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논설위원 / 시인)

▲ 이석우 (논설위원 / 시인)

1973년 필자는 옥천 능월초 교사로 발령이 났다. 그야말로 하늘만 빠꼼한 오지였다. 하늘은 별들의 벗이었고 나는 그들의 관객이었다. 밤마다 찾아오는 풀벌레소리와 그와 어우러지던 우수의 언어들. 옥수수 밭의 바람소리조차 소문으로 떠돌던 그날들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어느 날 출장을 다녀오신 교장 선생님께서 스텐 철판 한 장을 내게 주시며 ‘국기에 대한 맹세’를 각인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라는 맹서문을 완성하기 위해 밤낮으로 철판을 두드렸다. 나의 맹서는 손끝에 멍이 들고서야 끝이 났다. 글씨 아닌 곳을 두드려 글자가 볼록하게 나오니까 제법 미적효과도 엿보였다. 관람자의 감동을 기대하면서 나는 아린 손끝을 움켜쥐고 이 맹세문을 읽는 눈빛을 훔쳐보았다. 지금은 폐교가 되어 태극기도 그에 대한 맹서도 사라졌지만 많은 선생들과 학생들의 그 눈빛이 나에게 감동으로 남아 있다.
실상 그 맹세문은 1972년 새로 수정한 것이었다. 최초의 ‘국기에 대한 맹세’는 1968년 3월 충청남도 교육청 유종선 장학계장에 의하여 나라사랑 교육 차원에서 작성되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가 그 문안이었다. 이 아이디어와 짤막한 문구는 참신하게 받아들여져 타 시도의 부러움을 사기에 부족함 없었다. 이 맹서문은 “조국통일과 번영을 위하여”라고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여 당시 사회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였다.
그렇다면 왜 당초의 국기에 대한 맹세가 유독 조국통일을 강조한 것일까? 이 답을 얻는 일은 어렵지 않다. 국기에 대한 맹세 배경을 가늠할 수 있는 두 개의 사건을 되새겨 보자.?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들은 김일성의 이른바 ‘항일빨치산전술’을 근거로 하여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124군부대’ 소속이었다. 서울 세검정고개 자하문을 통과하면서 초소에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많은 승객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한 민가에서는 한 시민이 게릴라와 격투를 벌이다가 총격으로 사망하는 일도 벌어졌다.
1968년 1월 23일 미 해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으로 납치됐다. 1.21사태가 일어난 지 이틀 뒤의 일이었다. 미 해군 함정이 공해상에서 납치되기는 미 해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산과 군산기지에 2개 전투기대대를 급파하고, 2척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1척 및 6척의 잠수함을 동해로 이동시켜 한반도의 위기상황이 고조됐었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이렇게 통일문제로 이어지는 데는 남북의 대치 국면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안이 1972년 수정되었는데 필자가 73년 신규 발령을 받아 ‘국기에 대한 맹세’와 맞닥뜨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35년이 지난 2003년 5월 유시민 의원은 ‘국기에 대한 맹세’는 파시즘의 잔재 즉 일제강점기의 유산으로 몰아세웠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이 맹세문이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목소리를 횃불처럼 들어올리기 시작하였다. 위헌이라는 것이었다.
2007년 5월, 행정자치부는 기존의 맹세문 문안이 요소가 가치에 맞지 않는다는 점과 문법에 어긋난 점을 들어 '국기에 대한 맹세' 수정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국기에 대한 맹세’를 2007년 7월 27일 공포하였다. 결론은 문안이 파시스트적이며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적이기 때문에 수정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박정희의 병영국가 의도가 들어 있다고도 했다. 유시민 의원의 목소리에 국가가 응답한 것이다.
이쯤에서 2007년도의 일본의 재판결과에 주목하면 일본의 우익들의 발끝의 향배를 알 수 있다. 1999년 일본 정부는 일장기와 기미가요를 학교 행사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일부 교원은 노래가 나와도 일어서지 않는 ‘불(不)기립 운동’을 벌이며 버티었다. 그리고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근거로 헌법위반을 제소하였다. 2007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헌법합치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고 교사들의 부당노동행위 주장에 철퇴를 가해버렸다. 교사들은 순간 입을 닫았고 일장기에 순응해 버린다.
우리가 국기에 대한 맹서에서 민족의 의미를 덜어내고 국기 하강식을 멈추는 것과는 가는 길의 방향이 다른 듯싶다. 요즘은 일장기 대신 세계대전 침략 깃발인 욱일기가 운동장의 응원기로 등장한다. 우리는 민족주의를 버리고 일본은 무장한다. 어떻게 될 것인가. 태극기는 분명 극일기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맹세에 민족의 마음이 있으면 안 될까? 진정한 맹세는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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