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순(논설위원 / 문학평론가)

▲ 연은순(논설위원 / 문학평론가)

 몇 달 전, 타고 다니던 차를 처분했다. 나이가 들수록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게 되고 차 운행을 너무 안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자동차 정기점검을 받으러 갈 때마다 담당 기사는 이렇게 차 운행을 하지 않으면 차에  좋지 않다는 말을 인사처럼 했다. 일 년에 오천 킬로도 타지 않으니 정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런 말을 할 만 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정기적으로 대학에 강의하러 나가기도 하고 호텔 사업으로 장거리 운전을 하느라 차는 당연히 필수품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점점 일을 줄이고 장거리 갈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니 굳이 차가 필요한가 하는 의문가 들었고 우연한 기회에 문득 차를 처분하게 된 것이다.
 운전을 거의 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남편은 차 없이 얼마나 오래 버티나 한 번 보자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차 없이 살며 새로운 생활패턴을 즐겨보는 것도 좋겠다는 말을 했다.
 차를 처분하고 나서도, 오랜 시간 차를 소유했던 탓에 어쩌다 외출할 때면 습관적으로 발길이 주차장 쪽으로 향했고 아치 싶어 다시 택시 타는 곳 쪽으로 향하는 일이 많았다. 시간에 쫓기는 상황에서 택시를 잡지 못할 때면 이럴 때 차가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운전을 하지 않고 택시를 이용하다 보니 뒷자리에 편히 앉아 바깥 풍경도 구경하고 택시 기사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차를 처분하고 지내다 보니 그동안 운전을 하며 지낸 삼십년 세월이 아련히 떠올랐다.
 대학 졸업 후 외국회사에 다니며 운전면허를 땄고, 스물아홉 살 되던 해 둘째 아들 출산 기념으로 시아버님께서 차를 사주셨다. 당시 유행하던 르망이라는 하늘색 차였는데 이때만 해도 여자가 운전하는 일이 거의 없어 차를 몰고 나가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보던 시절이었다. 도로에서 어쩌다 출발이 늦거나 실수가 있으면 주변 운전자들이 여자가 집에서 설거지나 하지 그런다며 삿대질을 하곤 하던 때였다.
 초보 운전자 시절을 지나 방송작가를 하던 때에는 워낙 취재량이 많아 여러 지역을 누비고 다녔고 그러다 보니 그 차는 마치 방송 일을 위해 산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혈기왕성하던 삼십대 초반이던 그 시절, 과로로 졸음을 못 이겨 고속도로 노견에 차를 세워두고 눈을 붙인 적도 있었다. 운전하다 졸음이 쏟아지는 게 제일 무섭다는 사실을 실감하던 시절이었다.
 사십대 초반, 두 아들을 데리고 캐나다 유학길에 올라서는 파란색 미국차를 타고 다녔는데 한국과 교통시스템이 다르다 보니 운전연수를 따로 받아야 했고 낯선 거리를 지도에 의지해 다니느라 진땀을 흘린 적이 많았다.
 특히 밴쿠버 신문사에서 일하며 장거리 취재를 나가는 경우가 많았고 미국과 인접해 있는 도로에서 여차 실수하면 미국방향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아 식은 땀을 흘린 적이 많았다. 그때 운전하며 받은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캐나다 밴쿠버에 정착한지 한 달 쯤 돼 시내 중심가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는데 한 백인 여성이 뒤에서 내 차를 꽝하고 들이받아 크게 놀란 적이 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구경꾼 중 한 여자가 증인이 돼 주겠다고 나섰고 당황한 나머지 사고 낸 차량 번호를 기억해 두지 않아 사고처리에 애를 먹은 적도 있다.
 큰 아들 녀석이 고등학교 다닐 때 차를 사줬는데 몇 번 대형사고를 내 크게 놀란 적이 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가슴이 벌렁 거린다. 철없던 사춘기 두 아들 녀석을 제대로 된 운전자를 만드느라 이런저런 맘 고생이 참 많았다. 큰 사고, 자잘한 사고 다 치르며 아들 키우는 어려움을 톡톡히 맛보았던 것이다.
 육십이 다 된 나이에 차를 처분하고 지난 시절을 돌아보니 운전, 그 또한 인생의 일부였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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