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바로세우기'·민주화 배경으로 軍위안부 등 강경대응

▲ 1994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총리와 악수하며 환담하는 모습.

(동양일보) "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1995년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 정치인들의 '과거사 망언'을 큰 소리로 꾸짖었던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이 발언은 문민정부의 대일외교 기조를 집약하고 있다.

권위주의 체제 종료와 함께 들어선 문민정부는 국내에서는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로 대표되는 '역사 바로세우기'를 추진하며 대일외교에서도 강경한 목소리를 냈다.

한국 국력이 신장하고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국민의 단호한 대일 정서가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진 점도 배경이 됐다.

김영삼 정부 시기 한일관계의 최대 쟁점은 역시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공론화돼, 김영삼 정부 출범 직전에는 양국 간 감정적 현안으로 부상한 상태였다.

이에 대해 김영삼 정부는 출범 직후인 1993년 3월 이른바 '도덕적 우위에 입각한 자구 조치'를 선언했다. 피해자들에 대한 금전적 보상은 일본에 요구하지 않고 한국 정부가 직접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발상의 전환'은 일본에 대한 심리적 압박을 오히려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같은 해 8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당시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담화'를 발표한 것도 이런 맥락 속에서였다.

고노담화와 더불어 현재 한일관계의 뼈대가 된 무라야마(村山) 담화도 김영삼 정부 당시 발표됐다.

사회당 소속인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1995년 8월 15일 전후 50년을 맞아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흐름에 대한 역풍으로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도 되풀이됐다.

'한일 합방으로 일본이 좋은 일도 했다'는 에토 다카미 총무청 장관의 1995년 11월 발언에 김영삼 대통령은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며 강경하게 응수했고, 일본의 반발을 불렀다.

당시 김영삼 정부의 대일 정서가 반영된 발언이지만, 비외교적인 대응이라는 지적도 일각에서 나왔다.

문민정부 후반기에도 대일관계 악재가 잇따랐다.

1996년 시작된 한일 어업협정 개정 협상은 배타적경제수역(EEZ)의 경계 획정 문제와 독도 영유권 문제가 맞물리면서 양국간의 공방으로 이어졌다.

결국, 일본은 1998년 1월 한일 어업협정 파기를 일방적으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일본의 금융지원이 필요한 상황임을 이용했다는 비난이 일면서, 대일관계가 더욱 경색된 가운데 문민정부도 임기를 마무리했다.

문민정부의 대일외교는 사회당이 참여하는 연립정권 수립 등 일본 내 정치적 환경 변화와 맞물려 적지 않은 성과를 냈지만, 감정적인 대응으로 관계 경색을 불러왔다는 비판도 받았다.

과거사 문제가 양국의 본격적인 외교 쟁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문민정부 시기는 현재와 같은 한일관계 패턴을 만든 '분기점'이 됐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 문민정부는 세계화를 핵심 가치로 하는 이른바 '신(新)외교'를 표방하며, 탈냉전 시대에 맞는 외교의 방향 전환을 의욕적으로 모색했던 것으로도 평가된다.

특히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1996년 2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고 세계무역기구(WTO)에도 1995년 발족 당시부터 회원국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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