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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18>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18>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5.10.25 18: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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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과 한용운 시에 전범이 된 포석의 첫 시집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한국 최초의 창작 시집인 포석의 ‘봄 잔디밭 위에’는 효시(嚆矢)라는 문학사적 가치와 함께, ‘한국의 시’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미답(未踏)의 세계에 하나의 전범(典範)을 제시했다는 데에도 큰 의의가 있다.

2015년 10월 16일 진천에 있는 ‘포석 조명희 문학관’에서 열린 조명희 학술 심포지엄은 그 가치에 대한 토론의 장이 됐다. 이날 심포지엄은 유성호 한양대 교수의 ‘조명희 시의 낭만성과 현실성’과 김외곤 상명대 교수의 ‘인도주의적 휴머니즘에서 민족의 삶에 대한 관심으로’를 발제로 진행됐고, 김주희 침례신학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2부 토론회에는 오만환 시인(진천문인협회장)과 이석우 시인(문학평론가), 정연승 소설가, 그리고 필자가 패널로 참여했다.

 

▲ 한국 근현대시에서 큰 족적을 남긴 김소월(왼쪽)과 한용운. 김소월은 1925년 첫 시집 ‘진달래 꽃’을 한용운은 1926년 ‘님의 침묵’을 발간했다. 한국 근대문학의 큰 봉우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두 시집은 1924년 포석 조명희가 발간한 한국 최초의 창작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전범(典範)으로 삼았기에 그 예술적 가치를 담보해 낼 수 있었다.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이날 심포지엄에서 유의미한 주장을 제시했다.

 

조명희 시는 비극성의 실재를 가장 먼저 한국 시사(詩史)에 선구적으로 도입하고 착근시킨 공로를 가지고 있다. 그후 이러한 충동과 원리가 프로시인인 임화, 이찬 등에 이어졌고 오장환, 이용악, 백석 시편들로도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비극성의 시적 실재들을 미학적 원리로 해명하고 우리 시사에 착근시키는 것은, 그동안 이러한 시적 지향에 철저하게 인색했던 관행, 곧 근대문학의 생채기로 기억하는 부정적 평가를 넘어, 비극성이라는 원리를 우리 시사의 중요한 육체로 형성해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처럼 조명희 시의 정점은, 민족주의와 낭만성을 비극성이라는 미적 범주로 통합하였고, 나아가 민족 현실의 전체성을 사유하는 성과를 거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성과는 그가 러시아로 망명한 후 쓴 작품들까지 포괄하여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 2015년 10월 16일, 조명희 학술 심포지엄 발제 ‘조명희 시의 낭만성과 현실성’, 유성호 한양대 교수

 

유 교수는 포석의 시를 두고, ‘비극성의 실재’라는 키워드로 접근했다. 그리고 포석은 ‘비극성의 실재’라는 키워드를 한국 시사에 선구적으로 도입하고 착근시켜 임화, 이찬, 오장환, 이용악, 백석의 시편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 진행된 발제자와 패널들과의 토론에서 유 교수는 포석의 시집 ‘봄 잔디밭 위에’가 가지고 있는 큰 의미를 덧붙였다.

 

