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월 재계 14위 한보철강 부도, 국가부도 신호탄

▲ 사진은 1998년 1월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와 악수하는 김영삼 대통령의 모습.

 

삼미, 기아차, 쌍방울, 해태 등 대기업그룹 줄줄이 무너져

취임 초 90% 넘게 치솟았던 YS지지율, 임기말 8%로 추락

 

(동양일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는 재임 중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어했던 김영삼정부가 가장 쓰라리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집권 초기 금융·부동산 실명제로 속도감 있는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1996년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는 성과를 냈지만 집권 후기 IMF 사태로 김영삼정부의 경제 개혁은 빛이 바랬다.

1997년 1월 재계 14위이던 한보그룹 계열 한보철강의 부도가 IMF 사태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3개월 뒤 삼미그룹이 부도를 냈고 7월에는 기아자동차가 도산했다.

이후 쌍방울그룹, 해태그룹이 벼랑끝 위기로 내몰렸고 고려증권, 한라그룹이 차례로 무너졌다.

1997년에만 부도를 낸 대기업의 금융권 여신이 30조원을 훌쩍 넘기면서 신용 경색이 빚어지면서 금융시장은 큰 혼란에 빠졌다.

해외 금융 기관에 부채를 상환하느라 외환보유액이 바닥나자 김영삼정부는 1997년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 12월 3일 IMF와 긴급자금 지원에 합의하고 550억 달러를 지원받았다.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불유예)을 겨우 면하긴 했지만 후폭풍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기업이 줄도산하는 과정에서 정리해고자가 속출했다.

IMF가 기업의 과다한 차입 경영에 따른 부실화가 금융기관 부실화를 몰고 온 점을 들어 긴급자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금융기관은 물론 대기업의 구조조정을 요구하면서 기업의 인원 감축 칼바람은 이어졌다.

IMF 사태는 김영삼정부가 OECD 가입을 무리하게 추진하려다가 역풍을 맞은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OECD에 가입하려면 외화출자와 개도국 지원 등 의무 사항이 많았는데, 당시 야당에서는 우리 경제의 구조와 체질로서는 시기상조라는 지적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그러나 김영삼정부는 세계 경제 질서와 국제협상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국가 위신도 크게 높아질 것이라는 점 때문에 OECD 조기 가입을 밀어붙였다.

이후 정부는 OECD의 힘을 빌려 다자간투자협정(MAI), OECD 뇌물방지협약 등 각종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기업들은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과다차입 위주의 경영관행을 일삼던 재벌 대기업은 속속 무너져 내렸고, 이는 금융기관 부실화로 이어졌다.

OECD 가입은 외국자본의 국내 유입을 늘릴 것으로 예상됐지만 경제 시스템이 흔들리면서 애초 기대했던 성과를 낳지 못했다.

금융경색이 발생하면서 IMF의 도움 없이는 국가 경제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대한민국도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는 국민적 자부심은 1년 만에 참담함으로 바뀌었고 김영삼정부는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IMF 사태를 가져왔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취임 초 90% 넘게 치솟았던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IMF 사태를 겪은 임기 말에 역대 최저 수준인 8%대까지 떨어졌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분석실장은 "IMF 위기는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 OECD에 가입하면서 금융·금리·자본 자유화를 추진하면서 속도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해 빚어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