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논설위원/중원대 교수)

▲ 김택(논설위원/중원대 교수)

1928년 중국 송나라 스님이었던 혜개는 불교 수행을 모아 하나의 책을 냈는데 그게 ‘무문관’이다. 무문관에는 “큰 길에 들어가는 문은 없으나(大道無門) 그 문은 어떤 길로도 통한다(千差有路). 이 길을 잘 지나면(透得此關) 홀로 천하를 걸으리라(乾坤獨步).”라는 명구가 나온다. 노자철학에도 무위자연(無爲自然)과 함께 대도무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상선약수라는 말처럼 물처럼 낮은 곳으로 임하고 어떤 장애물도 탓하지 않고 막힘없이 흘러간다는 뜻이다.
성경에도 좁은 문이 있다. 이 문을 통과해야 천당에 간다. 구 한말 혼란의 시기 홀연히 현시하며 세상을 주유한 강증산도 일만 2천명만이 도통의 진경 세상을 맛볼 수 있다고 갈파했다. 그만큼 문에 장애물은 없으나 그 문을 가기까지 고통과 부침, 절차탁마의 고행과 쓰디쓴 맛을 음미하며 험한 고지를 가야한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역사의 한 획을 그으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하셨다. 특유의 결단과 집념을 지닌 그는 정말 거산이었고 거인이셨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며 조국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개선시키려 헌신한 YS는 가슴속에 대도무문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가 이렇게 강한 신념의 정치인으로 성장한 이면에는 그의 종교적 이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어떤 것에도 두려움 없이 나설 수 있는 것은 두려움 없이 신에게 의지하고 보호하는 종교적 믿음, 신념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초산테러를 당한 적이 있었고 달걀테러도 당했다. 그럼에도 그의 신념과 지조를 꺾지 못했다. 1979년 박정희 정부에서 국회의원직을 제명당할 때 그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며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여러 일화가 있다. 먼저 그가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순방할 때 고생하는 병사들에게 자기가 찬 시계를 즉석에서 주며 여러 선물로 주며 격려했다고 한다. 이에 감격한 병사들은 할 말을 잊었을 것이다.
두 번째,  빌 클린턴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같이 조깅을 하였다. 키 큰 클린턴에 질 수 없다고 생각한 김영삼은 후반에 질주하여 따돌렸다고 한다. 그의 승부 근성을 찾아보는 대목이다.
세 번째, 부정부패를 척결하고자 무던히 애쓴 그는 측근이나 자식도 부패에 연루되자 가차 없이 감옥에 보냈다. 당시 아비의 심정은 회한과 눈물로 지세웠다고 한다.
그가 청와대에 있을 때  수석비서관이 골프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골프를 치고 오자 대통령 탁자에 발을 올려놓고 잘하라고 훈계했다고 한다.
네 번째, 그가 박정희대통령 암살범인인 김재규와 같은 금령김씨 일가라서 김재규는 끊임없이 회유하고 만남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회유와 압박에도 거절하고 대도의 문을 향해 뚜벅뚜벅 갔기에 독재의 정치가 막을 내렸다고 본다.
 
김영삼은 변화와 개혁을 통해 군부정권의 때를 세신하엿다. 그는 자기의 재산을 스스로 공개하였고 공직자 재산공개를 추진했던 인물이다.        
김영삼 정부시절 어느 누구도 찬성을 하지 않았던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를 이룩한 것은 대한민국이 투명한 행정으로 나아간 원동력이었다.
그가 1993년 금융실명제를 발표하면서“ 신한국건설을 위해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개혁중의 개혁이며, 우리시대 개혁의 중추이자 핵심”이라며 “금융실명제는 민주주의의 완결에 가까운 큰 결의이며, 정경유착의 고리를 완전히 끊게 될 것이다“고 청렴관을 피력했다.
이런 조치로 정경유착이나 관료부패는 많이 사라졌고 굳 거버넌스의 시대로 내디딜 단초를 제공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군부 내 패거리 군벌집단을 해체하였다. 끼리끼리 해먹는 군부 내 연고주의를 타파하고 공정한 군 인사를 단행하고자 노력했다. 수십 년간 지속되어온 군 사조직 세력의 종지부를 끊었다고 본다. 그는 역사바로세우기에 힘썼다.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반란을 단죄했다. 역사를 거꾸로 돌렸던 그들을 감방에 넣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 문민정부로서는 당연했지만 그런 결기를 가진  김영삼만이 해낼 수 있었다.
또한 일제의 잔재인 총독부 건물을 해체하였다. 해체당시 일본 우익정치인들은 오금이 저렸다고 한다. 일본의 역사망언에 그는 1995년 11월 장쩌민 중국 국가 주석과의 회담에서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고 강하게 비판했고  대일본 정치인들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그런 치적도 과오 앞에 무너졌다. 외환위기를 가져온 무능한 대통령으로 한동안 낙인찍혔다. 외환위기로 인해 수많은 기업과 은행 등이 무너졌고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노숙자로 전전했다는 것은 누구도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대한민국이 그 당시와 비교할 수 없지만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경제 불안 상황이 오지 말란 법은 없다.             
또한 그가 군부정권들과 손잡고 3당 야합을 하여 배신의 정치라는 소리를 들었다. 김영삼은 후에 이를 매우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속죄하기 위해서 군 사조직인 하나회척결이나 전두환과 노태우를 감옥에 보냈다고 한다. 이제 김영삼과 김대중같은 거인들은 갔다. 시대를 보고 한 역사를 풍미하며 대도무문의 정치를 보여준 그 분들이 천상에서나마 영면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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