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고 조화돼야 한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1924년 4월 1일 포석이 쓴 ‘봄 잔디밭 위에’ 머릿말을 보면 그가 자신의 시와 시세계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졌는지 알 수 있다. 포석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드러내는 ‘예술론’을 그리 많이 쓰지는 않은 것을 비춰볼 때 이 글은 포석의 예술세계를 살펴보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일천한 지식 탓에 다소 거칠고 투박하지만, 뜻을 살펴 풀어본다.

 

空間의 無限의 길을 걷는 宇宙를 한 不死鳥에 比할진대 宇宙 自體나 한 마리의 새나 한 사람의 靈魂이 무엇이 다르리오.

한 生命이 굴러나감에 거기에는 반드시 線과 빛과 소리가 있을 것이다.

마치 한 마리의 지렁이가 땅 속에 금을 긋고 지나감과 같이, 한 마리의 새가 虛空을 저어 끝 없이 날아감 같이 우리의 靈魂이 深化되고 淨化되어 나갈수록에 걸음걸음에 아름다운 曲線과 빛과 소리가 있을 것이다. 그 소리가 靈魂의 行進曲일지며 그 빛이 靈魂의 袈裟일지며 그 曲線이 靈魂의 行路일 것이다.(이 세가지는 다 各各 한 가지 속에서도 全體를 다 볼 수 있다.)

그 靈魂 自體가 藝術的이며, 우리가 表現한 것이 우리의 藝術品이다.

 

포석은 이 글에서 사람의 영혼을 강조하고 있다. 무한한 우주나 한 마리의 새나 한 사람의 영혼이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한 생명에는 곡선과 빛과 소리가 있다.

생명에 깃든 곡선과 빛과 소리라는 내재된 시적 자아가, 영혼이 심화되고 정화될수록 그 걸음걸음(시적 형상화)에서 그 소리는 영혼의 행진곡으로, 그 빛은 영혼의 가사로, 그 곡선은 영혼의 행로라는 시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 그 자체는 무한한 우주나 불사조에 비할 수 있는 예술적 대상이며, 그것-소리는 영혼의 행진곡으로, 그 빛은 영혼의 가사로, 그 곡선은 영혼의 행로로-을 표현한 것이 예술이 된다는 것이다.

환언해 보면, 포석이 이 즈음 가졌던 예술론은 범우주적 존재론이 아니었나 싶다.

 

藝術은 色다른 靈魂 제 自身의 全的 發露이다.

작은 몸채 보기 싫은 감장새의 재재 거리는 소리를 누가 듣기 좋아하리오마는, 긴 목을 빼어들고 끝 없는 虛空을 바라보며 땅 끝과 하늘을 가는 線으로 툭 쳐서 마주 매는 듯한 ‘끼∼륵’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두루미의 울음을 누가 좋아하지 아니하랴.

저마다 목청 좋은 詩人이 아닐지며, 저마다 빛깔좋은 몸채가 아닐지며, 저마다 걸음 잘 하는 靈魂이 아닐지어늘, 이 여러 가지를 갖춘 偉大한 藝術家가 나옴이 어찌 쉬운 일일까보냐.

偉大한 靈魂의 所有者라고 반드시 다 詩人이 되지 못할지며, 詩人의 素質만 가졌다고 좋은 詩人이 되지 못할지며, 詩人의 才技만 가졌다고 훌륭한 詩人이 되지 못할지라.

偉大한 人格의 所有者로 豊富한 詩想과 如神한 技巧를 兼한 大詩人의 出現이 있다 하면, 宗敎界의 메시아와 같이 藝術界의 메시아가 아니고 무엇이랴.

 

예술은 저 마다의 개성의 발로에서 비롯된다고 포석은 말한다.

목청이 좋고, 빛깔좋은 몸채를 지니고, 걸음 잘하는 영혼 등 모든 것을 두루 갖춘 위대한 예술가가 나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라 해도, 시인의 소질만 가졌다고, 시인의 재기만 가졌다고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없는 것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뤄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이야기다. 위대한 인격으로 풍부한 시상과 신과 같은 기교를 겸비해야 대시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포석은 척박한 조선 시단에 최초의 창작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내며 자신이 그런 위대한 시인이길 열망했고, 종교계의 메시아와 같은 위대한 시인이 후대에 나오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人類靈魂界에 偉大한 産物이 나오기는 때와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될지라. 猶太末期에 있어 救世主가 出現함과 같이 藝術界에도 또한 때가 아닌 데야 그 사람의 出現을 바랄 수 있으랴. 이것은 目下 世界를 향하여 물어도 疑問일 거 같거늘 하물며 偉大한 文化의 밑거름이 없고 또한 粗蠻하나마 勇躍의 民族的 元氣가 不足한 이 땅이랴.

