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의 죽음을 안 한설야는 그리움을 글로 쓰고…

▲ 1920년대 조선 문단을 이끌었던 월간 종합잡지 조선지광(왼쪽)과 개벽의 창간호. 1022년 11월에 창간된 조선지광은 카프의 준기관지 성격을 띠었으며 김기진, 박영희, 임화 등의 평론과 조명희의 소설 ‘낙동강’과 이기영의 소설 ‘해후’, 계용묵의 ‘인두거미’ 등을 선보였다. 1932년 12월 통권 100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1920년 6월 25일 창간된 개벽은 신경향파 초기의 작가들을 많이 배출했다. 김기진, 박영희 등 평론가와 조명희, 현진건, 김동인, 이상화, 임상섭, 최서해, 박종화, 주요섭 등의 문인들이 주로 활동했다. 1926년 8월 1일 통권 72호를 끝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됐다.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한설야가 첫 타깃으로 춘원 이광수를 잡고 집중 포화를 퍼부으며 날카로운 필력을 보여주었지만,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주의 계열의 작가들의 세력과 영향력은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한설야 스스로 1920년대 초·중반대의 조선 문학상황을 밝혔듯, 그 시점에서 그들은 작품을 통해 부르주아적 작가들과 대항할 실력이 없었다. 작품을 써야 발표할 곳이 없었고, 그들의 기관지는 일경의 원고 검열에 막혀 대부분 실을 수 없었으며, 잡지조차 압수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들이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루트인 기관지가 일경의 요시찰 대상이었으니 독자들과의 소통 부재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때 사회주의 계열에서 말하는, 이광수 등을 비롯한 부르주아 작가들은 소위 동인 잡지라는 것을 발간해 자기 동료들의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출내기 문학청년이었던 한설야에게는 발표할 지면을 찾는다는 게 꿈같은 일이었고, 이광수 등이 이미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었던데 비해 한설야는 그저 문단에 이제 갓 얼굴을 내민 이름없는 작가일 뿐이었다. 그러나 가뭄에 단비처럼, 한줄기 빛처럼 그나마 아주 작은 길을 열어준 것이 조선지광(24)과 개벽(25)이었다.

 

그때 오직 우리에게 지면을 제공해 준 것은 좌익 잡지 ‘조선지광’이었으나 이것은 종합 잡지로서 많은 작가의 작품을 받아들일 수 없는데다가 역시 경찰의 탄압으로 자주 발매 금지되어 정상적인 발행을 고장할 수 없었다. 우리들의 기관지도 사정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여기서도 길은 독자들에 의하여 열려졌다. 한 것은 독자들의 요구로 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우리들의 작품 또는 논문 기타를 실어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기사 부르죠아 출판물들이 우리들의 글을 실어주기 싶었을 까닭은 하마 없다. 그러나 부르죠아 출판물의 밥줄은 어디까지나 독자가 쥐고 있는 것이다. 독자들이 구독을 거부하는 때, 그것은 존재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제 어떤 경우에도 독자들은 타협할 줄 모르는 정직한 심판자로서 자기들에게 유익하며 구미에 맞는 작품을 실릴 것을 요구했던 것이요, 부르죠아 출판물들은 자기의 명맥을 위하여 이것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속이야 아프지만 우리들의 글을 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보다 많이 부르죠아 출판물들을 자기의 활동 무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 한설야, ‘정열의 시인 조명희’, 1957년 8월, 1959년 조명희선집 수록.

 

한설야는 본명이 한병도(韓秉道)로 1900년 8월 3일 함경남도 함흥 출생이다.

1915년 박헌영과 동기생으로 경성부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졸업은 자신의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와 함흥고등보통학교에서 했다.

1925년 카프(26)에 가입한 뒤 1927년 중앙위원으로 선출됐으며, 1931년 ‘대조’, ‘신계단’의 편집을 맡았다가 1933년 잡지가 종간되자 조선일보 편집기자를 했다. 1934년 8월 카프 2차검거 때 체포됐다 1935년 12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해방 직후 이기영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을 조직하여 임화, 김남천의 조선문학건설본부에 대항하다 두 단체가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합쳐지자 바로 월북했다.