“조명희 선생은 최초의 희곡을 썼고 최초의 시집을 냈지만 사실 김소월(35)의 진달래꽃에서 한국 시의 봉우리가 높아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월이 시집을 내기 1년 전에 포석은 이미 밝은 음색의 음악성과 탄력있는 시를 남겼습니다. …… 조명희 선생은 어둡기 그지없는 세계에서 ‘봄’을 이야기 합니다. 봄은 밝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생, 어머니와 그 의미가 맞닿아 있어요. 어머니는 모성, 모성은 생명력, 생산력과도 연계가 되죠. 그것은 김소월과 한용운(36)에는 없는 것입니다. 선생의 시적인 재능이 정말 높은 봉우리였구나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포석 선생이 1920년대 후반에도 시를 지속적으로 썼다면 하면 안타까움이 있어요. 너무 성급하게 시를 접고 산문으로 갔지요. …… 1924년이라는 시대는 우리 시사에 전범이 없을 때였습니다. 한 시인이 시를 쓰고 시집을 낸다는 것은 영향을 타고 극복해야 하는데, 참고할 시집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포석이 가진 선구성이었죠. 포석이 시집을 낼 때 31세였습니다. 당시로는 적지 않은 나이였죠. 포석이 1924년 시집을 묶을 때만 해도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문학적 합의’가 없었던 때였습니다. 포석이 첫 창작시집을 낸 뒤에는 ‘저 것이 시’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상태였습니다.(김소월과 한용운은 포석의 시집을 보며 하나의 전범으로 삼았다는 것) 포석 이후 1∼2년 후에 나온 시집(소월의 첫 시집 ‘진달래 꽃’은 1925년에, 만해의 ‘님의 침묵’은 1926년에 간행됐다)에 비해 형상성 등이 조금 성근 것은 포석의 ‘봄 잔디밭 위에’가 미답의 세계를 개척한 전범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한국 시사에 우뚝 선 봉우리로 평가되는 김소월과 한용운이, 그리고 여타의 질량감 있는 근대 시인들이 한국 시단을 풍성하게 살찌울 수 있었던 토대에는 포석의 창작 시집 ‘봄 잔디밭 위에’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시집은 후대 시인들에게 전범이 되어 이정표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포석의 첫 창작시집 발간은 미답의 세계에 대한 이정표가 되는 전범으로서의 역할과 불모지 조선 시단에 시집의 전형을 착근(着根)시키고 발아(發芽)시키는 데 필요한, 풍부한 토양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여기에서 시집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한 시인의 시편들을 관통해 시집에 응축돼 흐르는 시인의 작가관과 세계관, 우주관 등이 온전히 녹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개의 단편적이고 단선적인 횡시적(橫時的) 시편들은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통시적(通時的) 시집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 조선 시단에 있어 1920년대 중반은 시사(詩史)에 큰 획을 그은 시기였다. 포석 조명희가 1924년 한국 최초의 창작시집인 ‘봄 잔디밭 위에’(왼쪽)를 발간된 이후 1년 차이로 1925년 김소월이 ‘진달래꽃’(가운데)을, 1926년 한용운이 ‘님의 침묵’(오른쪽)을 발간했다.

(35) 김소월(金素月)

한국의 대표적 시인으로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호는 소월. 1902년 출생, 1934년 사망.

평안북도 구성 출생으로 두살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해 정신병을 앓게 되자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했다.

사립인 남산학교(南山學校)를 거쳐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에 다니던 중 3.1운동 직후 한때 폐교되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졸업했다.

1923년 일본 동경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9월 관동대지진으로 중퇴하고 귀국했다. 오산학교 시절 조만식(曺晩植)을 교장으로 서춘(徐椿), 이돈화(李敦化), 김억(金億)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특히, 그의 시재(詩才)를 인정한 김억을 만난 것이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단의 벗으로는 나도향(羅稻香)이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우며 고향에 있었으나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개설, 경영했으나 실패한 뒤 심한 염세증에 빠졌다. 1934년에 고향 곽산에 돌아가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시작활동은 18세 때인 1920년 창조에 시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했다.

이 무렵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로는, 1922년 개벽에 실린 ‘금잔디’, ‘첫치마’,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개여울’, ‘제비’, ‘강촌’ 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삭주구성’, ‘가는 길’, ‘산’ 등이 있다. 그 뒤 김억이 있는 영대(靈臺) 동인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소월의 시작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써두었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됐다. 이 시집은 그의 전반기의 작품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시단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킨 작품집으로서 한국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민요시인으로 등단한 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調)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다.

 

(36) 한용운(韓龍雲)

1879년(고종 16년) 8월 29일 출생, 1944년 6월 29일 사망.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충남 홍성 출신이다.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 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리고, 1894년 16세 되던 해 동학혁명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됐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했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得度)했다. 불교에 입문한 뒤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며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했고, 1910년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백용성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했다.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돼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26년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했다.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았다.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자리를 겸직했다. 1930년 ‘불교’라는 잡지를 인수, 사장에 취임했다. 1944년 6월 2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별세,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됐다.

친한 벗으로는 이시영, 김동삼, 신채호, 정인보, 박광, 홍명희 등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비문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1962년에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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