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소년 구보에게 유일한 위안은 책이었다. 학교 도서실에는 책이 빼곡히 꽂혀 있어 좋았다. 책 속에는 키 작다고 놀리는 사람도 없었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았으며 인류역사를 빛낸 위인들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빼들은 ‘백범일지’에서 가슴 뛰는 구절을 발견하였다. ‘얼굴상이 좋은 것은 신체가 좋은 것만 못하고, 신체가 좋은 것은 마음이 좋은 것만 못하다.(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청년 김구가 이 구절을 읽고 외모 열등감에서 벗어났으며,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내용이었다. 소년 구보는 그 대목을 읽고 신체적인 키보다 ‘마음이 큰 사람이 진짜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백범일지’는 구보에게 키의 열등감을 벗게 하고 아울러 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해 준 책이었다.
청년 구보의 작은 키 열등감이 다시 살아난 것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을 때였다. 군대에서는 학교에서와 달리 무슨 일에나 키 큰 사람이 우선순위이다. 군대에서 지급되는 모든 장비들이 구보에게는 버겁고 크거나 무거웠다. 특히 M1소총은 최악이었다. 어깨에 메면 개머리판이 거의 땅에 닿았다. 방아쇠에 눈을 가까이 대면 개머리판이 어깨위로 튀어나오고 개머리판을 어깨에 밀착시키면 방아쇠와 눈 사이가 너무 멀었다. 조교가 지나가다가 총 쏘는 자세가 불량하다고 엉덩이를 걷어차고 지나간다. 높은 사람이 나타나 연병장에서 사열할 때는 항상 맨 꼬래비에 섰다. 높은 사람은 멀리 본다. 꼭 끄트머리에서 살짝 움직이는 구보를 지적하였다.   
구보가 서른한 살 되던 해 6월이었다. 혼인할 나이가 꽉 찬 시기였다. 낮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야간대학에서 공부하던 때였다. 1학기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캠퍼스를 나오다가 동창생을 만났다. 맥주 집으로 끌고 갔다. 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시계를 풀었다. 술이 거나해져 몸이 약간 기울 무렵 친구에게 여자 친구 좀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조건이 뭐냐고 물었다. 나보다 키가 큰 여자면 돼. 간단명료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친구는 껄껄껄 웃으며 참 너답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꼭 한 달 후에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기하고 같은 학년 선생인데, 을지로 육가 대명다방에서 미팅약속을 잡아놓았단다. 그녀는 키가 정말 컸다. 나이는 나보다 아홉 살이나 어렸으며 학교는 6년 후배였다.(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그녀는 장난삼아 나왔다고 한다.) 구보는 그녀를 자기 지붕 밑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네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나의 완전한 포로로 만든다. 둘째 빚을 내서라도 고품격 데이트를 즐길 것이며, 셋째 모든 열정을 그녀에게 쏟는다. 넷째 집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꽃을 선물한다.
그해 늦가을 해거름이었다. 명동에서 곧바로 서울역으로 가서 둘이 막차를 타고 종착역에 내렸다. 낯선 항구도시의 바닷가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프로포즈는 다음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였다. 우리 결혼할까. 그녀는 그 미소만 지었다. 구보는 그녀의 미소를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구보의 키에 대한 열등감은 그녀의 미소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반전이 일어났다. 점차 열등감이 자존감으로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구보 인생에 가장 뜨거운 계절이었다.
 <청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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