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묘순(편집국 기자 / 옥천지역담당)

▲ 김묘순(편집국 기자 / 옥천지역담당)

문자언어가 자주 수신자 중심으로 수용되지만 이는 반드시 바람직하거나 옳은 것은 아니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지만 발화자의 의도와 항상 같게 수신자가 발화의도를 수용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령하고 자신에게 득이 되는 유리한 말과 정황을 기억 장치에 저장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추구하는 방향과 파장은 언어를 발화하는 사람의 개성과 열정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를 수신하는 수용자에게는 갖가지 형태의 스펙트럼을 펼치며 언어의 경계를 다양하게 펼친다. 그러면서 그 경계의 언어 내용을 모호하게 또는 흐릿하게 한다. 이것은 그릇된 언어 내용에 편중해 오해를 부르는 해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특히 얼굴을 보고 직접 대화를 할 때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현상은 심각하게 두드러진다.
개인의 존재와 가치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현대 사회는 통신매체의 발달로 직접 만나지 않고 대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간혹 발화자의 의도에서 멀어진 언어내용이 수신자에게 부딪치면 발화자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언어는 발화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수신자의 수용의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 경찰관이 중징계를 받고 전보 조치를 당하는 안타까운 경우를 봤다.
그는 2남 1녀를 둔 성실하고 자상한 가장이며 평소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아이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경찰의 임무를 수행하는 열정이 넘치는 착한 경찰관이었다. 짐작하건데 문자 내용은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청소년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도출하려는 의미로 또는 좀 더 따뜻한 이미지의 경찰관으로 다가가려는 순수한 노력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발화자의 문자의미는 이미 수용자 중심에 서서 해석된 채 그를 곤경에 빠뜨리고 말았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귀결 지어주는 언어,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능력인 언어, 그것이 소리 없는 즉 음성이 아닌 문자라는 형식을 갖춘 통신매체를 통해 전달될 때 우리를, 의미의 구심점을 잃은 지리멸렬한 인간으로 얽어맬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사랑’이라는 애틋한 감정과 함께 전달될 수 없기에 생긴 수신자 중심의 해석에서 온 오해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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