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겐 온유하면서 자신에겐 더없이 엄했던 포석

▲ 1991년 11월,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처음 찾은 조선아(왼쪽 두번째)씨가 이복언니인 조중숙(왼쪽 세번째)씨를 충북 청주에서 만났다. 중숙씨는 조명희 선생이 조선에서 러시아로 망명하기 전 충북 진천 벽암리에서 민식씨와 사이에서 1915년 낳은 장녀이고, 선아씨는 조명희 선생이 1928년 러시아로 망명한 뒤 1931년 우스리스크에서 재혼한 황명희씨와 사이에서 1932년 낳은 장녀이다. 17년이나 나이 차가 나는데다 서로 쓰는 말조차 다른 두 자매는 두 손을 꼬옥 잡으며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두 손을 맞잡은 두 딸보다 한참이나 어린 나이였던 44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국땅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한 아버지 조명희 선생에 대한 ‘한’과 ‘그리움’이라는 공통분모는 50년 가까운 세월의 간극을 넘어 뜨거운 가족의 정을 나누기에 충분했다.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좌익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모진 세파를 겪어낸 중숙씨나, 여섯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유배의 땅’ 중앙아시아로 쫓겨나 척박한 삶을 딛고 일어서야 했던 선아씨 모두 서로가 가지고 있는 아픔의 크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내 숙소에 抱石이 찾아 온 것은 그 때가 단 한 번이다. 집을 어떻게 찾아왔는지, 누구에게 물었는지, 날만 새면 ‘帝通’으로 전화라도 하면 되련만, 抱石은 ‘모레’라고 한 그 날자를 지키려고 아닌 밤중에 눈보라를 뿌리는 10리길을 그나마 모르는 집을 물어 가면서 찾아온 것이다.

抱石은 자신에게 이렇게 엄한 분이었다.

安國洞(안국동)에 있는 圖書出版(도서출판)과 책가게를 겸한 平文館(평문관)이란 자그마한 서점이 있었다. 해방 후 慶北知事(경북지사)를 한 金喆壽(김철수)씨가 그때 그 平文館 주인이었다.

抱石의 단 한 券(권) 남긴 ‘봄 잔디밭 위에’란 詩集(시집)이 平文館에서 나왔을 때 나는 抱石의 심부름으로 거기서 原稿料(원고료) 80원을 받아온 일이 있다. 印稅(인세)도 아니요, 온통 떠넘기는 詩集 한 券의 稿料가 80원-원고료라는 것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내게도 그 80원은 군색하고 녹록한 액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抱石은 그래도 早稻田大(조도전대·와세다대학)를 다닌 東京留學生(동경유학생)인데 부인은 新敎育(신교육)을 모르는 구식 여자였다. 쌀이 없어지면 종이와 ‘펜’을 갖고와 아무 말 없이 남편 앞에 두고 나간다는 부인(소개자인 吳澤(오택)씨에게서 들은 이야기)- 그 부인에게는 남편의 붓끝으로 생겨진 그 80원이 몇 해 만에 쥐어보는 큰 돈이기도 했다.

空超 서재에서, 抱石댁에서 얼굴을 대한 이는 많으나, 그중에도 가장 인상에 남는 이가 樹州(수주) 卞榮魯(변영로)씨다. 空超나 抱石같은 이와 달라 입이 험한 데다 술이 고래였다. 하루는 樹州가 酒量(주량) 자랑을 하면서 큰 바가지 하나를 단숨에 마실 수 있다고 장담하자 좌중이 “그럼 해보자”고 그 자리에서 술을 사다가 서너 되 드는 바가지에 하나 가득 채웠다. 樹州는 豪言(호언)한 그대로 그 바가지 술을 입도 떼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는데 뒤에 들으니 사흘인가를 꼼짝 못하고 抱石댁에서 누워지냈다는 얘기다.

釜山(부산)으로 온 지 얼마 안되어 金水山(김수산)·尹心德(윤심덕)의 情事(정사)사건이 생겼다. 連絡船(연락선)에서 몸을 던진 이 두 사람-더구나 尹心德은 ‘死(사)의 讚美(찬미)’란 노래로 해서 이름이 높던 女流聲樂家(여류성악가)다.

