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이(동양일보 편집상무)

▲ 김영이(동양일보 편집상무)

우리는 부음을 접할때 가끔 ‘부의금과 조화는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를 함께 받곤 한다. 그때는 정말로 유족의 뜻대로 부의금이나 조화를 안보내도 괜찮은 건지 망설이게 된다. 그래도 조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은 주머니에 부의금을 넣고 가는 게 상례다. 부의금을 내고 안내고는 그 다음의 일이고.
요즘 박근혜 대통령의 조화(弔花)를 놓고 말들이 좀 있는 것 같다.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의 부친 유수호 전 의원의 빈소에 박 대통령 조화가 끝내 보이지 않아서다.
박 대통령이 직접이든 간접이든 조의를 표하거나 말거나, 조화를 보내거나 말거나 그건 순전히 그의 뜻이다. 조문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조화를 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욕할 것도,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항상 상대가 있는 법. 우리 같은 일개 국민의 상가(喪家)에 대통령 조화가 안보인다고 해서 서운해 할 유족이나 조문객들은 없다. 대통령 조화가 보여야 할 상가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얘기하면 대통령 조화가 있어야 할 곳에 그것이 없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누구나 그 배경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번 유승민 의원 부친 빈소에서 끝내 안보인 박 대통령 조화가 그렇다. 대통령 조화가 언론의 조명을 받은 것은 이들 관계의 특수성 때문이다. 이 조화 하나가 박 대통령과 유 의원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박근혜와 유승민은 2004년 인연을 맺는다. 비례대표로 의원배지를 단 유승민은 박 대표 비서실장으로 임명했고 측근두뇌로 대권준비를 도왔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경선땐 박 캠프의 메시지 팀장으로 활약했다. 박 후보가 이명박 후보에게 패한 뒤에도 가장 늦게까지 캠프에 남아 뒷마무리를 한 게 유승민이다.
유승민은 2010년 한나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최고위원으로 당선될때까지만 해도 ‘친박계’라는 타이틀이 따라 붙었다. 그러나 언론은 점점 그를 친박에서 제외해 갔다. 2012년 4월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다양한 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쓴소리 파문’으로 둘 사이는 아주 멀어졌다
5년이 지난 2015년 유승민은 박근혜가 찍어내야 할 사람 1순위가 됐다. 지난 6월 국회법 파동 과정에서 박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당선뒤 배신의 정치는 반드시 국민이 심판해야 한다”며 유승민 원내대표를 지목했다. 그후 유승민은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원내대표직을 내놓아야 했다.
당시 언론들은 정치로 꼬인 것은 정치로 풀어야지 박 대통령이 오기정치로 정국을 더욱 꼬이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에서 나타났듯이 정부의 늑장 대응으로 사태를 더 키우고 인사실책과 소통부족으로 소중한 국정에너지를 허비하고 국민의 불신을 자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 일 후에도 박근혜와 유승민은 여전히 긴장관계다. 유승민 찍어내기가 아직도 유효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박 대통령 최측근인 윤상현 의원은 “지난 총선때 대구·경북에서 60% 가량 물갈이해 전체의석이 과반을 넘을 수 있었다”고 빈소에서 TK 물갈이론을 거론했다. 빈소까지 찾아와 유승민 솎아내기 2라운드 각본을 슬쩍 흘린 게 아닌가 싶다.
청와대는 유족의 뜻을 존중해 박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청와대 인사들의 조문에 대해 “의원상(喪)엔 간 일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정 그렇다면 할말이 없다. 그런데 청와대 이병기 비서실장이나 김현숙 고용복지수석은 조화를 보냈다. 분명 조화(調和)롭지 않은 장면이다. 근데 박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인 2012년 9월 유승민 장모상을 직접 찾았다. 이때도 당명 개명을 놓고 둘 관계는 소원했지만 유 의원이 선대위 부위원장을 맡는 것으로 통 크게 손을 잡았다. 근래엔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 부친상과 황진하 사무총장 모친상때 조화를 보냈다.
유족의 뜻을 존중해 조화를 보내지 않았다는 청와대의 설명을 멋쩍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박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지 않은 것을 두고 한 언론이 기사를 통해 여론을 떠 보니 84% 가량이 ‘속좁은 정치’로, 나머지는 ‘안받겠다고 하니 보낼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데는 부모의 후광이 절대적이었지만, 그의 ‘원칙’과 ‘신뢰’를 중시한 모습 또한 큰 힘이 됐다.
그런데 아무리 밉더라도, 한때 자신의 비서실장 부친상에 직접 조문은 못가더라도 그 흔한 조화 하나 보내지 않았으니 이를 보고 쩨쩨하고 쪼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 이런 기회에 통 크다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을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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