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호

추사(秋史)가 유배지 탐라에서 세한도(歲寒圖)를 그렸을 무렵, 난 필리핀 루손섬에서 세온도(歲溫圖)를 그렸다 세한도의 소나무 대신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망고나무와 파파야나무 그려놓고 초가 대신 바파이쿠보를 그려넣었다 그가 세찬 바람과 눈 내리는 탐라에서 독한 술을 마실 때, 나는 바닷가 카페에서 차가운 맥주를 마셨다 추사가 그림의 소나무처럼 변치 않는 기개를 바랐으나, 난 열매 맺어 가난한 나라의 사람에게 주는 나무들의 풍요로움을 간절히 원했다

 

추사와 난 따로 기나긴 겨울과 여름을 지내며 고독했다 그랬다, 언제 어디서나 유배자여서 고독했다 살아가며 가슴에 섬 하나씩 품고 있는 거였다 때로 나를 고립시키는 섬은 모든 인류가 더불어 사는 곳이 되기도 했다 나는 잘사는 나라를 처절하게 원하고 추사는 따뜻한 나라를 목숨보다 원했던가

 

추사는 세한도를 그리며 가슴속엔 세온도를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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