박헌영, 그가 누구인가. 남로당의 1인자로 북한 정권에서 부수상과 외상까지 지냈지만 김일성에게 실권을 뺏기고 1955년 12월 15일 미군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한 비운의 인물. 한설야와 박헌영은 경성제일고보 동기동창이라는 친분에도 월북한 뒤에는 ‘정치적 적’으로 바뀌게 된다. 김일성은 자신의 노선에 반대해온 박헌영 측근의 이승엽, 조일명, 김응빈, 박승원 등에게 ‘종파적 밀모’를 명분으로 숙청을 계획하면서 패전의 책임을 박헌영에게 물으려 했다. 이때 김일성의 심복격에 해당되는 인물들이 김일, 박정애, 한설야 등이었다.

한설야는 6.25전쟁 이후 조선문학가총동맹 위원장을 지내면서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 남로당 계열 문인들의 숙청을 주도한 뒤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을 지내고 1957년 9월 내각 교육, 문화상에 임명되는 등 성공가도를 달리기도 했지만, 종내는 자신도 복고주의, 자유주의자로 몰려 1962년 공식석상에서 사라지면서 숙청설이 나돌았다. 숙청설 이후 행적은 드러난 것이 없으며 전 재산을 몰수 당한 뒤 자강도의 노동교화소로 추방됐다가 1976년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런데 한설야는 북한에서 완전히 흔적이 사라져버린 남로당계열의 작가들과 달리, 1985년 ‘조선문학’에 예전 작품인 ‘승냥이’가 게재됐고, ‘황혼’이 문학예술사전에 1993년 등재돼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유해 역시 애국렬사릉에 묻혀 있다.

한설야가 포석에 대해 갖는 존경심과 흠모의 정은 남달랐다. 포석보다는 네살 터울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그는 포석을 늘 스승 대하듯 했다.

그는 포석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눈여겨 보며 배우고 싶어했고, 포석의 부드러운 눈빛과 음전한 미소, 조용한 말투까지 좋아했다.

‘조명희 평전’에서 인용하고 있는 한설야의 글 ‘정열의 시인 조명희’는 포석이 소련에서 총살 당한 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된 한설야가 1957년 8월에 포석을 그리워하는 글을 써 두었다가 1959년 모스크바 국제관계대 황동민 교수 등이 조명희 선집을 엮을 때 보내온 글이다. 그러니까 포석에 대한 그리움의 글을 쓸 당시의 한설야는 북한의 내각 교육상과 문화상에 임명되는 등 성공시대를 열고 있었던 때였다.

 

1923년에 창립된 ‘염군사’ 시대에도, 카프 창건(1925년) 이후에도 우리들의 기관지는 박해를 뚫고 계속되었지만 정상적으로 나올 수 없었고 또 많은 지면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독자들의 절대한 지지를 받아서 나오자 매진되는 형편이었으나 그것이 왜경에게는 아주 비상 같이 싫어서 압수 또는 폐간으로써 보복하려고 들었다.

이러한 박해와 아울러 우리들의 생활상의 고난도 결코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들의 기관지 또는 의무적으로 쓰는 글에는 원고료라는 것이 없었다. 부르죠아 출판물들이 약간의 원고료를 지불한댔자 생쥐 불가심할 정도의 것 밖에 더 되지 않았다.

이때 우리들 중에서 생활상의 위협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아마도 조명희선생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남달리 많은 가족이 있었고 그 부양 능력은 오로지 조명희선생 한 사람에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또 엎친데 덮치기로 언제나 일제 경찰과 또는 그들로하여 빚어지는 갖갖은 박해와 피란이 멎을 날이 없이 앞뒤로 조여들었다.

조명희선생은 언제나 이런 고달픈 수난 속에서 자기의 창작 사업을 꾸준히 계속하였다. 뿐만아니라 그는 후배를 키우며 고무하는 선배로서의 지도 사업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조명희선생은 보기 드문 정열적인 시인으로 또 소설가로 정열을 오직 자기 창작에만 돌린 것이 아니고 보다 많이 동지들과 후배들에게 돌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급박한 경우를 만난다 하더라도 언제나 태고연하도록 유장하고 여유있는 조명희선생만 보면 자연 맘이 훈훈해지면서 열어 제치고 나갈 구멍이 내다보이곤 하였다.

- 한설야, ‘정열의 시인 조명희’, 1957년 8월, 1959년 조명희선집 수록.

 

(23)이광수(李光洙)

1892년 평북 정주 출생 1950년 10월 25일 자강도 강계서 사망. 아명은 보경, 호는 춘원·고주·외배.