水山과 막역이던 抱石이 아쉬운 마음에 투신한 날의 상황이나 알아보려고 釜山까지 내려와서 나와 재회를 했다. 현해탄 물결이 삼켜간 두 사람을 어디서 찾으랴-. 抱石은 며칠밤을 신문 支局(지국) 2층에서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 한숨을 지었다.

그해 정월 초하루, 時代日報(시대일보) 文藝欄(문예란)에 抱石은 全面(전면) 4, 5단의 긴 詩評(시평)을 쓰면서 맨끝에 역시 時代日報에 실렸던 내 抒情詩(서정시) 하나를 들어서 ‘베를렌’이 부럽지 않다고 극구 찬양해 주었다. 그런 詩篇(시편)들을 모아 ‘出帆(출범)’이란 첫 詩集(시집) 하나를 釜山에서 내었을 때 抱石은 거기다 50∼60행의 긴 序詩(서시)를 붙여주었다.

“바다와 푸른 하늘, 흙과 햇빛-” 이런 서두로 시작된 그 詩의 중간 중간에는 “사랑을 나누고 싶구나! 목숨을 같이 누리고 싶구나!”, “굴레벗은 말같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그 自由(자유)를 만나기 위해서 그 사랑을 다시 찾기 위해서-” 그런 詩句(시구)들이 있었다. 抱石의 냉엄하게 보이는 표정과는 딴판으로, 인간에 대한 끓어오르는 사랑, 복받치는 자유에의 갈망이 내게 주는 序詩를 빙자해서 거기 약동하고 噴出(분출)한 느낌이었다.

釜山에서 작별한 지 얼마 안되어 抱石이 종적을 감추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처자를 버리고-자유없는 故土(고토)를 버리고.

抱石이 간 곳을 나는 모른다. 땅끝인지-저 하늘 구름 속인지-.

그후 5, 6년이 지나 버스 차장 노릇을 한다는 抱石의 딸과 가난에 찌든 그의 부인을 서울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런 지도 벌써 45~46년-重男(중남)이란 사내 이름같은 그 딸이 어디서 살고 있다더라도 벌써 60대의 할머니다.

抱石이 序詩를 붙여준 ‘出帆’ 속표지에 그림을 그려 준 이는 당시 女流畵家(여류화가)로 令名(영명)이 자자하던 羅憲錫(나헌석)여사였다.

상처 입은 비둘기 한 마리와 ‘퓨리턴’ 詩人-美談(미담)일 수 있고 佳話(가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世人(세인)들은 그렇게만은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더우기 抱石 趙明熙(詩集 ‘봄 잔디밭 위에’의 著者) 같은 이는 性情(성정)이 강직한 분이라 空超선생을 위선자라고 해서 두터웠던 친분인데도 그 후 일체 상종치를 않았다.

과연 어느 쪽일까? 樹州 卞榮魯씨는 空超 抱石 사이를 구애없이 왕래하던 분이다. 그 분은 이들 중 어느 쪽으로 치부했을까-.

- 김소운, ‘포석 조명희’, 1981년 1월 30일 중앙일보 연재물.

 

포석에 대해 김소운은 매력을 넘어 존경심까지 갖고 있었다. 그 절절한 마음이, 사회주의 작가라 하면 무조건 ‘레드 컴플렉스’를 갖고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던 1980년대 초반에 ‘위험성’을 감수하고도 소운이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이었다. 더구나 1981년은 서슬퍼런 전두환 군사정권이 ‘정의 사회 구현’을 외치며 무작위로 사람들을 잡아가 삼청교육대에 가둬버렸던 시기이기도 했다. 삼청교육대는 1979년 12.12사태를 계기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이 1980년 8월 1일부터 1981년 1월 25일까지 ‘사회정화책’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 군부대내에 설치한 기관. 모두 6만755명이 법원의 영장 발부없이 체포돼 순화교육 대상자로 분류된 3만9742명에 대해 불법적인 ‘교화’작업을 벌였다. 그런 험악한 시기에 나온 이 글을 통해 포석의 인간적인 면모와 생각, 생활형편 등을 엿볼수 있다.

