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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21>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21>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5.11.29 1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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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목발 두드리는 나무꾼의 노래에 조선혼이…”
▲ 민촌 이기영이 포석 조명희에 대해 쓴 수필 ‘조명희 동지를 추억함’ 원고(왼쪽). 1962년 7월 ‘조선문학’에 게재된 이 원고에서 이기영은 “포석 조명의 동지는 애국적 정열의 시인이었다”며 “서울에 있을 때 봄철에 날씨가 좋은 날이면 포석과 함께 야외로 산보를 다녔다”고 추억하고 있다. 한설야(본명 한병도)는 황동민과 그의 부인 최금순이 주축이 돼 1959년 펴낸 포석 조명희 선집에 ‘정열의 시인 조명희’란 원고(오른쪽)를 보냈다. 한설야는 이 글에서 포석과 처음 만났던 일부터 동지이자 스승으로서의 포석에 대해 술회하고 있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그러면서 포석은, 그 다양한 것들을 좇아가라는 말 대신 우리의 것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노래하는 것이 가장 우리다운 것이며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늘 높고 물 맑은 이 땅에 산은 물결 같이 구부러지고 길도 굽이굽이 감도는데, 이 산 저 산 넘어가며 우는 뻐꾹이가 바로 우리의 소리라는 것이다. 아침해가 봉우리에 솟고 자진 안개 흩어질 제 하늘 끝을 바라보고 우는 두루미가 또한 우리의 소리일 것이며, 평화를 추구하는 우리의 혼은 마을 울 밑에 우는 닭이고, 우리 비애의 혼은 뻐꾹이나 두루미이다.

포석은 또 서구 사조에 빠져, 그것이 최고의 가치인 양 정체성을 잃어버린 시인들에게 따끔하게 충고한다. 우리는 보드레르가 될 수 없으며 타골도 될 수 없다고. 우리는 우리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의 것만 쓸 데 없이 흉내내지 말을 것이다. 붉은 장미가 어떻니 당신의 레이스가 어떻니 하는 서양사람의 노래만 옮기려 하지 말고, 우리는 먼저 산비탈길 돌아들며 지게목발 두드리어 노래하는 초동으로부터 그들이 부르는 우리의 노래를 들으라 한다. 하늘빛은 멀리 그윽하고 얇은 햇빛 가만히 쪼이는 봄에 그 햇빛의 상한 마음을 저 혼자 아는듯이 가는 바람이 스칠 때마다 이리저리 나부끼는 실버들 가지를 보라며, 거기에서 바로 조선혼의 울음소리를 거기서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외래어 몇 개 시편에 집어넣어야 마치 그 시가 세련된 것인양 여기던 1920년대 시인들의 풍조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최고의 가치는 영혼도 없이 무작정 남의 것만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알고 우리의 것을 알고 우리의 것을 시어로 형상화내는 것, 그것이라고 일침하고 있다.

민병기 교수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보들레르가 될 수 없으며 타고르도 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의 것만 쓸데없이 흉내내지 말 것이다. 붉은 장미가 어떠니 당신의 레이스가 어떠니 하는 서양사람의 노래만 옮기려 하지 말고, 우리는 먼저 산비탈길도 타들며 지게목발 두드리어 노래하는 초동에게 향하여 들어라. 하늘 빛이 맑으니 그윽하고 얇은 해 가만히 쪼이는 봄에 그 햇빛의 상한 마음을 저 혼자 아는 듯이 가는 바람이 스칠 때마다 이리저리 나부끼는 실버들가지를 보라. 조선혼의 울음소리를 거기서 들을 수 있다.

인용한 윗 글에서 그는 서구풍을 흉내내지만 말고 우리 고유의 노래를 개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 우리의 자연에 가득찬 조선혼의 울음소리를 시에 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가 강조한 조선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윗 글을 보면 지게목발 두드리는 나무꾼의 노래나 버들가지 바람소리 속에서 조선혼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혼이란 개인의 혼이라기 보다는 민족의 혼 혹은 민중 다수의 혼을 의미하고 있다. 즉 개인의 영혼이 아니라 보편적 영혼을 의미한다.

또 울음소리도 개인의 슬픔을 뜻하기 보다는 민족 다수의 애상과 사회적 비애감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개인의 특수한 비애나 애수의 감정보다도 민족 다수의 보편적인 비애나 고통에 그의 시적 관심이 모아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민병기, ‘망명작가 조명희론’, 1990년 4월 30일 ‘뒷목’ 19집 수록.

