람들이 자신을 욕할 것이라고 묵살하였다가 10년 후 조카 문왕에 의해 멸망되었다.
 ‘서제막급(?臍莫及)’은 일이 그릇된 뒤에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음을 비유한 말로 ‘후회막급(後悔莫及)’과 비슷하다. 사람에게 붙잡힌 사향노루가 자신의 배꼽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붙잡힌 줄 알고 자신의 배꼽을 물어뜯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있을 때 잘 해’라고 말은 쉽게 하지만 정작 곁에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다가 떠난 뒤에서야 후회하게 마련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수선한 때이지만 갑자기 다가올 이별에도 마음 아프지 않도록 ‘서제막급(?臍莫及)’하는 일을 만들지 않아야겠다. 어느 날 홀연히 그 사람이 떠난 뒤에는 아무리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으므로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있을 때 잘 해’야겠다.
무심코 하는 행동과 말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삶의 마지막 순간일 수 있음을 기억하고 성경 말씀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지금 내 곁에 머무는 그 사람들을 사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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