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분야 최대 업적 꼽혀…지하경제 축소·금융거래 투명성 제고

▲ 사진은 1993년 8월,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를 발표하는 김영삼 대통령.

 (동양일보)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집니다.“

김영삼정부의 최대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금융실명제는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 45분 발표되고 나서 전격 시행됐다.

'돈에 이름표를 달아주자'는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국민은 모든 금융회사와 거래할 때 가명·차명이 아닌 실명을 사용하고, 금융회사는 이를 의무적으로 확인하게 됐다.

기존 계좌 중 실명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거나 실명이 아닌 것으로 확인된 자산은 인출이 금지됐다.

비실명 거래가 횡행하던 당시 금융관행에서 금융실명제는 경제혁명으로 불릴 만한 파격적인 조치였다.

금융실명제는 지하경제를 축소하고 금융거래·과세의 투명성을 높이는 발판이 됐다.

김영삼정부 이전에도 금융실명제를 시행하기 위한 시도가 여러 번 있었다.

1982년 장영자·이철희 부부의 어음 사기사건을 계기로 첫 번째 금융실명제 도입 시도가 있었으나 비실명 거래로 이익을 얻는 집단이 강력히 반발해 유보됐고 1988년 노태우 정부 때는 정치적 요인으로 좌절됐다.

김 전 대통령은 캐비닛에 박혀 먼지가 쌓여가던 금융실명제를 다시 꺼내들었다.

이 제도를 시행하기 위해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권'까지 발동했다.

대통령 긴급경제명령은 1972년 박정희정부 이후 20여 년 만에 처음 나온 것이었다. 그만큼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던 셈이다.

차명·가명으로 하는 경제활동은 지하경제를 키우고 투기성 자금이나 부정·부패 자금의 통로가 될 우려가 있다.

하지만 금융실명제는 각종 자금 흐름 추적을 가능케 해 이런 우려를 원천봉쇄하는 효과를 낸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에 따르면 금융실명제 도입 이전인 1992년 한국의 지하경제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29.1%로 전체 경제 규모의 3분의 1에 달했으나 도입 직후인 1993년 24.3%로 1년 새 4.8%포인트 하락했다.

금융실명제 도입 직전인 1993년 1분기에는 중소기업의 23%가량이 사채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정도로 사채 의존도가 상당했다.

그러나 실명제 도입 이후 사금융 시장이 위축되면서 서민과 중소기업은 은행 등 공식적 경로로 금융거래를 더 많이 하게 됐다.

차명계좌를 알선해 예금을 유치했던 은행들이 다양한 금융상품을 내놓으면서 한국 금융은 선진화를 위한 기틀을 닦을 수 있었다.

금융 자산과 소득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되면서 금융소득종합과세가 도입돼 과세 시스템이 한층 공평·투명해졌다.

기업들의 '뇌물 관행'도 이전과 비교해 눈에 띄게 사라졌다.

금융실명제의 성공을 바탕으로 김영삼정부는 1995년 부동산 거래에도 실명제를 도입했다.

부동산 실명제는 부동산 거래를 반드시 매매 당사자의 실제 이름으로 하도록 한 것으로, 자신이 보유한 부동산을 다른 사람 명의로 등기해도 법적 보호를 해주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차명을 통해 탈세와 탈법으로 부동산 투기를 하는 것을 막겠다는 김영삼정부 경제정책의 두 번째 '승부수'였다.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는 음성화된 거래를 양지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지만 아직 보완해야 할 점이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동산실명제 시행 20년이 지났는데도 연간 수백 명이 자신 명의의 부동산을 다른 사람 이름으로 등기했다가 적발돼 과징금을 부과받고, 형사재판에 넘겨지고 있다. 부동산 차명 거래는 고위공직자 청문회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안이다.

금융실명제 역시 차명거래에 대한 규제가 미흡해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국회에도 차명거래를 금지하는 금융실명제 보완법들이 여러 건 발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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