‘힘들여 밀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대문에 안채엔 방 둘, 아래채 하나, 부인과 어린 자녀 셋-그런 살림’이었던 가난한 포석은 김소운에게 ‘抱石을 처음 만난 그날부터 그의 인간적인 매력은 나를 압도’해 버리는 사람으로 다가온다. 밤이면 자주 포석댁을 찾아가 밤이 늦으면 한방에서 자고 오기도 했던 소운에게 ‘그럴 때마다 포석은 소년같은 정열로 새로 쓴 시를 읽어주고, 시론의 원고를 들려주고 하면서’ 밤 깊은 줄 모른다.

그러나 소운이 포석으로부터 느끼는 존경심은 그의 문학이 갖는 위치나 이론적 해박함 보다는 ‘빈곤과 오뇌 속에서도 언제나 돋아나는 떡잎같이 신선한 그의 정열-毫釐(호리)와 타협이 없는 꼿꼿한 신념’이었다. 그러면서 말한다. “나는 이날까지 시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를 허다히 보아왔다. 내 나라에서나, 남의 나라에서나-그러나 내 눈에 비친 그런 시인 중에는 포석처럼 자기자신에 대해서 준엄한 시인은 없었다”라고.

그리고, 포석의 인간적인 매력에 빠져 그렇게 허구헌날 그의 집을 찾아 밤 새워 시와 문학을 이야기했던 소운은, 궁벽한 살림에도 손님 대접을 위해 손님인 자신에게 돈 5원을 꾼 뒤 그 돈을 갚는 포석의 모습을 보면서 큰 감동에 빠진다. 모레 안에 갚겠다고 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포석은 어렵사리 그 돈을 마련해 눈보라 퍼붓는 10리길을 걸어, 온 몸에는 하얗게 눈을 들러쓴 채, 밤 10시가 다 되어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는 집을 물어 물어가며…. 그러고는 “늦어서 미안하오. 돈이 좀 더디 돼서… 객지사람 주머니를 털어서 미안하오. 그럼 잘 자시오”하며 험한 눈보라 십릿길을 되짚어 간 것이다. 타인에게는 한없이 온유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는 혹독하리만큼 엄했던 포석, 소운은 그런 포석을 보며, 눈보라 휘날리는 십릿길을 되짚어 사라져가는 포석을 보며 눈물겨운 감동으로 한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다정다감한 포석이 참으로 냉혹하리 만큼 곁을 두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공초 오상순(28)이었다. 소운은 그것을 이렇게 썼다.

“더우기 포석 조명희 같은 이는 성정(性情)이 강직한 분이라 공초(空超) 선생을 위선자라고 해서 두터웠던 친분인데도 그 후 일체 상종치를 않았다.”

공초 오상순과 수주 변영로는 포석과 아주 친한 사이였다. 하루 담배 스무갑을 피워 경성에서 그의 담배를 이기는 이가 없었다던 공초와, 두주불사(斗酒不辭)로 경성에서 술로 이기는 이를 보지 못했다는 수주 변영로가 음전한 선비 같았던 포석과 격의없이 친했던 것은 약간 의외이기도 하다.

 

▲ 공초 오상순.

(28) 오상순(吳相淳)

1894년 8월 9일 서울 출생, 1963년 6월 3일 사망. 시인. 호는 공초·선운, 필명은 성해.

효제국민학교를 거쳐 1906년 경신학교를 졸업했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1918년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귀국했다. 1920년대 ‘폐허’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인생의 허무를 주로 노래했다.

폐허 동인인 김억·남궁벽·황석우 등과 친하게 지냈다. 1921년 종교를 그리스도교에서 불교로 바꾸고 조선중앙불교학교·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학교를 그만둔 뒤로는 8.15해방 때까지 방랑생활을 했다. 그의 방랑벽과 담배를 하루에 20갑 넘게 피우던 습관은 한국문단에 널리 알려져 있다. 1945년 서울로 돌아와 역경원 등을 전전하다 조계사에서 지냈으며, 1963년에 죽은 뒤 유해는 수유리에 안장됐다.

1920년 ‘페허’ 창간호에 평론 ‘시대고와 그 희생’을 발표해 ‘폐허’는 그것을 극복해서 낙원을 찾는 긍정적 의미가 있다며 ‘폐허’의 옹호와 허무의 극복을 주장했으나 이후에 발표한 시 ‘허무혼의 선언’, ‘아시아의 밤’ ‘타는 밤’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허무를 극복하지 못했다.

1955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1961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유고시집으로 ‘공초 오상순 시선’(1963), ‘방랑의 마음’(1977) 등이 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