한국근대문학에서 계몽주의·민족주의 문학가와 사상가로 한국 근대정신사의 전개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렸을 때 고아가 돼 어려움을 겪다가 1903년 동학에 입도해 박찬명 대령 집에 머무르며 심부름하다 1905년 천도교와 관련된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타이세이(大成) 중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하고 홍명희·최남선 등과 사귀었고, 1906년 학비 곤란으로 일단 귀국했다가 이듬해 다시 건너가 장로교 계통의 메이지(明治) 학원 중학교 3학년에 편입, 미션 학교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교와 톨스토이의 인도주의에 심취했다. 1910년 학교를 졸업한 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했다가 이승훈의 추천으로 오산학교 교원이 되고, 그해 최남선이 주관하는 ‘소년’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했다.

1915년 김성수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예과를 다녔다. ‘매일신보’에 ‘무정’을 연재하면서 문명을 날리기 시작했으며, 이후 ‘자녀중심론’ 등의 계몽적 논설을 발표함으로써 봉건적 계층으로부터 많은 질타를 받았다. 일본에서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로 탈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간으로 활동했다.

1923년 ‘조선문단’ 주재로 옮겨 문단활동을 재개했다. 1926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다가 1933년 사임하고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취임하여 당대 브나로드 운동이 확산되는 와중에 장편 ‘흙’을 발표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검되어 안창호와 함께 수감됐다 반 년 만에 풀려나 1939년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선출되고 이른바 ‘복지황군위문’에 협력하는 친일행위를 했다. 1940년 카야마 미츠로(香山光郞)로 개명하고 학병권유차 동경에 다녀왔으며, 8.15해방이 되자 친일파로 지목되어 비난을 받았다. 1949년 반민특위법으로 수감되었다가 곧 병으로 석방되고, 6.25전쟁 중 병상에서 북한인민군에게 납북되어 그해 10월 북한에서 병사했다.

 

(24) 조선지광(朝鮮之光)

월간 종합잡지로 1922년 11월 창간됐고 1932년 12월 통권 100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국판 100쪽 안팎으로 경성 조선지광사에서 펴냈다.

집필진은 주로 프롤레타리아 문학(프로 문학)을 지향하는 문인들이 참여하여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의 준기관지적 성격을 띠었다. 초기에는 민족사상을 고취시키고 일제에 저항하는 글을 실었으며 급진적인 내용이 문제가 돼 일제에 의해 원고가 압수·삭제되는 경우가 잦았다.

마르크스주의나 유물변증법 등에 관한 번역글, 여성문제·소작문제 등을 다룬 시사논문 등과, 김기진·박영희·임화 등의 평론이 실려 있다. 시에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어머니’ 등과 소설에 이기영의 ‘해후’, 계용묵의 ‘인두거미’, 조명희의 ‘낙동강’ 등이 실려 있다.

 

(25) 개벽(開闢)

월간종합잡지로 1920년 6월 25일 창간됐다.

전체 지면의 약 3분의 1을 문학과 예술면으로 할애하여 소설·시조·희곡·수필·소설이론·그림 등을 게재했고, 문체는 국한문혼용체를 썼다.

그러나 창간호는 발간과 동시에 표지(호랑이 그림)와 ‘금쌀악’, ‘옥가루’ 등 몇몇 기사가 문제가 되어 일제에게 전부 압수되고 말았다. 이에 문제가 된 기사를 삭제하고 호외(號外)를 냈으나 이것마저 압수돼 다시 임시호를 발행했다. 그 뒤에도 시련은 계속 됐고, 결국 1926년 8월 1일 통권 72호(8월호)를 끝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간됐다. 폐간될 때까지 발매금지(압수) 40회 이상, 정간 1회, 벌금 1회 등 많은 압력과 박해를 받았으며, 그로 인한 경영난도 심각했다.

‘개벽’은 1900년대 당시 계급주의적 경향문학을 지향하던 신경향파 초기의 작가들을 많이 배출했다. 김기진·박영희 등의 평론가, 조명희·현진건·김동인·이상화·염상섭·최서해·박종화·주요섭 등의 문인들이 주로 개벽을 무대로 작품 활동을 했으며, 김유정도 단편소설을 1편 발표했다.

민족항일기의 개벽은 일제의 정책에 항거하여 정간·발행금지·벌금, 그리고 발행정지 등의 가혹한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민족의식 고취에 역점을 둔 대표적인 종합잡지였으며, 문예잡지 못지않게 문학이론의 전개와 문학작품의 발표, 외국문학의 소개, 신인 발굴 등을 통해 1920년대 조선 문학의 창달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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