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 씨가 상담소를 찾았다. 상담사는 50대 중반 쯤의 여자였다. 상담실의 분위기는 아늑했다. 낮은 책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힘드신 일이 있나 봐요.”

“집사람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사모님께서 많이 편찮으신가요?”

“예.”

“어떻게 편찮으신데요? 편안하게 말씀하시지요.”

“집사람이 늘 누워만 있어요. 퇴근하고 돌아오면 같은 말만 반복해요. 36년 결혼 생활이 불행한 건 모두 나 때문이라는 거예요. 저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시시콜콜 과거의 일을 꺼내서 따따부따 따지는데 못 당하겠어요.”

구보 씨는 상담사가 아내인 것처럼 분노하면서 숱하게 쌓이고 쌓인 사연들은 쏟아냈다. 상담 선생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아내의 장점을 말해보라고 했다. 아내의 단점이 뭐냐고 물었으면 수백 가지라도 말할 수 있을 텐데 장점을 말하라고 하니 앞이 캄캄했다. 아내의 장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였더니 다시 물었다.

“몇 살 때 결혼하셨어요.”

“저는 서른한 살, 아내는 스물두 살.”

“따님을 두셨나요”

“예, 삼남매 중 딸이 막내예요.”

“따님이 몇 살이죠?”

“스물다섯입니다”

“사모님이 지금의 따님보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네요. 저도 스무 살 난 딸이 있는데 아무것도 모른답니다.”

“사모님이 직업이 있으셨나요?”

“교사였어요.”

“부부교사였군요.”

“둘 다 초등학교 선생이었어요. 대학 선후배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사모님은 왜 그만두셨어요?”

“몸도 아프고 해서 명퇴했지요.”

“연금도 받으시겠네요.”

“연금, 아, 네, 그래요.”

“사모님께서 선생님을 무척 사랑하나 봐요?”

“…….”

“선생님께서도 사모님을 사랑하시나요?”

“…….”

“사모님께서 무척이나 선생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세요. 힘드시겠지만 사모님 말씀을 잘 들어 주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 그냥 들어 주세요.”

구보 씨는 상담을 마치고 나와서 한없이 걸었다. 그 때 아내의 나이가 스물두 살이었구나. 삶 속에 묻혔던 아내의 본 모습들이 어둠 속의 별빛처럼 튀어나왔다. 그땐 참 예뻤었지. 입술은 단풍잎보다 더 붉었지. 머리도 좋고 목소리도 좋았지만, 옷맵시 좋아 내가 반했었는데. 나보다 키가 십 센티는 커서 결혼하자고 했는데. 장미꽃처럼 키워주겠다고 호기를 부려서 처가 어른들의 허락을 받았었는데. 내가 공부한다고 직장을 그만 두었을 때에도 아내가 든든히 버텨 주어서 대학 선생이 될 수 있었는데.

아내가 그토록 지악스럽게 버텨서 내가 어깨에 힘을 주고 살았었구나. 내가 이렇게 성장하는 동안 아내는 그대로 머물러 있었구나. 아이들에 치어서 남편에게 치어서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 못했었구나. 진짜 아파서 몸져누운 것이로구나. 그것도 모르고 매일 밖으로만 나돌았구나. 그것도 모르고 왜 당신은 짜증내고 화내고 신경질 부린다고 탓만 해 왔구나. 그것도 모르고 나는 아내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모진 말을 했었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아내는 오직 나의 사랑만을 받고 싶어 했구나. 그래서 나보고 요즘 들어 키가 작아 보인다고 했구나.

<계속>

<권희돈 청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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