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시인)

▲ 나기황(시인)

올해는 10월 9일 한글날이 금요일에 닿아 자연스레 황금연휴가 됐다. 1991년 공휴일에서 제외됐다가 2013년, 22년 만에 다시 공휴일로 지정된 덕을 보는 셈이다.
세종대왕이 1446년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한지도 올해로 569년, 짧지 않은 세월이다. 한글이 모진 역사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유지해 온 것은 한글이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고귀한 가치 때문일 것이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음소문자(音素文字)이면서도 로마문자보다 한층 차원이 높은 자질문자(資質文字)입니다." 우메다 히로유키, 전 도쿄대 교수의 말이다.
"한글은 의심할 여지없이 인류의 가장 위대한 지적성취 중 하나로 꼽혀야 합니다."
영국의 저명한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의 평가다.
한글은 창제목적과 원리, 창제일이 명시되어 있는 세계 유일의 문자다.
1997년 <훈민정음> 해례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언어연구 학의 명문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세계 모든 문자 중에서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등을 기준으로 순위를 매겼는데 한글을 첫 자리에 올렸다. 이론상이지만 자음 14개, 모음 10개를 가지고 1만 1172개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한글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 했다. 나라밖에서 평가한 범접할 수 없는 한글의 명가(名價)다.
한글날을 기념하면서 겉치레 행사나 ‘노는 날’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면 애석한 일이다. 한글이 처해 있는 환경을 보면 우려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국적불명, 출처불명의 신조어가 언어의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있다.
‘배스’와 ‘블루 길’ 같은 외래 어종(語種)이 아름다운 우리글을 해치고 있다. 천적이 없는 황소개구리가 활개를 치듯 자고나면 뜻 모를 ‘줄임말’이 개체수를 늘리고 있다.
‘얼짱’이니, ‘셀카’니 ‘멘붕’이니 하는 말은 이미 신조어의 고전이 됐다.
‘깜놀-깜짝 놀라다’, ‘심쿵-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움짤-짤막한 동영상’, ‘케미 쩐다-잘어울린다’, ‘썸 탄다-사귈 듯 말 듯한 사이’, ‘핵꿀잼-아주 재미있는 것’은 애교다.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라’를 알지 못하면 눈총을 받거나 민망한 꼴을 당할 수 있다.
세대간, 계층 간의 대화가 단절되고 있다. 20대가 못 알아듣는 10대의 언어가 수두룩하다.
문제는 우리글도 자주 쓰지 않으면 엉킨 실타래가 된다는 것이다.
“녀석은 ‘지에밥‘ 냄새에도 취하는 실력으로 ’풋술‘을 ‘안다미로’ 마시더니 이내 얼굴이 ‘우럭우럭’해져 ‘간잔지런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자고나면 얼마나 ‘문뱃내’를 풍길지 걱정이다.”
뜻을 알고 보면 충분히 쓸 수 있는 묘사고 문맥이지만 굴속처럼 떠듬떠듬 더듬어 가야한다.
아주 먼 훗날, 타임캡슐을 열고 잘 보관된 한글을 꺼내 ‘바빌론’이전으로 돌아가면 어떨까.
아무리 잘 보관한 과일도 제철 과일 맛만 못한 법이다. 자주 써야 좋은 말이고 옳게 써야 좋은 글이다.
상황에 맞지 않는 ‘너무’도 너무너무 자주 쓰여 그냥 인정해줘야 할 것 같다.
‘같다’  역시 시도 때도 없이 쓰인다. 제 감정을 말할 때도 “ 좋은 것 같아요. 슬픈 것 같아요.”라고 한다. 결혼식장에서도, 전몰장병위령탑에서도 단체사진만 찍으려면 ‘화이팅’이다.
한글에 대한 생각을 하다, 뜬금없이 영화 ‘사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뒤주에 갇혀 고통 받는 세자와 그 위에 떼 장을 덮는 영조의 심정을 가늠하며 가슴이 답답했다. 훗날 영조는 세자에게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의 시호를 내려주었다 한다.
사도세자(世子)를 ‘사도세자(歲字)’로 고치면 ‘한글이 홀대받는 작금의 세태를 서글퍼한다’쯤 되겠다. 뒤주에 갇히듯이 각종 외래어, 신조어, 줄임말, 비속어에 둘러싸여 시달리고 있는 한글이 내일 하루만이라도 편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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