 

포석은 조선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하면서도 시인으로서 겪을 수 밖에 없었던 고충에 대해 토로한다. 조선 시단에 선구적 입지의 포석이고 보면, 그런 난관은 누구보다 더 겪었을 터였다.

 

우리의 말은 참 아름답기 못한 것이 거지반이다. 文化의 밑거름이 적으니까 그러하겠지만 말이 모두 商人化하고 野俗化된 것 뿐이다. 詩化된 말이라고는 몇 마디가 되지 못함 같다. 앞으로 天才詩人이 많이 나와서 말을 많이 내어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天才이기로 한 두 사람의 힘만 가지고야 될 수 있으랴. 元來에 偉大한 文化를 가진 나라 사람들을 보면 長久한 期限에 한 사람이 한 가지 두 사람이 두 가지씩 여러 사람이 두고두고 쌓고 쌓은 것이 그네의 보배인 文化이다.

걸어온 길은 적고 앞으로 갈 길은 많은 우리네가 무엇을 한다고 할 때에는 참 기막힌 일이 많다. 所謂 詩를 쓴다고 하다가도 말이 없어서 답답할 때에는 화를 내고 붓대를 집어던진 적도 여러번이요, 어떤 때에는 슬픈 적도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남보다 類다른 네겹 다섯 겹의 苦痛을 가진 우리네가 그 마음의 아픔을 혼자 조용히 앓을 자리도 얻을 수 없이 떠도는 처지이라.

여기에 모은 詩 몇 十篇이란 것도 몇 해를 두고 모은 것이나, 貧窮이 그림자 같이 따라다니는 이 사람에게는 모처럼 詩想이 나올 때에도 열의 아홉은 周圍의 喧憂 不安으로 因하여 다 달아나 버리고, 僥倖히 수가 좋아서 조용한 자리를 얻을 때에는 열의 하나 둘 쯤은 잡아서 쓰게된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던히 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지만 인자는 그것도 시들한지라, ‘쓰면 쓰고 말면 말거라’ 하는 내어던져둔 마음이 되었다. 다시 슬프다!

 

포석은 우리의 것을 찾아 가는 여정이 비록 힘들고 더딜지라도, 또 그것이 조금 세련되보이지는 못할 지라도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면서도 반대편에 놓인 조선의 현실을 냉철한 눈으로 분석하고 그 해법을 제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우리의 말은 문화의 밑거름이 적은 탓에 아름답지 못한 것이 대부분인데, 그 말은 설상가상 상인화되고 야속화돼버렸다. 그래서 시화된 말(아름다운 말)은 몇 마디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천재시인이 많이 나와서 말을 많이 내놓아야(시적 형상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재라도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안되니 많은 사람이 동참해야 한다. 원래 위대한 문화를 가진 나라 사람들을 보면 장구한 기한에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두가지씩 쌓아놓은 것이 축적돼 그들의 보배인 문화가 됐다는 것이다.

하면서 자신의 습작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토로한다. 소위 시를 쓴다고 하다가도 쓸 말이 없어서 답답할 때엔 화를 내고 붓대를 집어던진 것이 여러번이고, 그것이 깊어 슬프기까지 하다. 게다가 일제식민지배라는,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네겹 다섯겹의 고통을 가진 우리는 그 마음의 아픔을 혼자 조용히 앓을 자리조차 얻을 수 없이 떠도는 처지임을 한탄한다.

‘여기에 모은 시 몇 십편이란 것도 몇 해를 두고 모은 것’이라는 말을 비춰보면, 대부분의 작품들이 빈궁이 그림자 같이 따라다니던 포석의 동경 유학 시절에 썼던 것으로 보인다. 모처럼 시상이 나올 때에도 열의 아홉은 주위의 훤우(喧憂·시끄럽고 떠들썩한 근심)와 불안으로 다 달아나 버리고 요행히 조용한 자리를 얻을 때 시상 가운데 열의 하나 둘 쯤 시로 쓰게 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너무 분하고 슬폈지만 이제 그것도 그만, ‘쓰면 쓰고 말면 말지’라는 마음이 됐다. 그래서 슬프다고 말한다.

