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리 시집 '치매행' 발간

아기가 엄마 품에 파고들 듯이
아내가 옆으로 들어와 팔베개를 합니다
그냥 가만히 안고 있으면
따뜻한 슬픔의 어깨가 들썩이다 고요해집니다
깊은 한숨 소리 길게 뱉어내고
아내는 금방 곯아떨어지고 맙니다
마른 빨래처럼 구겨진 채 잠이 듭니다
꽃구름 곱게 피어날 일도 없고
무지개 뜰 일도 없습니다
나도 금세 잠 속으로 잠수하고 맙니다
생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 보다
가벼워도 무거운 아내의 무게에
슬그머니 저린 팔을 빼내 베개를 고쳐 벱니다.
(‘팔베개-치매행, 65’ 전문)

시인은 치매를 癡呆라 말하지 않는다. 그에게 치매는 致梅. 매화에 이르는 길이다. 그 무념무상의 세계, 어린아이처럼 맑고 순수한 마음을 갖게 되는 길 위에 서서 시인은 아내를 위한 사랑 노래를 부른다.

홍해리(74·사진) 시인이 최근 시집 ‘치매행’을 발간했다. 시집에 실린 150여편의 시는 모두 치매에 걸린 저자의 아내에게로 향한다. 홍 시인은 “이 글은 아내에 대한 관찰기록이요, 내 자신의 반성과 그 고백이라서 잘 쓰려고 기교를 부리지 않았으니 욕교반졸은 아니라 믿는다”며 “하루 속히 신약이 개발돼 치매로 신음하고 있는 환자들과 환자를 돌보느라 애쓰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행복과 평화가 함께하기를 소망해 본다”고 밝혔다.

아내가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4~5년 전만해도 서울시내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3남매의 어머니 역할을 흐트러짐 없이 수행하던 아내였다. 이제 3남매 모두 출가시키고 퇴직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생을 한껏 즐기리라 다짐했는데…… 치매라니.

시인은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무수히 흩어지는 아내의 기억을 잡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 곁에서 자신이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은 글을 쓰는 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후 그는 월간 ‘우리시’에 ‘치매행(致梅行)’을 연재하기에 이른다. ‘아내에게 바치는 안타까운 사랑 고백’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렇게 16개월 간 매달 10편씩 꼬박꼬박 띄운 연서는 한 권의 책으로 묶어져 나왔다.

가족을 위해 늘 헌신했고 희생했던 아내. 이제는 저녁이 되면 무작정 밖으로 나가려 하고, “왜 안 와?”, “언제 와?” 늘 똑같은 두 마디를 반복하고, ‘국도 젓가락으로 뜨려’ 하는 어린 아이가 된 아내에게 시인은 속죄의 마음을 담아 ‘마지막 선물’을 선사한다.

임보 시인은 “아내의 아픔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경을 시인의 살과 뼈를 깎아 엮어낸 사랑의 시편들”이라며 “다하지 못한 사랑에 대한 참회록이며 미리 기록해 둔 순애보라고도 할 수 있다. 한 지아비가 한 지어미에게 쏟는 사랑의 경전이며,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경구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홍 시인은 1942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69년 시집 ‘투망도’로 등단했다. 현재 사단법인 우리시진흥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독종’, ‘금강초롱’ 등 18권을 발간했으며, 시선집 ‘비타민 시’, ‘시인이여 詩人이여’ 등을 펴냈다.

황금마루. 197쪽.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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