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초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 없다" 정책전환 암시

▲ 1996년 4월, 제주에서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유채꽃밭을 함께 거니는 모습.

북 NPT 탈퇴 선언·'불바다' 발언·북핵위기로 남북관계 급랭

한반도 긴장고조 미국 클린턴 정부 북폭 계획…YS 강력 반대

김일성 사망으로 정상회담 무산…대북정책 '오락가락' 비판도

 

(동양일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집권기인 1993년부터 1998년까지는 북한 핵 문제를 비롯해 김일성 사망, 북미 제네바 합의, 잠수함 사건 등으로 초래된 한반도의 격랑을 헤쳐나가야 했다.

특히 1993~1994년에 불거진 1차 북핵 위기를 넘어서고자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으나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라는 대북정책의 획기적인 전환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은 동맹국인 미국보다 같은 민족인 북한과의 화해·협력을 더 중시하겠다는 의미로까지 확대해석되기도 했다.

그해 3월 9일 발표된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노인의 송환은 대북 유화정책의 신호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노인 송환 방침이 공식 결정된 직후인 3월 12일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고, 그해 3월 19일 남북 회담 과정에서 북측 대표로부터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1차 북핵 위기가 불거지자 김 전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핵무기를 갖고 있는 상대와는 결코 악수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며 북핵 불용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후 북핵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1994년 6월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했고, 당시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의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검토하기에 이른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의 북한 핵 시설 폭격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클린턴 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이 북한을 공습하면 북한은 즉각 남한의 주요 도시와 휴전선 일대를 향해 공격을 개시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온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고, 김 전 대통령이 이를 수용해 한반도 위기는 해소 국면으로 돌입하게 됐다.

그러나 그해 7월 8일 김 주석의 사망으로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무산되고 이후 국내에서 김일성 조문 파동이 불거지면서 남북관계는 급랭했다.

남북관계가 악화하는 와중에도 미국과 북한은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에서 북한 핵 문제 해결에 합의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미국이 주도한 북미 협상에 불만을 표시하기로 했다.

그해 10월 7일 미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선 "미 정부가 북한과의 핵 협상에 있어 순진하고 과도한 신축성을 보이고 있으며, 따라서 미 정부는 북한이 핵개발 포기하도록 압력을 강화해야지 태도를 완화해서는 안 된다"며 미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제네바 합의는 2002년에 불거진 2차 북핵 위기의 와중에 사실상 폐기됐다.

한편, 김영삼 정부의 통일방안은 김 전 대통령이 1994년 8.15 경축사에서 발표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다.

이는 노태우 정부의 '한반도공동체 통일방안'을 계승, 발전시킨 통일방안으로 △화해·협력 △ 남북연합 △1민족 1국가 등 통일과정을 3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등 이후 정부로도 계승됐다.

다만,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은 일관성 없이 '온탕'(유화정책)과 '냉탕'(강경정책) 오락가락했다는 비판적인 평가도 받고 있다.

이인모 노인 송환과 대북 쌀 지원과 같은 유화정책을 펴다가도 김일성 조문 파동과 북미 핵 협상 때는 대북 강경자세를 보여 정책의 일관성이 없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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