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와 민주화 이끌며 '양김시대'…83년 신군부 저항 23일 단식투쟁

▲ 1983년 5월, 23일 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모습.

'3당 합당' 결단으로 대선승리…하나회 척결 군부숙정·금융실명제 도입

IMF 경제위기 초래, 재임시 아들 구속 등 '오점'

 

(동양일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서슬 퍼렇던 유신시절의 막바지인 1979년 당시 신민당 총재이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의원직에서 제명 당하면서 남긴 일성(一聲)은 오랫동안 민주화를 갈망하던 국민의 뇌리에 뿌리 깊게 박혔다.

바른 길로만 가겠다며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정치 좌우명으로 삼았던 김 전 대통령이 22일 영면의 길로 접어 들었다.

타고난 건강 체력을 자랑했으나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이날 0시21분 서거했다.

한국 정계의 '거목'으로 버텨왔던 한 정치인이 스러진 것이다. 김 전 대통령처럼 '드라마틱'한 인생을 걸었던 정치인도 드물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 대한민국에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이어진 군부 정권에 마침표를 찍고 첫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평생을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유신정권과 신군부 등 독재에 저항하며 때로는 동지로, 때로는 앙숙으로 '영원한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

지난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이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이제 한국 정치사에 '양김(金) 시대'라는 장(章)도 마침내 역사속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게 됐다.

●최연소 국회의원-헌정사상 첫 제명 의원 = 김 전 대통령은 만 26세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최연소 의원에 등극해 9선까지 지냈다. 최연소 기록은 우리 의정사에서 아직도 깨지지 않고 현재 진행형이다.

이후 그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며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겨 평생 반독재 투쟁이라는 험로를 걷게 된다.

의원직 제명도 헌정사상 최초로 당했다. 제1야당의 당수로서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이란 민중혁명으로 미국이 물밑에서 지지하던 팔레비왕정 체제가 무너진 사태를 언급하며 한국 내에서도 이러한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한 게 발단이 됐다.

야당이 본회의장을 막아서자 여당은 다른 곳으로 회의장을 옮겨 제명안을 처리했고, 그때 남긴 유명한 말이 바로 '닭의 목을 비틀어도…'였다.

전두환 신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3년 5월 가택연금된 김 전 대통령은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이며 신군부에 온몸으로 대항했다.

최근에야 최장기 기록이 깨진 김 전 대통령의 단식은 이후 두고두고 회자되는 정치권의 한 장면으로 남았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 1990년 1월 3당합당은 '승부사'라는 자신의 별명을 다시 한번 확인한 순간으로서 청와대의 주인이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김 전 대통령은 '구국의 결단'을 명분으로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3당을 합쳐 민자당을 창당했다.

평생 투쟁의 대상이었던 정치 세력과 손을 맞잡은 것으로 그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합당을 결행했다.

이후 여소야대를 일순간 뒤집고 여당의 2인자로 변신에 성공했으며, 우여곡절을 거치며 2년만인 92년 5월 민자당 후보로 선출돼 같은 해 대권까지 거머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통령이 꿈"이라던 거제 어촌 출신이 1954년 의회에 입성하고 나서 38년만에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하룻밤에 '별' 50개 떨어져…차남 김현철 비리에 귀막아 =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취임하자 마자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면서 개혁의 기치를 높게 들었다.

당시 하룻밤새 떨어진 별이 50개로 당시 파장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케 한다.

또 역사 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을 줄줄이 감옥으로 보냈다.

이와 함께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고, 쇠말뚝뽑기·구조선총독부 철거와 같은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 작업이 이때 이뤄졌다.

금융실명제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추진했다. 1993년 8월 12일 '긴급 재정경제 명령 제16호'를 발동, 당일 오후 8시를 기해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을 위한 법률'을 전격 시행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집권 초 90%에 달하는 지지율을 누리기도 했으나 정권의 인기를 의식한 깜짝 행보식의 독단적인 정책과 부패 비리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국민으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다.

1997년 1월 한보 사태가 터지고, 차남 김현철씨가 이에 연루돼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됐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김현철씨에 대한 첩보가 계속 보고됐지만 김 전 대통령은 이를 외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1996년 12월26일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의 노동법 날치기 국회 처리를 하면서 정권은 급격한 하락세를 걷게 된다.

급기야 1997년 12월 6·25 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맞아 결국 정권교체의 빌미가 됐다. 그해 11월까지도 IMF의 심각성을 김 전 대통령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굶으면 죽는다" = 직선적인 성격 만큼이나 남긴 어록도 풍부하다.

김 전 대통령의 성격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단히 어려운 일을 아주 쉽게 생각한다"고 한 평가에 잘 묻어난다.

지나치게 단순하게 일을 처리한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지만 실제 업무 처리도 큰 줄기만 잡고 대부분 장관을 비롯한 책임자에게 맡겨 놓았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머리는 빌릴 수 있지만 체력은 빌릴 수 없다"고 말하며 매일 아침 조깅으로 건강을 다지기도 했다.

이밖에 의원직 제명 당시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겠다"는 발언도 유명하다.

2003년 당시 최병렬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 비리 의혹 특검법 통과를 관철시키기 위해 10일간 단식하자 위로차 방문한 김 전 대통령은 "굶으면 죽는 게 확실하다"라는 명언 아닌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일본 정계 지도자들이 현재처럼 일제 강점과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정당화하는 발언들을 내뱉자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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