그러나 어찌 하였던지, 우리는 希望을 가졌다.(이것은 特殊한 使命을 가지고 나온 朝鮮魂의 生과 文化의 出産을 期待하는 意味) 이 希望을 가졌으므로 장차 大人物이 나올 것을 期待하고, 거동에 길앞잡이 선 질나라비 셈으로, 이씩둑걱둑 지꺼리며 읊던 것을 먼저 내어놓게 된다.

 

위대한 산물이 나오려면 그 시대와 위대한 인물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유태말기의 구제주인 예수가 출현하는 것처럼 예술계에도 시대와 인물의 ‘교집합’이 이뤄져야 하는데, 하물며 위대한 문화의 밑거름이 없고 조만(粗蠻·거칠고 야만스러운)하나마 용기있게 도약하려는 민족적 원기가 부족한 조선의 땅이고 보면 어찌 위대한 예술계의 인물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며 포석은 한탄한다.

하면서도 그는 희망을 이야기 한다. 포석은 특수한 사명을 가지고 나온 조선혼의 생과 문화의 출산을 기대하는 희망을 이야기 한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이지만, 그런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장차 대인물이 나올 것을 기대하고, 그런 거동에 길앞잡이 선 질나라비 셈으로 포석은 조선 시문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이씩둑걱둑 지꺼리며 읊던 것(자신의 최초 창작 시집 ‘봄 잔디밭 위에’)을 먼저(조선 최초로) 내어놓게 됐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포석은 예술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담론을 풀어낸다.

 

藝術은 內容과 形成이 一致하고 調和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眞理를 말한 것이라고 다 아름다울 것이 아니오, 말만 아름다웁다고 다 좋은 眞理일 것은 아니다. 藝術家가 眞理를 探究하는 哲學者는 아니지만, 내어놓은 作品 가운데 거지반 다 삐뚜루된 眞理라 하면 作品의 十의 八九는 아름답지 못한 데야 어찌하랴. 세상에는 形式만 偏重하는 技巧派 藝術家도 있으며 內容(主로 훌륭한 實成)만 偏重하는 生命派 藝術家도 있다. 그러나 그는 다 完全치 못한 이들이다. 偉大한 藝術家의 心境이 聖者의 心境과 공통됨을 보라. 偉大한 藝術品 가운데에는 隱然히 倫理(通俗的 意味가 아님)를 말하며 眞理를 말함을 보라. 빛나는 太陽을 보며 아름다운 꽃을 보라. 이 같이 藝術的인 自然 가운데 말하지 않는 宗敎가 있으며 말하지 않는 哲學이 있다. 支流에 있어서 다 한 가지임과 같이, 最高의 것에는 眞善美가 다 合致될 것이며 안팎없이 다 一致調和될 것이다.

그러나 한 生命의 젊은 때와 같이, 新興하는 藝術에는 形式보다 內容이 더 充實하여야 할 것이다. 일찍 病들어 붉게 익어 떨어지는 실과가 되지 않고, 거칠고 감상궂으나마 큰 成熟을 預期하는 풋실과 같이 곱게 분 바르려는 형식에만 기울어지지 않고 씩씩하고 기운찬 內容을 要求할 것이다.

그것은 偉大한 成熟이 앞으로 저절로 옴을 預期함이라.

 

예술은 내용과 형성(형식)이 일치하고 조화로워야 한다. 좋은 진리(내용)를 말한(충족시킨) 것이라고 다 아름다울 것이 아니오, 말(형식)만 아름답다고 다 좋은 진리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예술가가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자는 아니지만, 내어놓은 작품 가운데 왜곡된 진리를 말하면(내용을 담보하지 못하면) 작품의 완결성을 찾을 수 없게 된다.

형식만 편중하는 기교파 예술가나 내용만 편중하는 생명파(37) 예술가 모두 작품의 완결성에서는 완전하지 못한 이들이라 할 수 있다. 위대한 예술작품 가운데에는 통속적 의미가 아닌 윤리를 말하며 진리를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술적 자연에는 종교와 철학, 그리고 문학이 한 가지와 같아 최고의 것에는 진선미가 다 합치될 것이고 조화를 이룰 것이다. 내용과 형식의 조화로운 완결을 주장하면서도 포석은 그 가운데 형식보다는 내용에 더 방점을 찍고 있다. 한 생명의 젊은 때와 같이 새롭게 흥하는 예술에는 형식보다 내용이 더 충실해야 하는데, 일찍 병들어 붉게 익어 떨어지는 과일이 되지 않고 거칠고 감상궂으나마 큰 성숙을 예기하는 풋과실과 같이, 곱게 분만 바르려는 형식에만 기울어지지 않고 씩씩하고 기운찬 내용을 요구한다고 설명한다.

