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쿠데타 처벌할 수 없다' 주류 인식 타파

▲ 2006년 10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오른쪽)이 전직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의 김영삼(오른쪽 두번째), 김대중(왼쪽) 전두환(왼쪽 두번째)전 대통령 등의 모습.

헌정 질서 문란 범죄 '역사적 단죄' 필연 교훈 남겨

특별법 제정·재수사 지시 22일만에 전두환 노태우 구속 기소

 

(동양일보)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당대에 언급조차 금기시됐던 현대사의 왜곡 문제에 대해 사법적 단죄를 내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역사적 밑거름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군부 세력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국정을 장악한 1979년 12.12 사태, 이듬해 쿠데타에 저항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은 김 전 대통령이 집권한 1993년에도 올바른 역사적 좌표가 매겨져 있지 않았다.

법조계에서도 현행법 틀을 바꾸지 않는 이상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기류가 지배적이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경우 6공화국 때인 1988년 국회 청문회를 통해 진상규명이 시도됐지만 흐지부지된 상태였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지만 헌정 질서를 뒤흔든 12.12와 5.18에 대한 처벌이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1993년 5월 12.12 사태에 대한 고발 사건을 접수한 검찰은 이듬해 10월 이 사태를 군사반란이라고 규정하면서도 관련자들을 기소유예하거나 불기소 처분했다.

'역사 바로세우기'를 핵심 국정과제로 내건 김 전 대통령의 의지는 이때부터 발휘된다. 당시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4천억원 비자금설'을 폭로한 게 도화선이 됐다.

김 전 대통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고 검찰에는 재수사를 명령했다. 검찰은 같은해 11월 특별수사본부를 꾸려 고강도 수사에 들어갔다.

수사 착수 22일 만인 1995년 12월21일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신군부 핵심 관련자들과 함께 구속기소됐다. 12.12와 5.18에 대한 책임 규명은 물론, 두 전직 대통령의 부정 축재까지 밝혀졌다.

두 전직 대통령의 형사 공판은 '세기의 재판'으로 불렸다. 전직 대통령 두 명이 수의를 입고 법정에 서는 것은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1심에서 사형과 징역 22년6월을 각각 선고받았던 전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은 항소심에서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으로 감형됐고,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항소심 형량대로 확정됐다.

12.12 사태는 명백한 내란이었으며 5.18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사안에 대해서도 두 전직 대통령의 내란 목적 살인죄가 인정된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두 전직 대통령이 각각 2000억원이 넘는 뇌물을 챙긴 점도 인정돼 같은 액수의 추징금이 선고됐다.

신군부의 쿠데타와 권력형 부패를 단죄할 수 있었던 건 특별법 제정과 검찰 재수사라는 초강수를 둔 김 전 대통령의 의지 덕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 같은 김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는 국민적 합의 없이 헌정을 문란하게 했다면 그 성공 여부를 떠나 처벌돼야 한다는 교훈을 온 국민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고질적인 정경유착의 고리를 차단하고 정치자금을 빌미로 한 '검은 돈거래'에 쐐기를 박아 우리나라의 투명성을 높였다는 평가도 뒤따른다.

두 전직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의 임기 말인 1997년 12월 특별사면됐다. 5·6공 정권 창출의 불법성을 사법적으로 단죄한 뒤 국민 대화합을 이루겠다는 정치적 취지로 특별사면이 단행된 것이다.

이를 두고 법조계 일각에서는 판결 확정 후 불과 8개월 만에 사면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역사 청산과 사법 정의를 이루려던 김 전 대통령의 뜻을 스스로 퇴색시킨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김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는 사법 영역 외에 다른 분야에서도 진행됐다.

옛 조선통독부 건물은 광복 50주년이 되는 1995년 철거됐고, 일본식 표현으로 여겨진 국민학교 명칭도 같은해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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