 

여기에 실은 詩가 43篇인데, 모아두었던 抄稿 가운데에서 거리낄듯 싶은 것 數十篇은 모두 때려던지고, 여러번 데인 神經이라 이쪽이 도리어 過敏病에 걸려, 번연히 念慮없을 곳도 句節句節히 때려던지었다.

詩集을 3部로 나누어 ‘봄 잔디밭 위에’의 部, ‘蘆水哀音’의 部, ‘어둠의 춤’의 部로 하였다. ‘봄 잔디밭 위에’의 部는 故鄕에 돌아온 뒤에 쓴 近作詩이고, ‘蘆水哀音’과 ‘어둠의 춤’의 部는 예전 東京 있을 때에 쓴 習作 가운에서 모아놓은 것이다. 아무리 習作詩이나 그 가운데에도 靈魂의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음으로 그대로 추려서 싣게 되었다.

이 나눈 3部가 다 그 部部마다 思想과 詩風이 變還됨을 볼 수 있다. 그것을 線으로 表示한다 하면 初期作 ‘蘆水哀音’에는 透明치 못하고 거치르나마 흐르는 曲線이 一貫하여 있고, 그 다음 ‘어둠의 춤’ 가운데에는 굵은 曲線이 그쳤다 이어졌다 하며 點과 角이 거지반 一貫함을 볼 수 있으며,(激한 調子로 쓴 詩는 모두 빼었음) 또 近作詩 ‘봄 잔디밭 위에’는 그쳤던 曲線-初期와 다른 曲線이 새로 물리어 나감을 볼 수 있다. 詩가 마음의 歷史-끝없이 구불거린 거문고 줄을 밟아가는 靈魂의 발자취인 까닭이다.

1924년 4월 1일 作家

 

작가 머릿말의 마지막 부분은 그동안 포석이 써왔던 시편들을 조선 최초 창작시집 ‘봄 잔디밭 위에’로 엮어내면서 겪었던 심리적 압박감과 시편들이 시집에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포석이 시집을 낼 때 일제의 검열에 매우 시달렸다는 것이다. 하기야 반일과 항일의 선봉에 서서 사상적 문학적 저항운동을 펼쳐왔던 포석이고 보면 일경(日警)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낙인 찍혔던 것은, 그래서 그의 작품에 대해 ‘현미경 분석’을 하고 메스를 들이댔을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여기에 실은 시가 43편인데, 모아두었던 초고 가운데에서 거리낄듯 싶은 것 수십편을 모두 때려던지고 데인 신경이라 이쪽이 도리어 과민병에 걸려, 번연히 염려가 없을 곳도 구절구절이 때려던지었다고 포석은 말한다.

‘거리낄듯 싶은 수십편은 모두 때려던졌다’는 포석의 언술은 어떡해서든 시집을 발간해야만 했던 고육지책이었다.

이학인의 시집 ‘무궁화’가 포석의 ‘봄 잔디밭 위에’보다 5일 먼저 나왔으나 일경에 의해 바로 압수됐던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이기영은 포석이 시집을 발간했을 당시에 대해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1923년 후반기 부터는 포석(包石)의 필명으로 100여편의 시를 창작하였다. 그 중에는 ‘조선지광’, ‘개벽’ 등 잡지들에 발표된 것도 있으나 많은 시들이 1924년에 이르러 출판된 ‘봄 잔디밭 위에’라는 그의 첫 시집에 처음 수록되었다. 뿐만아니라 수십편에 달하는 가장 우수한 시편들이 일제 경찰의 무참한 검열로 말미암아 이 시집에서 제외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

조명희의 초기 시기에 있어서 비록 종교적 신비주의의 외피가 시적 사색의 사실주의적 심오성과 생활적 구체성을 저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외피를 한까풀 벗기기만 하면 그 내용에 있어서는 착하고 아름다운 인간과 생활에 대한 갈망의 빠포쓰와 당대 현실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의 비수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는 1924년부터 서울에 올라가 있었다. 도시 근로 인민의 비참한 생활의 비하층에서 생활의 진실을 직접 체험하고 관찰하면서 날로 앙양되어 가는 근로 인민의 투쟁과 접촉하기 시작하자, 그는 자기 시의 원천을 현실생활의 기본 모순과 그에서 빚어진 인민들의 투쟁에서 찾아내게 되었다.

- 이기영, ‘포석 조명희에 대하여’, 1957년 1월, ‘포석 조명희 선집’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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