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번 버스’라는 중국영화가 있다. 어떤 여성 기사가 버스를 몰고 있다. 깡패 3명이 기사한테 달려들어 성희롱을 한다. 승객들은 모두 모른 척한다. 한 중년남자가 깡패들을 말리다가 심하게 얻어맞는다. 급기야 깡패들이 버스를 세우고 여성 기사를 숲으로 끌고 들어가서 번갈아 성폭행한다. 한참 뒤 깡패 3명과 여성기사가 돌아온다. 여성기사는 중년남자한테 다짜고짜 내리라고 한다. 중년남자가 주삣거리며 내리지 않겠다고 한다. 여성기사는 “당신이 내릴 때까지 출발 안 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중년남자가 그대로 버티니까 승객들이 나서서 그를 강제로 끌어내린다. 버스의 문이 닫히고 그의 짐이 창 밖으로 내던져진다.

버스가 출발한다. 여성운전기사는 커브 길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버스는 그대로 천 길 낭떠러지로 돌진하여 추락한다. 중년남자는 아픈 몸을 이끌고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 가다가 자동차 사고현장을 목격한다. 저 아래 낭떠러지를 바라보니 방금 자신이 타고 왔던 그 버스였다. 운전기사는 물론 승객 모두 사망하였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영화화 한 작품이다. 정의감이 실종된 오늘의 인간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를 주제로한 영화다. 정의감을 잃지 않은 중년 남자를 살려두어 관객에게 감동의 메시지를 전해 준다.

그러나 여성기사의 화풀이 방식의 관점에서 보면 논의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그녀는 욱하는 성질을 가진 여성인 듯하다. 성폭행 사건을 겪으면서 극도의 모멸감과 수치심으로 이성적 통제가 불가능한 분노의 상태에 빠졌다. 분노에 대한 복수심은 적대자와 방관자 모두에게 투사되었다. 그리고 불과 몇 분 후 복수심은 적대자와 방관자를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 버렸다.

물론 자신을 화나게 한 폭행 당사자들과 방관자이며 이기적인 승객들에 대한 복수심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복수심으로 그들 모두와 동반자살을 선택한 것은 지나친 보복행태이다.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낸 참극이다.

욱하는 성질은 누구든 조금씩 갖고 있다. 욱하는 마음에 일을 그르친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런 경험 때문에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죄의식에 빠져 있을지 모른다. ‘분노하는 성질이 터졌을 때 가장 무서운 것은 행동 조절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실제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들은 내 것 네 것 가리지 않고 물건을 부수기도 한다. 다른 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끔찍한 말을 하기도 한다.’(<로널드 티 포터 에프론, <욱하는 성질 죽이기>) 순간의 모멸감을 누그러뜨리지 못한 라스코리니코프(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는 유대인 노파를 죽이고 감옥에 갇히었으며, 뫼르소(까뮈, <이방인>)는 태양빛이 따갑다는 이유로 아랍인을 죽이고 그래서 프랑스 광장에서 목이 잘리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홧김에 하는 행동은 반드시 후회를 낳는다. 화를 통제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행동이기 때문에 뒷감당하기 어려워진다. 홧김에 하는 말은 폭언이 되고, 홧김에 음식을 먹으면 폭식이 되고, 홧김에 하는 운전은 폭력운전이 되고, 홧김에 마시는 술은 폭음이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여 홧김에 일을 낸다면, 이 사회는 아마 활극장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미성숙한 사람은 작은 것에 목숨을 건다.(미국 격언) 사람마다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낭패를 보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제라도 화에게 쫓기지 말고 화를 바라보는 여유를 가져보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도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도보다 낫다’(잠언16:32)고 하였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화를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화가 나타날 때마다 화를 지그시 눌러보는 것이다.

<청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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