내용에 충실해야, 지금은 다소 설익었을지언정 앞으로 위대한 성숙이 저절로 된다는 이야기다.

 

▲ 1930년대 생명 현상에 관한 시적 관심을 공통으로 한 유파로 활동한 ‘생명파’ 시인들. ‘인생파’라고도 한다. 1936년에 간행된 시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과 유치환이 1937년 주재한 시 동인지 ‘생리(生理)’에 나타난 생명의식에서 비롯됐다. 특히 ‘시인부락’의 동인인 (사진 왼쪽부터)서정주, 오장환·김동리·유치환 등의 시로부터 발견되는 생명의식에서 강렬하고 독특한 생리적인 욕구, 도덕적 갈등, 시대의 인식 등이 함께 융합되어 나타난 데서 생명파 또는 인생파라는 호칭이 주어졌다.

(37) 생명파(生命派)

포석이 지칭한 ‘생명파’는 하나의 유파를 가리켜 쓴 말은 아니다. 포석이 ‘봄 잔디밭 위에’를 펴낸 시기가 1924년이고 보면, 이때에는 어떤 유파가 생성되기는 커녕 조선 시단 자체가 불모지와 다름없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치환과 서정주, 오장환, 김동리 등이 1930년대 ‘생명파’ 혹은 ‘인생파’라는 유파를 형성해 활동한 것을 보면, 포석이 가지고 있던 예술론적 안목을 다시금 되돌아 보게 한다.

포석이 생명파의 활동을 예견했든, 아니면 그들이 포석의 예술론에 동조해 그런 작품을 썼든, 혹은 서로의 상관관계없이 한국 시단에 ‘생명파’라는 새로운 유파가 생겨났든 상관없이 포석이 가졌던 에술론적 혜안은 퍽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된 김에 생명파에 대해 알아보자.

‘생명파’는 1930년대 생명 현상에 관한 시적 관심을 공통으로 한 유파로, ‘인생파’라고도 한다. 1936년에 간행된 시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과 유치환이 주재한 시 동인지 ‘생리 生理’(1937)에 나타난 생명의식에서 비롯됐다. 특히 ‘시인부락’의 동인인 서정주·오장환·김동리·유치환 등의 시로부터 발견되는 생명의식에서 강렬하고 독특한 생리적인 욕구, 도덕적 갈등, 시대의 인식 등이 함께 융합되어 나타난 데서 생명파 또는 인생파라는 호칭이 주어졌다. 유치환은 우주적 교감과 생명에 대한 열애를 노래하면서 시대의 불행도 함께 의식한 시를 썼다. 삶의 고통을 초탈하려는 의지로의 표현인 비정한 태도가 시에 투영되었는데, 이러한 생명의식은 전 시대의 시문학적 전통인 유물론적 인간의식이나 예술지상주의적 순수의식 등에 반하여, 삶 자체의 현상에서 시의 가치를 이루려는 일단의 시도라고 평가된다.

서정주는 시인부락 1집에서 ‘문둥이’, ‘옥야’, ‘대낮’, 그리고 2집에서 ‘화사’, ‘달밤’, ‘방’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서정주의 초기 시의 특징을 보인다.

‘문둥이’는 천형(天刑)의 인간이면서도 자신의 주어진 생명을 향유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일제치하의 고통이나 억압과도 연결된 생명의식의 미학이기도 하다. ‘대낮’은 두 남녀의 성애의 욕구와 작열하는 태양과 마약이 어우러진 적나라한 생명 현상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실제적인 감각과 삶의 기초로서의 육체적 욕망이 속임없이 사실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또 ‘화사’에서는 순녀에 대한 화자의 육체적 욕망이 뱀과 이브의 대응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욕망에 구속되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욕망에서 일탈하고자 하는 화자의 상반된 감정이 적절히 드러나고 있다. 도덕적 자아와 욕망의 본능이 서로 엉켜 있는 정서적 양식을 노래한 것이다. 오장환은 ‘정문’에서 성숙한 여인과 어린 신랑의 이야기를 풍속적 자료에서 취재하여, 여인의 욕망과 종가집의 도덕적 지향과의 불협화를 적절히 제시한다. 또 그 도덕적 위선을 폭로하면서 삶의 근원적인 욕망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있다.

김동리는 ‘나긴 밤에 낫지만’, ‘간이는 간이는 다시 없네’ 등을 발표했고, 이 시에서 사랑을 얻지 못한 화자의 독백을 통하여 삶의 본연한 모습을 시화하고 있다. 생명파 시인들은 우리 시사에서 삶의 본연성을 욕망적 차원에서 진실하게 드러내었고, 그에 내재한 욕망과 도덕의 갈등을 시적으로 극복하려는 데 주요한 성취를 이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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