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숙(논설위원 / 사회학박사)

▲ 김현숙(논설위원 / 사회학박사)

온갖 공해와 소음 속에서도 노란 빛으로 끝까지 자태를 뽐내던 도시의 은행나무들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잎들을 간신히 붙잡고 성큼 다가온 겨울 앞에 애처롭게 떨고 있다. 내년 봄에는 또 새싹을 틔워 아기손바닥 같은 귀여운 잎을 내밀며 살아있음을 과시할 테지만, 푸르고 무성했던 잎들이 노랗게 물들어 잠깐 빛을 발하다가 이내 그 빛이 바래고 낙엽이 되는 것을 보면 왠지 서글프고 마음이 시리다. 
지난 주 늦으면 안 되는 회의 때문에 지하철을 타러 내려가는데 얼굴이 동그랗고 고우신 할머니 한 분이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가시는 방향의 지하철을 어디서 타면 되냐고 물으셨다. 몇 개 노선이 겹치고 상행선과 하행선이 복잡하게 얽힌 역인데다 마침 가는 방향이 같아서 할머니를 모시고 몇 개나 되는 에스컬레이터와 복잡한 통로를 거쳐 플랫폼까지 오는 동안, 그리고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제법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됐다.
76세가 되신 할머니는 오랫동안 지병을 앓던 할아버지와 사별한지 채 1년이 안됐고, 편찮으셨지만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직접 운전을 하셨던 할아버지만 따라다니다 보니 밖에 나오면 어디가 어딘지 도통 알 수가 없고 두렵기만 하시다고 했다. 게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약한 치매가 왔는데 갈수록 깜빡깜빡하는 증상이 자주 나타나서 큰 걱정이고 부끄럽다며 누차 미안해하셨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평생 해왔던 대로 서둘러 식사를 준비하다가 ‘이걸 누구 먹으라고 하나?’ 하는 생각이 들면 힘없이 가스 불을 끄게 되고, 시장에 가서도 온갖 찬거리를 흥정하다가 어떤 날은 쓸쓸히 돌아서고 또 어떤 날은 팔이 떨어지게 장을 봐오기도 한다니 이게 어찌 못된 치매증상 때문 만이겠는가? 있는 것이 시간뿐이라서 아주 큰일이라며 눈물을 글썽이는 할머니를 보면서 정말 남의 일 같지 않은 마음에 나도 가슴이 먹먹하고 눈앞이 흐려짐을 어쩔 수 없었다.
무언가 할머니를 위로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용기를 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드렸다. 배우자를 잃는 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스트레스 중 제일 큰 스트레스고 그래서 지금은 경미한 치매증상이 왔지만 열심히 병원 다니고 치료받으면 좋아지실 수 있다. 어차피 어떤 부부도 한번은 헤어져야 하는데, 할아버지가 그동안 한평생 살림하고 자녀 키우고 간병까지 하신 할머니께 더 늦기 전에 할머니만의 삶을 살아보라고 먼저 가신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그동안 못 해본 것 하고 싶었던 것 다 해보고 즐겁게 지내셔라. 그래도 외롭고 보고 싶으면 할아버지가 곁에서 늘 지켜보신다고 생각하고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다 얘기하고 미운사람은 이르기도 하셔라. 그리고 마음이 울적할 때일수록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시고, 식사 때마다 혼자 먹는다고 아무렇게나 대충 만들어서 볼품없는 그릇에 드시지 말고 맛있게 정성들여 만들어서 제일 멋진 그릇에 예쁘게 담아서 스스로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우아하게 드셔야 한다고 두서없이 이것저것을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조금은 위로가 되셨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수줍어하며 당신의 취미는 그릇을 세트로 사서 모으는 일이고 지금도 심심하면 그 그릇들을 꺼내서 닦고 챙긴다고 하셨다. 특별한 날에만 세트로 상에 올려졌을 그 그릇들이 할머니께는 많은 추억이 깃든 참으로 소중한 물건일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가지만, 아껴서 자식들에게 물려줘봐야 유행도 지나고 고맙다고 할 것도 아니니 제발 아끼지 말고 귀하게 생각하시는 할머니나 마음껏 쓰시라고 했다. 열심히 얘기하다 보니 이 얘기들은 결국은 유학 떠날 때 병석에 계셨던 내 어머니와 아버님 돌아가시고 고향집을 혼자 지키셨던 시어머님께 다 해드리지 못했던 말들이었고, 이제는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내가 나에게 자기최면으로 되뇌어야 할 말들이었다.
내릴 역을 걱정하시는 눈치여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가르쳐드리고 궁금하면 뭐든지 주변사람들에게 수시로 물어보시고 묻는 것은 절대로 미안하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먼저 내려야 해서 마지막으로 “할머니 즐겁고 건강하게 사셔야 해요. 화이팅!” 했더니 부끄러워서 간신히 작은 소리로 “화이팅!” 하시던 할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드렸다.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로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현재 662만명(인구의 13.1%)이고 노인인구 중 독거노인도 급속히 증가해서 137만명(노인인구의 20.7%)에 이른다. 내적·외적으로 준비할 겨를이 없이 갑자기 맞이한 100세 시대가 재앙이 아닌 축복이 될 수 있도록 노인문제로 꼽히는 빈곤, 질병, 소외, 무위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고령화대책뿐 아니라 가족과 이웃과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의 관심과 보살핌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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